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45화 (145/288)

블루 제트(1)

“에드거! 옆을 조심해!”

칼과 방패에 녹색 액체를 잔뜩 묻힌 전사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그 외침에 사격에 집중하던 궁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쉬익―!

사냥감을 노리는 독사처럼 사각을 파고드는 덩굴. 빼곡하게 돋아난 가시에는 독액이 번들거린다.

궁사는 급하게 보조 무기인 소검을 뽑아 휘둘렀지만, 덩굴의 표면은 마물의 가죽처럼 질겼다.

“커억!”

속수무책으로 허리가 휘감기고 가시가 파고든다. 엄지 두께의 가시들이 내장 깊은 곳까지 독액을 밀어넣었다.

“이그넬― 로트!”

뒤늦게 마법사가 불화살로 가시덩굴을 태워버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궁사는 온몸이 보랏빛으로 물든 채 절명해 있었다.

“젠장···!”

동료의, 아니 자기 자신의 죽음에도 연연할 틈은 없다.

덩굴의 파도는 계속해서 몰아쳐 왔고, 끊임없이 자르고 불태웠음에도 벌써 열에 가까운 의체가 사망했다.

이쪽의 전력이 보잘것없는 건 결코 아니다.

‘개방’이라 함은 영역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끌어와, 현실을 침식하듯이 드러내는 것.

광장에 모인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을 초인들의 원형이었으니까.

“발딘! 내 뒤로! 방어 태세로 숨을 돌린 뒤 역습한다!”

“파웰의 빛이여,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소서!”

성기사들이 전투 기도로 전력을 끌어올리고, 마법사들은 넓은 배리어를 만들어 동료들을 보호한다.

공격에서 방어로 구심점을 옮기자, 빠르게 전선이 안정되며 약간의 여유가 돌아왔다.

사수와 마법사들이 적을 견제하고, 전사들이 일선에서 방어에 치중하며, 성기사와 사제, 그리고 주술사들이 부상자들을 치유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역할 분담과 유기적인 협동.

수십 명의 인원이 함께 벌이는 난전임에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깎아내리는 일은 일절 없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훈련과 실전으로 합을 맞춰본 듯한 광경이었으나, 정작 현실에서는 서로 마주친 일조차 없는 이들이 태반이다.

실상은 성별과 인종마저 다양한 광장 위의 사람들 모두가, 단 한 명의 인격에서 비롯된 존재였기에 가능한 기적.

그럼에도.

‘쉽지 않겠군.’

가장 후미에 자리한 금발의 청년, 에버론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굳어가기만 했다.

손쓸 틈 없이 열세 명이 죽었다. 남은 의체는 마흔넷.

어렵잖게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위험한 건 지금부터였다.

구르르르르···.

지면이 불안하게 요동친다. 단지 두 개방된 두 영역이 충돌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계 안으로 침입했을 때부터, 근방 일대는 이미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파괴 행각이었으나, 이 일대의 땅속에 무엇이 묻혀있는지 아는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녀는 지금 필로피렌의 마법진을 찾고 있어.’

처음에 마녀는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고,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적은 서부 지구의 수직 농장들을 작동하게 만드는 근원, 필로페린의 마법진을 해체하는 것이었으니까.

선견자는 그게 천 년 전, 이 도시의 설립자와 덩굴의 마녀 사이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된 원한 때문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케케묵은 과거의 원한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팔시온의 식량 자급력이 상실될 거라는 사실.

‘아니,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을 거다. 라필렘과 에낙사구스는 미궁도시가 장애를 겪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지만, 마녀에게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어.’

천 년도 전에 위세를 떨쳤던 고대의 마녀가, 이 도시만큼이나 오래된 마법진을 건드렸을 때 펼쳐질 결과는 어떤 것일까.

적어도 단순히 식량 공급난 정도에서 그칠 리는 없겠지.

그렇기에 에버론은 초장부터 영역의 일부분을 개방하고, 각지에서 살아가던 수십의 인생을 아낌없이 투사했다.

