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곡창(4)
금강궁.
스물여섯 고위귀족 가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팔시온 가장 안쪽의 구역이자 연합체.
팔시온의 통치가 명목상 중앙 의회를 통해 이루어진다지만, 그 뒷배경에 금강궁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다만 세간의 사람들은 금강궁의 재력과 정치적인 힘만을 알고 있을 뿐, 그들이 가진 진짜 저력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스물여섯 초월자들.’
스물여섯의 고위기족 가문들이, 각각 한 명씩만 배출하는 초인 중의 초인.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전설이라고만 알고 있는 그 존재들은, 사실상 미궁도시가 천 년이 넘도록 대륙의 정중앙에 자리할 수 있는 이유나 다름없었다.
강대한 남부 제국의 역사 속 호전적이었던 황제들마저도, 어떻게든 팔시온과 충돌하는 일은 피하려 했으니까.
지금 댈런의 곁에서 걷고 있는 건, 그런 초월적인 존재들 중 하나였다.
“쯧, 가웨인 그 친구는 참 떡잎이 남다른데, 이상한 곳에서 고지식한 면이 있어요. 엉뚱한 부분에서 말실수가 잦기도 하고. 이 몸으로 볼 때는 에반이라고 부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이래서야 위장 임무를 잘 하겠나.”
금발 머리의 청년, 에버론이 투덜거렸다.
방어선 안쪽. 43구역의 거리는 휑했다.
두 사람은 한참 전에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적들의 정예를 막기 위해, 창고가 밀집한 구역 안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시에나와 루시아, 파른은 전선에 남겨둔 채였다.
그들에게 덩굴의 마녀쯤 되는 적을 상대하게 하는 건 시기상조기도 하거니와, 방어선의 상황 역시 그리 녹록치는 않았기 때문.
전투 기도를 쓸 줄 아는 성기사인 루시아나, 광역 마법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술사이자 마녀인 시에나라면 빠르게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겠지.
“사람 하나 없군요. 대피령이 제때 떨어진 모양입니다.”
잘 깔린 판석 위, 또각또각 굽 낮은 구두 소리를 내며 에버론이 말했다.
41부터 43구역까지는 서부 지구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거대한 곡물 창고들과 그 창고들을 관리하는 기관 건물들, 그리고 그들과 거래를 맺은 상단이 즐비한 거리.
이쪽 부근은 청동 구역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치안이 좋은 곳이었다. 그에 걸맞게 시민들 역시 습격 초기에 경비단의 안내를 따라 이미 대피한 상태인 듯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곡식을 실은 짐수레와 상인들로 붐볐을 터이나, 이제 불안한 정적만이 남아 감돌고 있는 거리.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 정적을 뚫고, 에버론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댈런은 대답에 앞서 곁을 슬쩍 쳐다봤다.
평소와는 달리 청년의 눈에는 어떤 교활함도 묻어나지 않았다.
시험하거나 떠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한 질문이라는 소리.
이미 선견자의 존재까지 이야기한 적 있는 마당에, 답해주지 못할 건 없었다.
“덩굴의 마녀 아니오.”
“역시 아셨군요. 덕분에 이야기가 좀 빨라지겠습니다. 이번 일의 주동자는 덩굴의 마녀가 맞습니다. 선각자는 얼마 전 그녀의 습격을 예견했었죠.”
“선각자를 통해 미리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움직일 수는 없었던 거요?”
댈런이 물었다. 에버론은 낮게 웃었다.
“전지는 그 편린마저도 대가를 요구하는 법입니다. 어떤 지식은 손에 쥔 자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작용하죠.”
에버론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엘가이아 마탑. 원로 마법사 발렌티노와 친하시다니 잘 아실 텐데요.”
“···흠. 알 것 같군.”
그러고보니 펠버의 능력 역시 시간선을 읽고 이에 간섭하는 종류였지.
그 역시 균열에서 대영역을 이뤄낸 이후, 필멸의 몸으로는 그 힘을 감당할 수 없어 무너져가지 않았던가.
