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제트(2)
꽈르릉―!
내리찍는다.
그것만으로도 마녀가 쌓아올린 덩굴의 요새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내렸다.
마법진의 마력을 한없이 빨아들이며 쌓아가던 힘.
초월자의 격마저 끌어올릴만큼 무한대로 공급되던 동력이 갑작스레 끊겼으니, 술식과 영역 다방면에서 균형이 꼬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우지끈! 찌지지직―
붕괴가 확대되어간다. 단단하게 얽힌 가지와 줄기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외부의 힘에 과하게 의존함으로 말미암은 자충수.
상급 악마에 필적하는 초월자를 쓰러뜨리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탓―
덩굴의 성채 위를 내달리며 수인을 맺는다.
「홍염주(紅炎柱)」
콰과과과―!
땅에서부터 치솟는 불기둥들이 앞길을 가로막는 덩굴과 잎사귀를 살라먹었다.
「빙정(氷晶)」
「개화(開花)」
「청파랍(淸波拉)」
빈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는 순간, 쏟아지던 빗방울이 얼어붙어 돌풍과 함께 휘몰아치고.
콰가가가각!
날카로운 얼음 결정의 회오리가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덩굴의 공세를 뿌리쳐냈다.
강제로 열어젖힌 여백.
그 종심을 파고들어 허공을 짓밟으며 다시 한 번 가속, 그대로 마녀의 면전까지 날아오른다.
꾸드드드···.
마녀를 태운 거목이 움직였다. 놈은 주인을 해치려는 적에게 거대한 팔을 뻗어냈다.
촤자자자작!
날카로운 가지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자라나가며, 건물도 뒤덮을 면적의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어낸다.
가시로 뒤덮인 그물에 머리를 들이미느냐,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벌리느냐.
강제된 이지선다를 눈앞에 두고, 댈런은 둘 중 무엇도 택하지 않았다.
그물 안쪽으로 달려들며 왼손으로 등 뒤의 창을 뽑아든다.
그대로 정면을 향해 가볍게 투척.
「염사(炎蛇)」
화르르르···!
르베론의 특제 단창이 불뱀의 형상을 덧입은 채 유영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 길이를 십 미터에 가깝게 늘여낸 화염의 보아뱀.
새빨갛게 타오르는 유선형의 몸체가 가시투성이 그물망을 불태우고, 더 나아가 거목의 팔을 거칠게 휘감아든다.
구으으으···.
순식간에 팔다리가 칭칭 휘감긴 채 낮게 포효하는 거목. 그 어깨 위에서 비틀거리며 마녀가 외쳤다.
[피, 필멸자 따위가···!]
“지랄하는 레파토리마저 항상 똑같군. 대사 누가 짰냐. 작가 불러와.”
결박된 거목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댈런이 곧장 검을 휘둘렀다.
[크읏!]
마녀는 가까스로 허리를 젖혀 피해냈다. 하지만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댈런의 어깨가 명치를 들이받았다.
[캬학!]
쨍그랑―!
가녀린 몸이 기역자로 꺾임과 동시에, 일대를 뒤덮었던 결계가 깨져나간다.
댈런은 멈추지 않았다.
섬전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지른다.
공세에 공세를 쌓아올리며, 단 한 순간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 저돌적인 태세.
한 번 완전히 무너진 술식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설령 초월자라 해도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그 여유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승부의 열쇠였다.
‘앞으로 5분!’
투가가각!
호흡 한 번에 검을 여섯 번 휘두르며, 영역의 개방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한다.
이건 시간싸움이었다.
한쪽은 버텨내야 하고, 다른 한쪽은 쓰러뜨려야 하는 사투.
5분 뒤면 뇌격의 억제력은 사라질 테고, 지면을 뒤덮은 덩굴들은 뿌리를 회복해 지하의 마법진에서 막대한 마력을 끌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기회는 없다.
댈런과 에버론은 이 자리에서 죽고, 팔시온은 황금 구역까지 불바다가 되겠지.
우지직!
거대한 불꽃의 뱀이 거목의 동체를 완전히 으스러뜨리는 순간, 휘청이는 마녀에게 검을 찔러간다.
마녀는 신음을 흘리며 주문을 쥐어짰다. 그러자 뒤틀린 거목의 어깨에서 나무뿌리 수십 가닥이 돋아나, 검날을 휘어잡고 경로를 비틀어냈다.
우드드득!
순식간에 성검을 단단하게 붙잡은 뿌리 다발. 댈런은 주저 없이 검을 놓아버렸다.
무리한 주문에 숨을 헐떡이는 마녀에게 달려들어, 우악스런 손길로 얼굴을 움켜쥔다.
[커흡!]
그대로 거목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지면을 향해서 몸을 반전.
