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1)
어두침침한 낮은 거리의 골목.
황톳빛 이끼가 눌러붙은 하수도 벽면 사이사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모를 구정물과 함께 수십만의 삶이 흘러가는 곳.
흔해빠진 마약 중독자부터 근래 불어나기 시작한 난민, 청동 구역에서 밀려난 삼류 건달, 세상의 눈을 피해 숨어든 은둔자들까지.
얼마 전 서부 지구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칙칙한 하수도에서 빵쪼가리는 원래부터 귀했고, 마약 중독자들 여럿 죽어나가는 일이야 이전에도 흔했으니까.
낮은 거리에서 내로라하는 마약상 중 하나, 다미르 푸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륵!
빈 허공에 불이 붙는다.
불꽃은 순식간에 수박만 한 크기로 몸집을 불렸다.
“씨발, 근육 돼지 야만인이 무슨 무영창 주문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아나면서도 멈추지 않는 입.
추격자는 그걸 보고 피식 웃더니, 두터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발화(發火)」
「적염구(赤炎球)」
화르르르르!
쏘아진 적색 화염구가 하수도의 습기를 싹 날려버리며 쇄도한다.
그 궤적의 종착지에 있던 푸틴은, 기겁하며 모퉁이를 돌아 가까스로 사선에서 벗어났다.
콰과광!
“끄어억!”
직격은 피했으나, 폭발의 여파마저 피해낼 수는 없었다.
불 붙은 파편과 흙먼지가 파도처럼 통로를 휩쓸고, 푸틴의 육중한 몸 역시 붕 떠서 수 미터를 날아갔다.
첨벙!
구정물 가득한 웅덩이에 처박힌 몸뚱이. 두툼한 살이 쿠션 역할을 해줬음에도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푸틴은 숨을 헐떡이며 품속에서 작은 종이조각을 꺼냈다. 검고 붉은 글씨가 적힌 부적이었다.
“이···좆 같은 보호막 부적. 비싸기만 했지, 주문이면 어떤 종류던지 다 막아준다더니 순 사기꾼···.”
“사기가 아니다.”
파짓―!
그 순간, 한 줄기 전격이 눈앞으로 들이닥친다.
푸른 전격은 머리통을 꿰뚫기 직전, 뭔가에 맞은 듯 굴절되었다.
동시에 손안에 있던 부적이 강렬한 빛을 토하더니, 갈기갈기 찢겨져 흩날렸다.
“어, 어어···?”
“마약상 다미르 푸틴. 차르국 남부 출신. 열 살 때 마을이 도적떼에게 약탈당했으며, 노예로 팔려가던 중 도망쳐 미궁도시에 발을 들이고 마약 사업을 시작.”
사라진 부적을 어벙하게 바라보는 배불뚝이 마약상의 앞.
채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를 뚫고, 거구의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로 마약 사업 24년차. 근래 난민들을 고객이자 조직원으로 삼아 세력을 크게 불렸다. 맞나?”
“어, 어떻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군. 마약 팔아먹을 때는 잘 굴러가던 대가리가 이런 상황에선 안 굴러가나 봐?”
“돼, 돼지라니! 감히 그딴 망언을···!”
방금까지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어디 가고,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벌떡 일어서는 마약상.
전사, 댈런은 슬쩍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내가 너무 뼈아픈 사실을 건드렸나?”
“이 씨발 새끼가!”
마약상이 소리쳤다. 놈은 거칠게 품속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정렬되지 못한 동작에 품속의 잡동사니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와, 구정물 안으로 첨벙거리며 떨어지는 광경.
[호오···.]
그 광경을 본 아공간의 악마가 떨어진 물건들을 향해 입맛을 다셔댔다.
[룬이 새겨진 에메랄드 반지, 호신 기능이 내장된 고급 잉크병, 저건 엘가이아 마탑의 주문석이고, 방금 떨어진 건 흑마법사들에게 비싼 값에 팔릴 상급 영혼석. 주인님, 저 돼지 새끼 생각보다 돈이 많나 봅니다.]
‘당연하지. 이 근방에서 한 손에 꼽는 마약상 중 하나인데.’
다미르 푸틴.