결국 댈런이 적창의 힘을 각성해, 그에게 불멸성을 부여해주고서야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라 해도, 제가 직접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와 제 동료들의 움직임에는 많은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요.”
“제약?”
댈런이 물었다. 에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결계책률(結界責律)’ 말입니다. 이 도시와 결계탑이 세워질 때부터 만들어진 제약이죠. 그 제약을 기반으로 하는 결계탑 덕에 미궁의 악은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됐습니다만···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스스로 두 손 두 발을 다 묶어버린 셈이죠.”
초월자들을 구속하는 제약이라.
게임에서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금강궁의 초월자들은 하나하나가 악신의 권속들에 버금가는 존재들이다.
더불어 사사로운 이익이나 본인의 목숨보다는, 대륙의 미래를 우선시하는 희생적인 이들이기도 했고.
그러나 중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이런 선하고 강력한 존재들은 무슨 일이 터지든 금강궁 안에 틀어박혀 있기 바빴다.
밖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사교도들이 판을 치며, 수많은 난민들이 도시로 몰려오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인 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다른 의미가 있나 보군.’
하긴,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세계다. 그런 걸 따질 존재가 있을 리 없지.
어쨌든 단서는 몇 개 얻을 수 있었다.
결계책률은 도시의 설립 때부터 내려온 제약이고, 미궁의 마물을 막는 결계와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강력한 초월자들의 거동을 막을 만큼, 제약에 담긴 힘과 조건 역시 강력한 종류라는 사실까지도.
“그럼 그쪽이 직접 나섰다는 건, 그만큼 강대한 위협이 이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군.”
“하하, 그렇게 흘러가는 겁니까? 뭐···틀린 말은 아닙니다.”
청년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잘생겼을 뿐인 귀족의 모습.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여상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기백은 하나하나가 남달랐다.
강력한 존재들과 싸움을 거듭하며, 댈런의 안목은 전에 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 에버론이 굳이 힘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 했음에도, 그의 감각은 미약한 이질감을 바로 잡아낼 수 있었다.
“지금은 마녀가 움직이며 제약의 저울이 기울었기에, 저도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거지요.”
“놈의 의중은 아시오?”
“알다마다요. 그년은 단지 창고 구역을 불태우는 것만으로는 끝내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전부였다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일 필요조차 없었겠죠.”
에버론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깃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수직농장의 근간이 되는 필로페린의 마법진. 마녀는 그 마법진을 무력화시켜서, 서부 지구의 작동을 정지시키려는 속셈입니다.”
***
고르게 뻗은 대로를 10분쯤 더 걸었을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주위를 샅샅이 훑던 댈런의 감각권에, 처음으로 이질적인 기척이 포착됐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당연히 매복했다가 기습할 줄 알았는데. 흰 눈깔 할망구는 이런 거나 좀 알려주지, 쯧.”
“······.”
지금 백안의 선각자를 할망구라 부른 건가.
어째서인지 오늘 따라 말이 많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내젓고는 감각에 집중했다.
기척은 총 여덟. 이 정도면 저쪽도 이쪽을 눈치챘을 거리인데, 별다른 대응은커녕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이야기겠지.’
소수 정예로 경비단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니,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일행은 머지않아 주 대로에서 빠져나온 조금 넓은 길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왔군. 그분의 말대로였어.”
뾰족한 가시갑옷을 입은 사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댄 그림자 요정, 삐딱하게 선 흑마법사, 숫돌로 도끼날을 갈던 드워프 등도 이쪽을 쳐다봤다.
“멈춰라. 나름 한가닥 하는 놈이라 들었는데, 용병이라면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이대로 돌아갈 기회를 주마.”
가시갑옷 사내가 입을 열었다. 댈런은 가만히 멈춰선 채, 놈의 등 뒤로 시선을 향했다.
흐릿하게 물결치는 공간.