그럼에도 모자랐다.

겉보기에는 호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저쪽은 여유롭고 이쪽만이 버텨내는 상황.

일대를 뒤덮은 마녀의 결계가 아직까지 유지되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할망구의 말대로···나 혼자서는 무리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시가 침공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금강궁의 초월자들은 케케묵은 결계책률의 제약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으니까.

스물여섯의 초월자 모두가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건, 악신의 군대가 대륙을 정복하고 미궁도시를 완전히 포위할 때쯤 되어서일까.

초월자들 중에서도 약한 편인 그가 이번 일에 홀로 나선 건 그런 이유였다.

‘젠장,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견자는 예언했다. 마녀와 정면으로 부딪치면 천변만화의 이명을 가진 너라도 죽을 것이라고.

마녀를 최대한 피해 다니며, 부수적인 피해만 수습하라고 그녀는 조언했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봤기에 에버론은 정공법을 택한 것이었다.

근래 들어 그녀의 모든 예언을 깨뜨린 존재가, 이 싸움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런데.

‘댈런. 그 남자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체 어디로 간···.’

쿠르륵.

상념을 뚫고 육감의 경고가 파고든다. 그리고 그가 채 반응하기도 전.

콰과과광―!

그가 서있던 지면이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 무너지며, 신전의 기둥처럼 굵은 덩굴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으하하하! 드디어 찾았구나. 드디어···!]

광장의 삼분의 일이 박살나며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저편.

마녀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까마득한 창공을 딛고 선 댈런은 번뜩이는 눈으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부터 일대에 뿌리내린 덩굴들 중 몇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지하수를 찾은 듯, 꿀렁거리며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움직임.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녀의 힘이 조금씩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기괴하게 변형된 덩굴들은 이제 눈알과 이빨, 거대한 주둥이, 집게발 같은 부위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불어 광장을 중심으로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잿바람의 소용돌이까지.

‘필로페린의 마법진이라는 걸 찾았나 보군.’

그 위치마저 워낙 기밀스럽게 다뤄지는지라 댈런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설정상으로는 몇 번이나 들어봤던 마법진이다.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수직농장 시스템이 작동하게 만드는, 미궁도시의 설립자 중 하나가 만들어낸 거대한 영구 마법진.

수백만이 사는 도시를 떠받들고 천 년 이상을 버텨온 마법진이라면, 그 안에 응축된 힘이 얼마나 강력할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랬기에 덩굴의 마녀는 모든 회차에서 팔시온의 서부 지구를 습격하는 이벤트와 함께 등장했고.

그 습격을 막지 못한 회차에서, 대악마에 근접한 힘을 얻은 마녀는 청동 구역은 물론 순은과 황금 구역까지 뒤엎어버리곤 했었지.

[흐하하하하! 필로페린, 보고 있나! 이 싸움은 결국 내 승리다!]

이제는 요새나 다름없어진 덩굴의 숲 위, 살아 움직이는 거목 위에 올라탄 마녀가 소리쳤다.

댈런은 하늘에서 가만히 그걸 내려보다가 성검을 들어올렸다.

[준비됐느냐?]

“그래.”

존재감을 가려주던 진룡의 힘이 거둬지고, 구름 저편에서 다시금 아스라이 뇌성이 들려온다.

쿠르르릉···.

떠올릴 심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다만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하기 위해, 지금껏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 뿐.

[나는 되도록이면 나서지 않겠노라. 용의 육신은 용의 영혼에 끌리게 되는 법. 어렵사리 바꾼 진룡의 심장인데, 네 육신에 온전히 안착하기도 전에 내 것이 되어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마치 친절한 마탑의 스승이라도 되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적창이 말했다.

“아쉽군. 경험치를 나눠 먹지 않아도 되는 버스는 언제나 환영인데.”

[알아먹지 못할 헛소리 말고 집중이나 하거라.]

나직한 웃음소리가 심상 속에 울려퍼진다. 댈런은 마주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쿠르르르르···.

