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40화 (140/288)

불타는 곡창(3)

덜덜 떨리는 턱.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침.

댈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청동 구역은 일개 경비병이라도 깡 하나는 좋기로 유명했다.

도시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뒷골목과 낮은 거리는 그야말로 온갖 범죄의 온상이었으니까.

지금의 모습은 단순히 약에 취한 부랑자들 무리에 의한 충격이라기엔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봐, 정신 차려! 구체적으로 말해봐. 뭘 막으란 말이지?”

같은 생각이었을까. 시에나가 경비병의 추궁했다. 경비병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대답했다.

“처, 처음에는 그저 부랑자들이었소.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청동 구역 경비단은 결코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니다.

거대도시에서도 가장 거대한 이곳 청동 구역, 그 전체의 치안을 오롯이 홀로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니까.

비록 좁은 순찰 범위와 음지와의 유착 관계 등으로 평판이 좋지는 않지만, 이들의 실력만큼은 다른 도시들의 경비대와 비교해 명백히 뛰어났다.

댈런이 역행의 사도들과 싸울 당시, 청동 구역 전여게 숨겨진 음지의 처소들을 고작 며칠 사이에 일망타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따라서 이번 사태 역시 원래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어야 했다.

수천이 넘는 중독자라 해도, 마찬가지로 수천이나 되는 무장 경비병들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

실제로 소요가 일어난 지 초반 몇 시간은 그랬다. 사교도 사건 이후 경비병들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약에 취한 부랑자들은 금방 제압되는 듯했다.

“그 괴물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소.”

“괴물? 누구?”

“흐으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신음을 흘리며 몸서리치는 경비병.

“···전쟁의 신이시여.”

루시아가 전투기도로 힘을 불어넣어주자, 경비병은 가까스로 말을 이어갔다.

“···산처럼 쌓인 시체. 잿바람에 갈기갈기 찢기고, 덩굴이 자라나며 하나가 되는 거대한 몸뚱이. 내가 본 건 수십의 사람을 엮어내어 만든 괴물이었고, 그런 괴물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잿바람과 덩굴이었소.”

***

일행은 대로를 따라 달렸다. 예상대로 경비병은 적들이 창고 구역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의중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았다. 서부 지구의 곡물 창고는 팔시온이 자생력을 갖추게 해주는 큰 축 중 하나.

머지않아 시작될 본격적인 침공 이전에, 이를 무력화해 도시를 굶주리게 만들 생각이겠지.

‘경비병은 중독자들이 마치 군대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했어.’

댈런은 파른을 업은 채로 거리를 질주하며 생각했다.

경비단과 맞서는 중독자들은, 그가 낮은 거리에서 마주쳤던 놈들과는 전혀 달랐다.

낮은 거리를 벗어나며 부딪혔던 놈들은, 하나같이 인육을 탐하기에만 바빴던 짐승 같은 존재들.

반면 지상에서는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몇 시간만에 하나의 명령체계 아래 군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비병의 말에 따르면 중독자들 사이사이에 흑마법사나 암흑기사들이 보였다고 하니, 놈들이 중간 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아마 경계선 마을에서 싸웠던 놈들처럼, 이번 마약 사태를 유발한 덩굴의 마녀 휘하의 흑마법사들일 터.

‘덩굴의 마녀···그리고 잿바람이라.’

잿바람.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완전히 죽었는데.’

모든 것을 갉아버리는 잿바람.

그 끔찍한 저주의 술식으로 인해, 중반부 말미에 게임을 말아먹었던 적이 대체 몇 번인가.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고자, 소식이 닿은 즉시 르비바흐로 가 그 가능성을 꺾어버렸었다.

성검의 힘으로 확실하게 죽였다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다시 언급될 줄이야.

“···쯧.”

댈런은 가볍게 혀를 찼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창고 구역인 43구역에 근접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전투의 소음. 비명과 함성, 병장기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댈런, 마력이···.”

“알고 있소.”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에나가 말하려 했던 것처럼, 일대의 마력풍이 심각하게 요동치는 중이었다.

불길한 마력이 뒤섞인 걸로 보아, 지옥의 문이 열 개 가까이 열렸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잠시 멈춘 댈런은 파른을 등에서 내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루시아에게 꼭 붙어 있어라.”

“···옙.”

