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44화 (144/288)

천변만화(3)

꽈릉―!

폐허가 된 건물 위. 뇌성과 함께 한 줄기 벼락이 내려꽂힌다.

캬아아아아!

퉁퉁 부어오른 시체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몸이 반으로 갈린 시체 골렘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다.

쿠웅.

낮게 울리는 지면. 차오르는 경험치 막대.

벌써 다음 레벨업까지 절반 가까이 경험치가 모였다. 허나 감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투웅―

도약 스킬로 하늘 높이 뛰어오르자마자, 방금까지 서 있던 지면이 와르르 무너진다.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팔과 다리가 각각 네 개씩 달린 3층 건물 크기의 시체 골렘.

크어어어어!

시체 덩어리 그 자체인 골렘이 댈런을 보고 포효했다.

가시덩굴로 칭칭 묶인 팔다리 사이로, 수십 명의 얼굴들이 내질러대는 고함과 비명의 합주였다.

콰광!

부서진 석재와 흙더미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굉음과 함께 골렘이 지면을 박찼다.

노리는 건 하늘 위를 딛고 선 전사. 놈이 댈런을 향해 아름드리나무처럼 굵은 팔을 뻗어냈다.

「유섭(流燮)」

그리고 하늘이 번쩍였다.

화르르르···!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

한 조각 구름이 색을 반전한 채 흘러내린다.

지면으로 뻗어내린 백색 줄기는 천둥 없는 번개처럼 보였다.

다만 갈라지는 줄기줄기마다 머금은 건, 수억 볼트의 전압이 아닌 신성력의 화염.

‘단마의 백염.’

성기사단의 심문관.

그 특별한 지위의 상징인 백색 화염.

지금 하늘에서 내리치는 수십 갈래의 낙뢰는, 그 흰 불꽃으로 빚어진 징벌이었다.

그어어어―!

키에에에에!

백염의 낙뢰는 뛰어오르던 시체 골렘은 물론이고, 지하나 건물 안쪽에 숨어있던 놈들까지 덮쳤다.

곳곳에서 용솟음치는 새하얀 불꽃의 기둥. 폐허가 된 시가지 위에 마물들의 셀 수 없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

댈런은 허공을 딛고 선 채 그 전경을 멍하게 내려다봤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온다. 검을 쥔 손끝이 전기가 통하듯 저릿거렸다.

적창의 힘을 목격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날 때부터 권능을 손에 쥐지 못했음에도, 스스로 쌓아올린 심상으로부터 완성된 격이었으니까.

백 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갈고닦은 초월자의 힘을 바라보며, 댈런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울림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압도감이라기보다는, 향상심에 가까운 감정.

이건 종말처럼 이를 악물고 넘어야 할 산이 아닌, 언젠가 거쳐가야 할 하나의 체크포인트였다.

“가시죠. 마녀의 존재감이 저쪽에서 느껴지는군요.”

생각에 잠긴 댈런에게 에버론이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허공을 유영하며 도심지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댈런은 바로 걸음을 옮기는 대신, 눈앞의 초월자를 잠시 응시했다.

“···무슨 문제라도?”

여전히 평범한 병사의 복장에, 흔한 귀족의 얼굴.

다만 그의 발밑을 떠받든 마력과, 눈에서 번뜩이는 신성력의 광채는 이전까지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풍운 계열 마법사들의 성지, 델로스 마탑에서 배울 수 있는 비행 주문. 그리고 성기사단에서도 심문관들만이 전수받는 단마의 백염.’

한 사람이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동떨어진 두 가지 힘.

그건 에버론 라크탈라의 정체성을 명확히 나타내어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을 만들어낸 권능은 두 가지다.

스스로의 존재를 수없이 쪼개어내, 한 시대에서 수십 명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적.

더불어 그 수십의 삶을 그러모아, 어떤 괴리감도 없이 단일의 심상 안에 섞어내는 기예.

하나의 육신과 영역으로 수많은 힘을 다뤄내는 그의 권능은, 어쩌면 댈런이 나아가야 할 길의 일면이 아닐까.

댈런은 머릿속의 생각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별 일 아니오. 그저 직접 보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 말입니까?”

“한 사람으로 수십 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말이오. 그리고 그 힘을 다시 한 명의 몸 안에 담아낸다는 것도.”

에버론은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옅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저의 입장이라도 되어본 듯한 발언이군요. 이러니 제가 흥미를 잃을 수가 있나요.”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에버론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감각에도 마녀의 마력이 점차 증폭되는 게 느껴졌다. 침입자인 그들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눈치챘다는 뜻.

이동할 시간이었다.