「도약」
움켜쥔 마녀의 머리를 앞세워 땅을 향해 내리꽂는다.
콰지지지지지―
덩굴의 요새를 부수고 내려간다.
암녹색 마루와 천장, 기둥들을 박살내고 닿은 곳은 판석 깔린 광장의 바닥.
콰광―!
충돌의 여파로 만들어진 깊은 구덩이 속에서, 댈런은 마녀를 거칠게 집어던졌다.
[카흑!]
왜소한 육신이 벽에 부딪힌 뒤 나뒹군다.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 박살난 가면과 인식 왜곡의 주문.
드러난 마녀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허나 초월자의 의지는 그 정도로 바닥나지 않는 법.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일어서서 주문을 준비하는 그녀를 향해, 댈런은 주저 없이 달려나가 주먹을 내뻗었다.
「합투권 : 봉쇄(封鎖)」
두두두두두두!
손발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연격을 밀어넣는다. 노리는 부위는 다채로웠다.
손. 심장. 입. 다리.
주문에 관여하거나 수인을 맺어낼 수 있는 모든 부분이 타격의 목표.
어지간한 초인조차 반응이 힘들 정도의 쉴 틈 없는 연격으로, 술식을 이어가는 것 자체를 봉쇄해간다.
[끄으으으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낸다.
건물 벽마저 가볍게 무너뜨릴 권격을, 허공을 찢고 돋아난 나무껍질이 빗겨내고.
심장과 성대를 동시에 노리는 발끝에, 공기 중의 포자를 폭발시켜 궤도를 흔들어낸다.
완전히 대처하지 못해 살이 찢기고 눈코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지만, 마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얻어맞아 흐르는 피마저 제물 삼아 흑마력으로 치환하면서까지 치명상만큼은 어떻게든 피해낸다.
주문의 균형이 박살난 상태에서, 오로지 술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을 견뎌내는 초월자의 저력.
‘3분···!’
그 저력을 꺾어내기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크으···재가 되어 사라져라! 야만인!!]
일방적으로 밀리던 마녀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마력을 그러모으며 양쪽으로 팔을 크게 펼쳐내자, 덩굴 요새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잿바람의 폭포가 쏟아졌다.
쿠구구구···!
사력을 다해 주문을 쥐어짜내, 덩굴로 댈런의 양 다리를 붙잡는다.
모든 걸 잿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재의 저주. 적중하면 필살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이능.
본디 재의 마녀에게만 전해지는 저 능력은,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에서 그녀가 얻어낸 비장의 카드일 터.
폭포처럼 쏟아지는 잿바람의 세례 안쪽에서.
“빙고.”
댈런은 씩 웃었다.
[뭐, 뭐···?]
쓰러지지 않는 그를 보고 마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악에 물든 채 쩍 벌어진 입. 지금이야말로 댈런이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쿠홥! 흐어어어업! 모, 목 맥혀! 물 좀···!]
아공간에서 미친듯이 저주를 흡입하는 악마의 소음을 뒤로하고, 잿바람을 정면에서 뚫어내며 마녀의 면전으로 들이닥친다.
[필멸자가 별나무를 손에 넣었다니···! 불가능하다!]
마녀가 소리쳤다.
흔들리는 심상. 요동치는 주문.
이미 한 번 균형이 깨진 시점에서, 재의 저주와 속박 주문을 동시에 시전한 건 명확하게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우지지직!
[끄아아아!]
다급한 대로 스스로의 안위마저 도외시한 채, 제 팔다리를 찢어가며 덩굴과 가지를 뻗어내 댈런을 막아선다.
스스로의 육체를 손상시키는 극단적인 항전. 그런 밑바닥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절박함.
그녀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시간들을 겪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허나 동정은 필요없다.
“에버론. 지금이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너져가는 덩굴 요새의 잔해 사이에서 튀어나온 이십여 명의 초인들이, 마녀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파지직!
콰과과과―!
전격을 쏟아붓는 동시에 충격파가 가지를 꺾어버리며, 단마의 백염이 덩굴을 태우고 독 묻은 단검으로 목줄기를 노린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크아아악!”
“메르나! 미안하다!”
사력을 다한 마녀의 저항에 대여섯 명의 초인이 순식간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다.
그럼에도 마녀의 마지막 저항은 상쇄되었고, 촌각을 다투는 이 순간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르보르.’
불사의 악마.
그 진명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공간 속에서 이질적인 힘이 요동한다.
촤르르르륵―!
허공에 열린 십여 개의 구멍.
그 안쪽에서 뻗어나온 건 시린 냉기를 품은 사슬들이었다.
회심의 반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만들어진 틈.
그 무방비한 순간을 파고들어, 십수 가닥의 사슬이 마녀의 사지를 묶어버린다.
[끄아아아아악!]
