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만화(1)
“즈트무라 자작!”
“이, 이 미친 새끼가!”
“비겁하게 기습이라니! 곱게 죽기 싫은 건가!”
기습적인 공격에 자작의 동료들이 벌떡 일어섰다. 댈런은 대답 없이 손을 딱 튕겼다.
파지지지직!
“크어어어억!”
그러자 자작의 몸을 꿰뚫고 등뒤로 삐져나온 도끼에서 시퍼런 전격이 튀어올랐다. 동시에 죽은 듯 엎어졌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죽은 척 해봤자지.’
악신에게 받은 지옥의 마력으로 인해, 즈트무라 자작의 육신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태다.
때문에 도끼에 가슴팍이 꿰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목숨만은 부지했던 것.
물론 댈런의 예민한 감각은 놈의 미세한 심박과 호흡을 놓칠 리 없었다.
더불어 상태창을 슬쩍 보니 경험치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끄아악! 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작이 다시 한 번 풀썩 쓰러진다.
이번만큼은 진짜였다. 상태창의 경험치 바가 소폭 늘어났으니까.
“다들 대가리가 꽃밭인가보군. 그동안 악신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평범한 사람들만 골라 학살하다보니, 아예 현실감각 자체가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검게 타 연기를 흘려대는 자작의 시체를 보며 댈런이 말했다.
그 무자비한 손속에 정신이 번쩍 든 걸까. 일곱 명의 문지기들 역시 하나둘씩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댈런은 어깨를 풀며 상태창을 곁눈질했다. 자작을 죽이고 들어온 경험치가 꽤 짭짤했다.
레벨업이 아슬아슬하게 코앞인 상황이니, 나머지 일곱을 마저 족치면 레벨업 두 번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라필렘― 쎄 글램!”
그리고 흑마법사 두 명이 마력을 공명해 지옥의 문을 열어내자,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쿵. 쿵.
털이 북슬한 염소 다리에 근육질의 인간 상체, 흉측한 머리통에 뿔 두 개를 단 놈은 분명히 하급 악마였으니까.
흔하디 흔한 이름 없는 악마라도 경험치는 꽤 쏠쏠하게 들어오는 법이다.
“이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마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문을 여는 일에만 집중하시오.”
댈런은 그렇게 말하고선 성검을 들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에버론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평소의 유쾌한 미소를 슬며시 지어보였다.
“일선에 나선 것도 오랜만이고, 전장에서 누군가와 합을 맞춰보는 건 더더욱 오랜만이군요.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초월자의 몸에서 기묘한 마력이 흘러나오며, 에버론의 모습이 허공으로 스르르 자취를 감췄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투웅― 콰직!
화살처럼 쏘아진 댈런의 신형. 가장 처음 그를 가로막은 건 가시갑옷 입은 전사였다.
내려친 성검을 막아선 건 놈의 가시 방패. 검날과 가시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오르고, 부러진 가시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안면까지 가려진 투구의 틈 사이로, 놈의 눈동자에 깃든 당혹감이 엿보였다. 놈이 말했다.
“무, 무슨 힘이···!”
“비켜라.”
전진한다.
카각!
성검을 비틀어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무릎을 들어 놈의 옆구리를 찍어버린다.
놈의 갑옷에 촘촘히 박힌 가시가 흑철 각반과 부딪히며 불똥이 튀어올랐다.
“커헉···!”
포탄처럼 날아가 건물 2층을 부수고 처박히는 가시갑옷을 뒤로 하고, 댈런은 다시 한 번 도약 스킬로 몸을 밀어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주변 풍경.
노리는 건 후열의 흑마법사 세 명이다.
다대일 싸움에서 가장 첫째로 노려야 하는 건, 단언컨대 적의 후방 화력을 담당하는 마법사와 원거리 공격진들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술사와 전위가 섞여있는 제대로 된 다대일 전투는 이번이 처음.
허나 모니터 너머에서 숱하게 싸워왔던 경험은 머릿속에 이론으로나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육신과 심상의 강함은, 머릿속 이론을 현실에 온전히 녹여내기에 충분한 역량.
“저, 저놈!”
“놈이 마법사들을 노린다! 막아!”
뒤늦게 그의 노림수를 눈치챈 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휘둘러왔다. 댈런은 무시하고 허공을 걷어차며 재차 가속했다.
검기와 주문들이 한 발씩 늦게 날아와 애꿎은 거리를 부수는 동안, 그는 어느새 첫 번째 흑마법사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슨···우읍!”
헛소리를 들어줄 시간은 없다.
방금 막 악마를 소환하고 한숨 돌리던 놈의 얼굴을 잡아, 사정없이 바닥으로 패대기친다.
콰앙!
판석이 쪼개질 정도로 강하게 부딪힌 놈의 머리.
단번에 실신한 흑마법사의 머리통 위로, 단단하게 말아쥔 주먹을 한 번 더 내리꽂는다.