***

청동 구역의 다른 지구들과 마찬가지로, 서부 지구는 총 20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마녀의 결계가 둘러싼 건 41구역에서도 도심지 인근.

도보로 수색하기에는 꽤 넓은 범위였으나, 건물 위를 날아다닐 수 있는 댈런과 에버론은 오래지 않아 마녀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틸다.”

서부 지구 관리국 건물 뒤편의 대형 곡물 창고 단지.

그 앞의 공터에 내려앉은 에버론이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모습을 숨겨봤자다. 공간의 틈에 스스로를 우겨넣은 채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적어도 너희가 물러나길 기다릴 수는 있겠지. 나는 너희와 싸우고자 여기 온 게 아니니까.]

즈즈즈즉―

마치 짐승의 가죽을 가르듯 허공이 갈라지며, 작은 체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껏해야 댈런의 허리쯤 올 법한 키. 그에 비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고 풍성한 무채색의 로브.

깊게 눌러쓴 두건에 어린 주문과, 가면 형태의 마도구는 파영의 마안조차도 전부 뚫어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알아볼 수 있는 건 그녀의 머리칼 색이 회녹색이라는 사실 정도.

‘쉽지 않겠군. 용을 결계 밖에 두고 오길 잘했어.’

댈런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생각했다.

덩굴의 마녀는 강했다.

어림잡아 상급 악마 칼카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살짝 위.

지옥의 힘에 백업을 받지 못한다뿐, 마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밀도는 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대로 마녀가 활개치도록 내버려둔다면, 머지않아 아예 악마로 ‘승천’해 자신의 지옥까지도 만들어내게 될 테였다.

[내가 하고자 했다면 이미 서부 지구의 경비단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나름 손속에 자비를 둔 것인데, 배은망덕하게 내 하수인들을 죽이고 결계를 뚫고 오다니. 도대체 생각이란 게 없느냐?]

“자비라는 방패를 내세울 거였으면, 흑마법으로 정제한 마약을 수만 명에게 중독시킨 시점에서 단단히 잘못됐지. 안 그래, 노인네?”

[쯧쯧, 선견자의 절반도 못 산 놈이 버르장머리마저 없구나. 버러지들 정도야 얼마가 죽던 알 바 아니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더냐?]

댈런이 도끼머리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가는 사이, 에버론과 마녀 사이에서 불꽃 튀는 말싸움이 벌어진다.

얼핏 듣기로는 크게 의미 없는 설전. 적을 눈앞에 둔 채 주고받는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들.

허나 전투로 한껏 달아오른 댈런의 감각은, 그 대화의 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스파파팟!

두 사람의 발 아래, 지면을 뚫고 미약한 심상이 흘러가고.

콰지직!

서로가 서로를 묶고 끊어대며, 한 뼘이라도 더 땅을 확보하기 위해 얽혀간다.

[네게 도움이 될 광경이로구나. 진정한 초월자의 싸움이란 저런 거다. 인간.]

가만히 지켜보던 영역 속 용이 끼어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저 없는 건조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3위계의 초인은 자신만의 심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4위계는 이미 존재하는 심상까지 자기에게 맞게 비틀어내지. 다만 확실한 효과를 위해서는 여전히 주변 환경을 철저하게 이용해야 한다.]

투두두둑!

판석을 깨고 작은 새싹이 돋아난다. 뒤엎어진 흙바닥에 주인 없는 발자국이 움푹 찍혔다.

여전히 두 초월자는 제자리에 선 채 요지부동이었다.

서로를 향해 달려들지 않은 채, 험악한 표정으로 날선 말들만 던져댈 뿐.

[5위계의 초월자는 더이상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의 심상은 단순히 현실을 비트는 걸 넘어서서, 더 광범위한 일이 가능하지.]

‘스스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구축해낸다는 말이겠군.’

[근접하게 맞췄느니라. 모든 법칙이 비틀린 환상세계의 영역, 그 일부를 이 현실에 불러와 덧씌우는 것이지.]

콰과과곽!

마녀의 주변에서 지면을 뚫고 자라나던 새싹이, 삽시간에 거대한 덩굴의 숲이 되어 광장의 절반을 뒤덮어간다.

한편 에버론이 선 광장의 나머지 절반에서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풀이 자라나는 주문이나, 분신을 늘려내는 비기의 개념이 아니다.

환상세계에 심상으로 구축된 각자의 영역.

가능성이 구현화되는 그 세계의 모습이, 일부나마 현실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3위계의 자격이 영역을 빚어내고, 4위계의 조건이 영역으로 기존의 심상마저 비틀어내는 것이라고들 하지.]

어느덧 무의미한 설전도 잦아들었다.