얼마 전까지 칼카스의 것이었던 사슬. 거기에 깃든 냉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종류가 아니다.
마력은 물론 심상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극한의 서릿발.
평소의 마녀라면 결코 당할 일이 없었겠지만, 약화되고 약화된 지금의 그녀를 묶기에는 충분했다.
뚜두둑!
덩굴과 가지로 변했던 팔다리가 사슬에 휘감기고, 사지는 물론 몸통과 머리까지 단단히 고정된다.
[필멸자! 지옥에서 너를 저주하겠―으읍!]
입을 틀어막고 손가락 하나까지 꺾어, 영창과 수인까지 모조리 봉인했다.
“물러서시오.”
마녀의 저항에서 살아남은 에버론의 의체들이 뒤로 빠진 걸 확인한 뒤, 댈런은 마녀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쿠르르릉···.
천장에 뚫린 구멍.
그 너머의 하늘을 응시한다.
여전히 지면으로 뇌전을 쏟아내는 먹구름. 그 너머를 향해 시선을 들어올린다.
‘번개는 구름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지.’
구름과 구름 사이.
그 까마득한 창공에는 더 거대한 번개가 존재하는 법.
이 세상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저 상상 속의 장소로 여기는 곳이지만,
댈런의 기억 속에는 어지간한 새들조차 닿지 못하는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순간이 존재했다.
거대한 비행기 안. 난기류로 흔들리던 좌석과 물병.
손바닥만 한 창밖 저 멀리 내다보이던 먹구름 사이를, 푸른 빛살이 이어주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이 심상으로 바뀌고, 심상이 현실을 침식한다.
요새의 지붕 위에 던져두었던 성검이 의지에 반응하며, 다시 한 번 현실을 개변하는 매개로서 작동했다.
하늘 위 먹구름 한가운데, 지상과 구름 너머를 관통하는 거대한 구멍이 열린 직후.
「청뢰(靑雷)」
수십 발의 낙뢰를 모아낸 듯한 푸른 섬전의 기둥이, 도심의 음영을 반전시키며 떨어졌다.
꽈르━━━
시계는 암전되었고, 소리는 차단되었다.
순간이었지만 간접적인 충격만으로 댈런의 모든 감각이 마비될 정도의 위력.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까만 도화지에 물감을 흩뿌리듯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에 집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시야에 덩굴의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맙소사.”
뒤로 한참을 물러나 있던 에버론이 실소했다. 마녀가 있던 자리에는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희뿌연 연기와, 거기 묻어나는 마력의 잔재만이 마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
쿠르르르···.
덩굴의 요새가 생명력을 잃고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땅에 뒹구는 잎사귀 하나까지 수분을 잃고 말라비틀어진다.
주인 잃은 심상이 맞이하는 결말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 년 전의 마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절명하기 직전의 순간에, 라필렘에게 몸과 영혼을 바쳐 지옥으로 도피했다고 하죠.”
허물어져가는 덩굴의 요새를 바라보며 금발의 청년이 말했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소멸했다면, 결코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
“결국 천 년을 기다려온 복수는 실패했군요. 저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복수라고 했소?”
모니터 너머에서 가벼운 설정으로 듣고 넘겼지만,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그런 어중간한 무지에 부딪힌 게 벌써 몇 번째던가.
수백 회차를 플레이했으나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점점 더 중요해짐을 느꼈다.
“머지않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미궁과 얽힌 저희들의 오랜 사투와, 이 도시의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요.”
그의 생각을 짐작한 것일까. 지친 얼굴의 청년은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해줘 봐야 들을 상태도 아니었다.
시야가 좁아지고 감각이 둔화되는 게 느껴진다. 완력마저도 평소의 절반 이하였다.
개방된 영역이 소멸하며 밀려오는 피로감은, 근래 겪었던 그 어떤 전투보다도 몇 배나 강렬했다.
아마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가까스로 5위계의 끄트머리에 닿기는 했으나, 기연과 재능이 겹치고 성검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순간적으로 올라간 것일 뿐이다.
일신의 능력으로 온전히 올라서기 위해서는, 그로서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졌군.’
다가오는 종말 앞, 시간은 한정적이다.
미궁에서 돌아오며 떠올렸던 화두가, 또 한 번의 거대한 싸움을 겪어내며 명확한 방향성으로 정리되어간다.
상념을 갈무리한 댈런은 구덩이로 훌쩍 뛰어내렸다.
구덩이 한가운데 박힌 성검을 뽑아들고 나올 즈음, 덩굴 요새의 마지막 골조가 무너지며 좁았던 시야가 탁 트였다.
“······.”
먹구름이 조금씩 걷혀나가고, 하늘이 보랏빛의 맨살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칠흑 같던 밤이 지나갔다.
곧 동틀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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