「합투권 : 철격(徹擊)」
날개뼈에서부터 공명을 시작한 마력이 그대로 주먹까지 내달리고.
그 끝에서 발산되는 건 뭉툭한 권격이 아닌, 송곳이나 다름없는 날카로운 예기.
퍼벅!
검기 실은 창끝에 찔린 것처럼, 흑마법사의 머리통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다.
‘이걸로 둘.’
소장하고 있던 호신용 유물이 보호막을 펼쳐냈지만, 합투권의 권격 앞에서는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나갔을 뿐.
애초부터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창시한 무술이 바로 합투권이다.
무기 하나 없는 거지꼴로 다니면서도, 암월단에 정면승부를 걸던 권사의 정수가 녹아든 무예.
직접 펼친 것도 아닌 호신용 유물의 보호막 정도로, 그 직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패들러! 안돼!”
순식간에 죽어버린 동료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마력을 공명시켰던 다른 흑마법사가 발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그 절절한 의지에 하급 악마가 괴성을 토하며 달려들고, 동시에 댈런의 후방에서 그림자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
전투의 혼란 때문도 있겠으나, 파영의 마안조차도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림자 엘프의 혈통 능력인 은신술.
그걸 영역의 힘으로 극대화한 비기이기에 일어난 일.
쉬이익―!
등 뒤에서는 맹독 묻은 단검이 찔러오고, 눈앞에서는 악마의 손아귀가 다가온다.
허나 당황하지 않는다.
‘악마까지 일곱.’
착실하게 줄어나가는 머릿수를 셈하고, 감각권을 넓혀내며 적들의 움직임을 모조리 담아낸다.
엘프의 기척이 감각권에서 사라진 순간, 사각에서의 기습에 대해서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휘릭!
달려드는 악마를 향해 성검을 던져버린 댈런이, 직후 몸을 반쯤 회전시키며 손등으로 단검 옆면을 쳐냈다.
까앙!
단 한 번의 격돌.
힘의 우위는 명백했다.
“크윽!”
손아귀가 찢어지며 단검이 날아가고, 그림자 엘프는 비틀거리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떻게 야만인이 제국 기사단의 무예를···!”
두 번째 단검을 뽑으며 소리치는 그림자 엘프.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단검을 꺼내듦과 동시에, 도약 스킬로 몸을 밀어낸 댈런의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향해 뻗어졌다.
카가가가강!
짧은 순간. 십수 차례 충돌하는 흑철 갑주와 단검.
가슴팍을 어깨로 밀어붙이고, 수도로 단검 쥔 손을 쳐내며, 찔러오는 검기는 팔꿈치로 얕게 흘려보내고, 짧게 정권을 내질러 어깨뼈를 박살낸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처음 얻은 스킬, 데하만의 갑주격투의 묘리는 이미 댈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녹아있었다.
30을 훌쩍 넘어 40에 가까워진 근력의 보조 하에, 르베론의 특제 갑주는 갑옷을 넘어선 무기 그 자체.
“커헉!”
순식간에 뼈가 몇 군데나 부러진 그림자 엘프가, 마지막 순간에 혈통 능력을 사용해 가까스로 몸을 빼냈다.
비척거리며 중심을 잡고 포션을 들이키는 그림자 엘프. 그때 비명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끄아아악!”
동료의 죽음에 절규하던 흑마법사였다.
어느새 저 혼자 날아간 손도끼가 그의 보호막 주문을 뚫고 쇄골에 틀어박힌 것.
흑마법사는 황급히 도끼를 뽑아내려 했으나, 이미 도끼는 화염을 토해내며 놈의 몸속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놈이 소환해낸 악마는 가슴팍 한가운데에 성검이 꽂힌 채로, 뿜어지는 신성력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고.
“······허.”
그림자 엘프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재생 포션으로 인해 몰려오는 격통마저도 순간 잊게 만들 광경이었다.
악마까지 아홉이나 되던 전력.
이곳의 모두가 영역을 이뤄내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만한 힘을 거머쥐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쌓아온 힘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둘이 죽고 셋이 부상당했다.
이 모든 건 전투가 시작되고 고작 30초 사이에 벌어진 일.
“···저게 어딜 봐서 고작 몇 달 전에 영역을 이룬 전사라는 말이야.”
정작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 전사는 상처 하나 없이, 마지막 일격이 빗나간 게 안타깝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두 전력을 다해 전투에 임해라. 금패 용병이 아니라 초월자를 상대한다고 생각해.”
쿠르르륵.
가시갑옷 전사가 부서진 건물 벽을 짚고 나오며 말했다.
임시라도 일단 리더인 그의 말에, 문지기들의 눈빛이 진중하게 바뀌었다.
“라필렘. 쎄 글램.”
시작은 유일하게 멀쩡한 흑마법사의 주문이었다.