스릉―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뒤로 하고, 갑옷과 무기를 점검한 뒤 성검을 뽑아든다.

그에 맞춰 시에나도 한껏 마력을 끌어올렸고, 루시아 역시 신성문신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완만한 언덕 하나를 넘어가자 전장이 눈앞에 드러났다. 대로를 가로지른 경비병들의 방어선과, 그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수많은 중독자들의 싸움터였다.

“안쪽에서 보지.”

댈런은 그렇게 말하고 땅을 밀어찼다.

퉁―

단번에 고층 건물들의 지붕 높이까지 올라온 뒤, 공중에서 몸을 반전시키며 허공을 디뎌낸다.

먹구름을 불러올 필요는 없었다. 아까부터 부슬비를 내리던 하늘은 이미 어둑했으니까.

성검을 그러쥔 채 허공을 박차고, 벼락같이 지상을 향해 쏘아지는 신형.

그리고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붙는 푸른 빛줄기.

「뇌격」

꽈르르릉―!

직접적인 검격에 열 가까이가 부스러지고, 내리친 번개에 그 몇 배가 고꾸라진다.

뒤따르는 충격파에 우르르 넘어진 것만 추가로 수십. 댈런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답보」

내려앉는 순간 바닥에 착지하는 대신, 얕게 허공을 디뎌내며 검을 움켜쥔다.

첫 발디딤의 순간에 방출되는 마력 일부를 응축해, 완력으로 치환하는 답보의 고유 능력.

그 심상에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의 힘을 그대로 담아내어, 두 번째 발디딤과 동시에 사방으로 증폭해 흘려보낸다.

「뇌격 : 방류(放流)」

콰지지지직―!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푸른 번개의 줄기들. 거리의 판석이 깨져 튀어오르고, 전격에 꿰뚫린 중독자들이 녹색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단 한 차례의 공격으로 백 명이 넘는 중독자들이 쓰러졌다.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수순.

패래래랙!

그 시선에 대응하듯이, 자연스레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도끼가 홀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기 시작했다.

툭툭 떨어지는 팔다리. 서걱 하고 끊어지는 머리통.

수수깡처럼 쓰러지는 중독자들 사이에서 거무튀튀한 손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패래래―콱!

날아드는 도끼를 맨손으로 잡아챈다. 도끼는 잠시 꿈틀거렸지만, 검고 두꺼운 손은 더욱 억세게 움켜쥘 뿐이었다.

“흐흐흐, 다시 보는구나. 굼벵이 같은 야만인 놈.”

그 손의 주인인 암흑기사가 씩 웃었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날 아나?”

“하, 알다마다. 그때 곧장 네 목을 쳤어야 하는데, 방심한 탓에 팔 하나를 내어주고 말았지.”

덜컥.

암흑기사가 투구를 걷어올렸다. 검게 변색된 피부와 번들거리는 민머리가 드러났다.

“나 앙겔 즈트라무 경께서, 이번에야말로 네 방자함을 단죄하겠노라.”

“···아, 그때 그 머저리.”

민머리와 말투를 듣자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얼마 전, 미궁에서 귀환했을 때 중앙 광장에서 그를 협박했던 하급 기사였다.

“흐흐, 이제 기억나나 보군. 이해한다. 내 모습이 몰라보게 바뀌긴 했으니. 신께서는 내게 끓어넘치는 힘을 주시고, 새 팔까지 하사하셨지.”

철컥. 철컥.

암흑기사가 실실 웃으며 걸어왔다. 놈은 손도끼를 옆으로 내던지고, 등 뒤에서 거대한 전투도끼를 꺼내들었다.

타락한 마력으로 강화된 놈의 육체는 2미터를 가뿐히 넘어갔다.

새로 받았다는 오른팔은 무슨 트롤의 팔을 떼다 붙인 듯, 큼직해진 육신에도 기형적일 정도로 거대했고.

놈은 검고 두꺼운 손으로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유언을 남기거라 야만인! 나 암흑기사 앙겔 즈투라무, 라필렘의 이름으로 네놈을 바치겠노라!”

화르륵!

도끼날 위에서 불붙듯이 타는 검기. 선명하게 뭉클대는 사특한 마력의 예기였다.

암흑기사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 달려들었다. 놈이 검기 맺힌 전투도끼를 내리찍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냥 검을 올려벴다.