선명하게 녹아나는 불길한 마력.
보아하니 놈들은 거대한 결계의 입구를 지키는 중이었다.
이 자리엥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덩굴의 마녀는 저 결계 안쪽에서 뭔가 술수를 부리고 있겠지.
“흐음, 정예는 정예군요.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영입하고 싶었을 정도인데.”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는 에버론의 말처럼, 눈앞의 여덟 명은 하나하나가 강자였다.
하나하나가 지금의 루시아나 시에나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이들. 하급 악마와 대등하게 붙거나, 혹은 우위를 점할 실력자들이었다.
‘암월단의 간부들도 그렇고, 슬슬 나올 때가 되긴 했지.’
대륙 곳곳에 숨죽이고 있던 은거기인들 중에, 비단 선하거나 중립적인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태생이 악한 인간이 힘을 얻었다 해서, 앞으로 바르게 살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
오히려 힘을 얻는 과정에서 타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에,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는 초인들은 삼분의 이 정도가 적이라고 보면 편했다.
한편 은거기인들 중에는 본신의 힘을 막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았다뿐, 양지의 인물들이었던 이들 역시 존재했다.
“즈트무라 자작.”
에버론이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린, 흑철 판금갑을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처럼.
“내통자가 당신이었군요. 선각자마저 당신에게는 큰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제국식 귀족 정신으로 꽉 막힌 양반이라 오히려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함정이었을 줄이야.”
“···넌 누구지? 기척이 둘이기에 용병과 그 정보상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군.”
중년 사내, 즈트무라 자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잠시 에버론을 노려보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한 번 본 적이 있군. 미궁 관리청 소속의 고위 사무직이었지. 이름이···그래, 에반. 앵칼라 가문의 방계였던가?”
에버론의 위장명 중 하나를 읊으며 손을 휘휘 내젓는 자작.
감정 하나 묻어나지 않는 딱딱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너에게는 관심없다. 이 용병이야말로 내 관심거리지.”
“나?”
“그래, 금패 용병. 감히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의 몸에 손을 댄 평민, 너 말이다.”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즈트무라 자작이라.
문득 조금 전 전투에서 그에게 제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었던, 머저리 같은 민머리 기사가 떠올랐다.
“앙겔 즈트라무. 그놈과 관계가 있나?”
“내 아들이다. 오는 길에 만났나 보군.”
“만났지.”
“···그렇다면 아비로서, 그리고 같은 귀족으로서 마땅히 복수를 해주어야겠어.”
스릉―
자작이 검을 뽑아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부성애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때 에버론이 댈런의 옷자락을 툭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놈들이 지키고 있는 저 결계, 마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저놈들을 맡아주시길.”
“영역을 일궈낸 초인 여덟을 상대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건대, 이번 일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기물 파손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도록 하죠.”
“그렇다면야.”
댈런은 어깨를 으쓱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오른손에 성검을, 왼손에 도끼를 뽑아 쥐었다.
그 행동에 즈트무라 자작도 천천히 검을 모아쥐고는,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중단세를 취했다.
댈런은 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가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멈춰서서 말했다.
“자작.”
“뭐지?”
“그러고보니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봐서 놀랐소. 기적이 다른 게 아니더군.”
“···무슨 소리냐?”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댈런은 도끼자루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머저리가 하는 꼴을 보니, 당연히 아비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놈이, 귀족을 모독하다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커억!”
쉬익―
자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놈이 피를 주륵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으로 깨졌던 평정. 그 때문에 흔들린 검끝과 호흡.
댈런의 손끝을 떠나 공간을 빗겨낸 도끼에게는, 그 약간의 틈이면 충분했다.
“커헉, 컥······.”
제 힘을 제대로 내지도 못한 채, 가슴팍에 길쭉하게 구멍이 뚫린 자작이 바닥에 엎어졌다.
댈런은 어깨를 휘휘 풀며 말했다.
“당연히 블러핑이지, 씹쌔야.”
남은 건 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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