가래가 낀 듯 거친 목소리의 영창에, 거리 주위로 지옥문이 순식간에 너덧 개씩 열렸다.
이글거리는 공간의 균열에서 몰려나온 건 반쯤 녹아버린 채 시퍼런 안광을 흘리는 지옥의 병정들.
그리고 수십의 시체를 묶어 만든 거대한 시체괴물 두 마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오며, 댈런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형성했다.
우우우···.
지옥 병정들의 울음소리 사이. 문지기들은 각자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포위망을 천천히 좁혀갔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각자가 가진 영역의 힘을 동시에 이끌어내며, 언제든 전력을 투사해낼 준비를 마친다.
그 여파에 삽시간에 일대의 마력이 뒤틀리다못해, 노이즈 같은 불협화음을 발하기 시작할 정도.
쏴아아아···.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부슬비는 어느새 빗방울이 꽤나 굵어져 있었다.
판석 사이사이로 작은 개울들이 흘러가고, 움푹 패인 전투의 흔적들은 웅덩이가 되어간다.
수십의 지옥 병정과 다수의 초인에 둘러싸인 상황임에도, 그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상대는 숱한 실전을 겪으며 경지에 올라선 초인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기습으로 어느 정도 이득은 얻을 수 있겠지만, 완벽하게 싸움을 끝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힘과 힘의 정면충돌뿐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어떻게 열어갈지는, 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빙정(氷晶)」
펼쳐낸 손바닥에서 새하얀 결정이 떠오른다.
칼카스의 지옥에서 시체를 계승하며 얻어, 그 이후로 수없이 연습해왔던 고유 스킬 ‘빙정’.
「개화(開花)」
꽃봉오리같이 맺힌 결정이 수십 개의 꽃잎을 펴내는 것과 동시에, 일대의 온도가 급격하게 하강하기 시작한다.
쩌저저적!
온도를 내려 얼음을 맺어내는 게 아니다.
언다는 심상 그 자체가 사방의 빗물과 수분을 사로잡고, 온도의 하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따름.
물리법칙의 원인과 결과를 역행하는 것이야말로, 영역을 통해 현실로 이뤄내는 불가능의 가능성.
크아악!
캬아아악!
통째로 얼어붙은 지면에 수십에 달하는 지옥 병정들의 발이 묶이고, 개중 절반 가까이는 피부 표면마저 얼어붙어 미동조차 하지 못한다.
“고위 마법사였나!”
“분명 전사로서 영역을 일궈냈다고 들었는데!”
문지기들 사이에 당혹감 어린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실력자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마법 무구를 활용하는 전사를 상대하는 것과, 주문을 마스터한 술사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들이 태세를 전환하기도 전에, 이미 싸움의 향방은 댈런의 손 안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빙정 : 청파랍(淸波拉)」
콰칭!
손바닥 위의 꽃봉오리가 꽃잎을 한껏 뒤틀어낸다.
수십 장의 꽃잎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며, 사방으로 흩날리는 수백의 얼음 조각들.
콰차차차창―!
그 움직임에 맞춰 일대의 얼음이 깨져나가며 소용돌이처럼 시계방향으로 휘감기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음의 폭풍이 거리 전체를 뒤덮는다.
“크아아악!”
“버텨! 버텨라!”
마력이 한가득 담긴 얼음 결정의 폭풍.
병정이고 시체괴물이고 가릴 것 없이, 죄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채 거리에 널브러진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빈 왼손을 들고 수인을 맺자, 손끝에서 전격의 줄기가 불어나며 거대한 발톱의 형상을 취한다.
「뇌조(雷條)」
비산하는 얼음 결정 사이로 뻗어나가는 새파란 전격의 줄기.
마물의 뜨거운 피와 그 피에 녹은 얼음은 전도체가 되었다.
콰지지지직―!
몇 배로 파괴력이 증폭된 전격이 살아남은 마물들과 초인들을 다시 한 번 덮친다.
한 단계씩 안배를 쌓아간 술식의 결과물 앞에서, 영역을 이룬 초인들이라도 피해가 없기란 불가능했다.
그어어어어―!
성검에 재생력을 봉인당한 악마는 폭풍 속에서 너덜너덜해졌고, 쇄골에 도끼를 맞았던 흑마법사 역시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 사망했다.
나머지 초인들도 여기저기 찢기고 베여 비척이는 건 마찬가지.
그나마 멀쩡한 건 영역의 힘으로 온몸을 둘러버린 가시갑옷 전사와, 룬 마법이 새겨진 보석을 깨뜨린 드워프, 그리고 두 눈이 각기 다른 색깔인 염동력자뿐.
“크으으! 받아라, 주문쟁이!”
폭풍이 잦아들자마자 난쟁이가 거대한 양날도끼를 들고 반격을 가해온다.
댈런은 달려오는 놈의 코앞으로 가만히 왼손을 뻗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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