뇌성이 가까워져간다. 성검의 울림도 점점 뚜렷해져갔다.

허공을 딛고 선 채 눈을 반개하고, 심상 너머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린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깎아지른 설산.

오두막을 중심으로 온갖 기현상이 소용돌이치고, 한쪽 절벽에는 용이 거체를 뉘인 기이한 대지.

시선을 들자 검붉은 색으로 물든 채, 화염비와 우레를 쏟아내는 하늘이 보인다.

그대로 눈에 담아둔 채로, 심상의 방향을 조금 더 갈고닦는다.

‘뇌격의 핵심은 파괴력이 아니다.’

댈런이 손에 넣은 수십 가지 힘 중에서, 단순히 위력만으로 따지자면 뇌격은 그리 높은 순위가 아니었다.

범위에 있어서는 빙정이나 홍염주 같은 주문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아직 충분히 숙련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같은 선상에 놓고 본다면 합투권이나 적창의 힘이 더 강력했으니까.

그럼에도 악마와 마물을 상대할 때 여전히 우뢰를 즐겨 불러오는 이유는, 뇌격만이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단절의 능력.’

악마의 초월적인 재생력마저 저지하는 능력.

시체 거인과 같은 거대 마물을 상대할 때는, 그 결합 구조를 부수고 무너뜨리는 식으로 작용하곤 했다.

댈런이 지금보다 훨씬 약한 시절에도 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역량을 아득히 능가하는 저 마녀를 상대할 때 필요한 능력 역시 같은 종류.

“후우.”

들이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디딘 바닥.

두 손으로 들어올린 성검은, 영역 간의 충돌로 갈라진 하늘의 틈과 일직선상을 이뤘다.

우르릉. 우르르르···!

아득하던 뇌성이 머리 위까지 가까워진다. 갈라진 먹구름이 충돌의 여파를 무시하고 다시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검붉게 부풀어오르는 먹구름. 폭우에 섞여 떨어지기 시작하는 불꽃들.

심상 너머의 설산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정경이, 현실의 하늘에서 동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무슨···!]

저 아래에서 마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게 보이고.

[역시··· 항상 모두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전 아직 살아 있습니다. 기회를 틈타 합류하도록 하죠.]

머릿속을 희미하게 파고드는 에버론의 전음을 들으며, 댈런은 검을 내리그었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뇌람(雷濫)」

꽈르르르릉!!

하늘로부터 지면으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꽂힌다.

한 줄기에서 그치지 않고, 수십 개의 기둥이 동시다발적으로 지면을 강타한다.

두두두두두두―!

삽시간에 땅이 폭발하고 터져나가며, 그 아래로 뿌리내렸던 덩굴의 동체를 죄다 끊어버린다.

어느 장소에 뿌리내린 덩굴들이 필로페린의 마법진에 닿았는지는, 이미 하늘 위에서 오랫동안 관찰하며 모두 파악했다.

산산조각난 덩굴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끊임없이 재생하고 자라나려 했지만, 낙뢰가 떨어진 부위마다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그걸 저지해낸다.

[이 미친 야만인이!]

한순간에 외부 동력이 죄다 끊겨버린 마녀가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자그마한 손을 뻗었다.

쉬이이익―

호수 아래를 유영하는 물뱀처럼 솟구치는 덩굴들.

댈런은 그 파괴적인 쇄도를 피해내는 대신, 창공에서 뚝 떨어지듯 몸을 반전시켰다.

꽈광―

지면을 향해 하늘을 박찬다. 어차피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초월자들의 격전에서 비롯된 영감과, 적창의 조언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개방한 영역의 일부, ‘닫힌 설산의 하늘’.

그마저도 성검을 매개로 도움을 받아 간신히 해낸 일이기에, 오랜 시간을 이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는 입장에서, 저렇게 이성을 잃고 덤벼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

꽈과과과광―!

연달아 허공을 걷어차며 음속을 넘어선 그의 신형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벼락과 하나가 되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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