“으하하아···카학?”

캉!

자루 잃은 도끼날이 바닥을 찍는다. 판석에 박힌 도끼날에서 검기가 빠르게 흩어졌다.

댈런을 지나쳐 비틀거리던 암흑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본인의 도끼를 내려다봤다.

“무, 무슨···.”

놈은 댈런을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리고 그대로 무너졌다. 갑옷째 쪼개진 상반신이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엎어지고, 트롤 같은 손아귀는 몇 번 움찔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댈런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암흑기사가 내던진 도끼가 그에게 되돌아왔다.

도끼를 허리춤에 꽂은 그는, 달려드는 중독자들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즈음 대로 반대쪽에서도 깃털의 비와 신성력이 번쩍임이 동시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

세 사람이 전선을 휘젓고 다닌 덕분에, 방어선의 병사들은 어렵지 않게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루시아의 전투 기도는 경비대의 사기와 활력을 회복시켰고, 시에나의 주문은 넓은 범위의 중독자들을 빠르게 쓸어버렸다.

그 사이에 댈런은 흑마법사나 암흑기사를 보이는 족족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손에 지휘관의 목이 일곱 개째 떨어졌을 즈음, 지레 겁먹은 놈들은 남은 병력을 골목 안쪽으로 물렸다.

방어선의 한쪽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경비단에 합류한 댈런은, 병사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댈런. 이렇게 다시 뵙게 되는군. 도와줘서 고맙소. 귀관 덕에 살았소이다.”

“오랜만이오. 갑옷이 다시 바뀌었군.”

댈런은 가웨인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가웨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번쩍이는 기사단의 갑옷은 어디 두고, 그는 다시 침묵중대 특유의 낡은 판금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복귀할 생각은 아니었소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더군.”

“복귀?”

“사실 나는 진짜로 순은 기사단에 입단한 게 아니었소. 아니, 형식상으로는 들어간 게 맞으니 위장이라고 해야겠지. 애당초 십 년 넘게 함께한 부하들을 두고 나 혼자 어딜 가겠소만···시기가 좋지 않으니,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장 입단은 처음 보는 경우였지만, 전말을 들을 기회는 또 있을 테였다.

가웨인은 빠르게 전황을 설명했다.

야음을 틈타 시작된 중독자들의 습격과, 점점 불어나더니 만 단위가 되어버린 적들의 숫자. 어찌저찌 막아내던 차에 암흑기사와 흑마법사들로 구성된 정예부대가 나타나, 단숨에 방어선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버린 일까지.

“그때쯤 나와 침묵중대가 도착했고, 경비단은 가까스로 뚫린 방어선을 복구했소이다. 다만 병력이 부족해 안쪽으로 들어간 이들을 쫓아갈 수는 없었소.”

가웨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떨궜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현 시점에 전선을 형성한 경비단의 병력은 고작 수천 명.

창고가 밀집된 41구역부터 43구역까지의 넓은 일대를, 그 병력만으로 지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한 번 무너진 방어선을 다시 복구하기까지 했다니, 가웨인과 침묵중대는 불가능한 역전을 이뤄낸 셈.

거기다 일행의 합류로 인해 전선 한쪽에서 우위를 점했으니, 이제 나머지 방면에서도 반격을 꾀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이미 들어간 놈들을 쫓는 일인데.’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적들의 정예 부대가 방어선을 돌파한 건,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난 일이었다.

나름대로 숙련된 실력자들일 것이니, 곡물 창고를 불태우는 것쯤이야 손쉬운 일일 터.

하지만 두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폭발이나 대규모 화재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댈런이 그런 생각을 나누자, 가웨인도 의문스런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놈들의 의중이 뭐건,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봐야 알겠군.”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댈런이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십시오!”

중무장한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댈런을 붙잡고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올리자, 드러나는 얇은 금발의 귀족적인 얼굴.

“허억, 후우, 같이 갑시다. 저는 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에, 에버···.”

“침묵중대장 님께서는 조용히 해주시고요. 저는 미궁관리청 소속으로, 청동 구역의 지원요청에 급파된 자원병 에반입니다.”

검지를 들어 가웨인의 말을 막은 청년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에버론 라크탈라.

가웨인이 끝까지 뱉지 못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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