온전히 서로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수 세기 동안 쌓아온 심상을 자리에 쏟아내는 두 초월자.

빗줄기 사이 초인들의 인영이 명확한 색감과 형체를 빚어내기 시작하고.

암녹색 덩굴들은 각양각색의 꽃봉오리를 열어내며 빼곡한 이빨과 소화액을 드러낸다.

단순한 마력풍의 비틀림이 아닌, 세계 자체의 왜곡.

댈런의 시야로 그걸 공유받은 적창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5위계에 올랐을 때 얻어내는 이 권능을, 초월자들은 영역의 개방이라 부른다.]

「영역 개방 ; 거울 위에서 엇갈린 천변만화」

「영역 개방 : 풍요샘의 빛바랜 이면」

두 세계가 격돌하는 순간.

댈런은 가슴속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격양감을 느꼈다.

***

격돌한다.

쩌저저저저정―!

공간이 접혀들고, 난데없는 와류가 형성되며, 먹구름이 칼로 자른 듯 뚝 나뉘더니 수십 다발의 우레를 쏟아냈다.

중첩된 각자의 세계가 온건하게 혼합하는 대신, 극렬한 반발을 일으키며 벌어지는 현상.

광장을 중심으로 개방된 두 영역의 경계선 위는, 삽시간에 각종 천재지변이 휩쓰는 듯 초토화됐다.

두 초월자의 전력이 부딪힌 건 그 경계선의 한가운데였다.

“흐아아압! 죽어라!”

“빛의 신 파웰이시여!”

“델로람― 파레크!”

수십 명의 인영이 빗줄기를 뚫고 마녀에게 달려든다.

칼을 든 전사와 손에서 강풍을 일으키는 마법사, 신성력이 어른거리는 망치를 휘두르는 성기사와 소리 없이 십수 발의 화살을 쏘아내는 궁사.

각양각색의 주문과 술식이 날아들고, 화약 병기와 화살의 파공성이 귓가를 때렸다.

그에 맞서 광장을 뒤덮은 덩굴들은, 이빨 가득한 꽃봉오리를 열어내며 진득한 독액을 분사해냈다.

화르륵!

콰과과광!

물밀듯이 밀려오는 덩굴의 격류가, 에버론의 영역에서 비롯된 수십 명의 초인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갈려나간다.

예리한 검사의 일격에 신전의 기둥처럼 굵은 줄기가 잘려나가고, 쏟아지는 화염 세례가 폭우마저 무시하고 덩굴을 산화시킨다.

허나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곧이어 광장의 바닥과 주변 건물을 죄다 으스러뜨리며 더 거대한 녹색의 파도가 몰려왔다.

[어떠냐. 알 것 같으냐?]

광장의 저 구석에서 두 초월자의 격전을 바라보며, 댈런은 적창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래. 네게는 그런 잠재력이 있으니까.]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싸움에 가세하고 싶다. 피가 끓는 육체의 본성은 그걸 원하고 있었다.

허나 그의 이성은 다르게 이야기했다.

무작정 저 전장 한가운데 뛰어들어봐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그러나 심상 속에서 꽃피어나는 새로운 영감을 붙잡는다면, 이 싸움의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고.

[네 심상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잠재력이 있다. 네 본신의 능력이 아직 5위계에 닿기에 턱없이 부족함에도, 너의 손은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열쇠를 쥐고 있지.]

적창의 말에 어렴풋이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균열의 요새를 방어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라 놀 대군의 한가운데로 떨어졌을 때.

심상 너머 영역의 하늘을 떠올리자, 어설프게나마 그 전경은 현실이 되었었다.

그건 처음 목격한 대규모 전장이 가슴 깊이 가져다준 울림으로부터 시작된 각성.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울림은, 초월자들의 전투를 보는 지금 다시 한 번 깨어나고 있었다.

[네게는 알껍질을 깨고 나올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것처럼.]

적창이 말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희미하지만 격양된 어조였다.

댈런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하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역시도.

다만 초월자들의 영역이 격돌하며, 둘로 나뉜 먹구름 사이의 틈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었다.

스으···.

저도 모르게 검을 들어올린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일그러진 틈 너머의 밤하늘.

쿠르르르···.

하늘보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뇌성은, 마치 그의 행동에 반응하는 듯했고.

[그래.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지. 성검의 힘을 빌려서라도 미답의 영역에 발을 디뎌보거라.]

호의와 기대감이 뒤섞인 진룡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기며, 댈런은 가볍게 땅을 밀어냈다.

꽈아아앙―!

지면이 폭발하며 그의 신형이 솟구쳤다.

몇 달 전, 균열의 성벽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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