마약상으로서 수십 년간 일군 부를 이용해, 각종 강력한 마법 도구로 스스로를 도배하다시피 한 보스몹.
일신의 능력은 보잘것없지만, 고가의 마법 무구들로 인해 종합적인 무력은 그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
일반적인 플레이라면 초반부에서 중반부 사이에 상대하기에 딱 적절한 놈이겠지.
“차, 찾았다! 흐흐흐, 지금껏 나를 모욕하고서 곱게 뒈진 놈은 없었지. 너도 마찬가지다.”
품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맺힌 팔찌를 꺼내, 두꺼운 손목에 억지로 끼워넣는 마약상.
댈런이 이 시점에 이놈을 찾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필로폰이 까마귀 둥지에 내건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놈에게 죽은 시체를 회수하는 것.
“클라카로스― 쎄 글램!”
짧은 영창에 섬세하게 음각된 흑마법의 술식이 작동하고, 팔찌 옆면에 촘촘하게 박힌 영혼석이 제물이 되어 지옥문을 열어젖힌다.
콰지직!
허공에 난 틈을 비집고 나타난 건, 하수도 통로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늑대형 짐승.
크르르르···!
눈 여덟 개짜리 늑대가 낮게 포효했다.
거대한 몸뚱이 전체에 빼곡하게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들과, 번뜩이는 눈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놈은 미궁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최상급 마물.
그것도 전속 계약자를 따로 두기까지 할 정도로 강대한 존재였으니까.
[하수도를 전전하던 창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댈런의 시선은 늑대의 머리 위, 일렁이는 알림창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으하하하! 어떠냐! 클라카로스의 요철옥좌, 그 곁을 지키는 수호견 중 하나의 위엄이!”
마약상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댈런은 들고 있던 손도끼를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그래, 그런 철쪼가리 들고 저항하기보다 맨손으로 곱게 죽는 게 나을 거다! 가라, 지옥의 파수견! 나를 모욕한 적을 물어뜯어라!”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마약상이 소리치고, 계약에 묶인 늑대가 놈의 명령에 앞으로 돌격했다.
콰과과과―
늑대의 육중한 덩치에 통로의 벽과 천장이 긁혀나간다. 피할 구석은 전혀 없었다.
물론 댈런의 입장에서야, 애당초 피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스읍―
가볍게 숨을 들이쉰다. 심상을 따로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40을 넘어선 근력을 주먹에 그러모으고, 내딤발을 디뎌내며 늑대의 주둥이에 그대로 꽂아넣는다.
으지직―
마물의 단단한 가죽과 뼈가 뭉게지는 소리.
위턱의 끝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 골격과 근육을 따라 전해지며 내장을 으깨버린다.
뻐버벅―!
그 끝은 살점과 가죽의 폭발이었다.
허리를 기준으로 뒤쪽 절반이 터져버린 늑대가, 깨갱 소리도 못 내고 주저앉았다.
마물의 질기디 질긴 생명력으로 마지막까지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
댈런은 손도끼를 뽑아 내리쳤다. 가쁜 숨소리 역시 끝을 맺었다.
***
“어, 어라. 이거 이상···?”
마물의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채, 마약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댈런은 놈을 가볍게 후려쳤다.
움푹 들어간 가슴팍. 부서진 갈비뼈와 으깨진 심장.
고급진 옷감에 내장된 방어 주술은 충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품속의 각종 호신용 마도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꺽···끄으···사기꾼······.”
“사기꾼은 개뿔.”
그럼에도 곧장 절명하지 않은 것은, 수십 개의 마도구들이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해냈다는 증거겠지.
“처리해라.”
[옙, 주인님. 인간! 보물, 보물을 내놔라.]
허공에 열린 아공간에서 죽 뻗어나온 검은 손아귀가, 죽어가는 마약상의 멱살을 잡고 품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촤르르···.
마찬가지로 웅덩이 안쪽에 열린 구멍들은, 검푸른 사슬을 뻗어내 물속의 마도구들을 하나둘씩 낚아채갔다.
칼카스의 힘을 완전히 소화해낸 뒤 악마에게는 자동 루팅기라는 역할이 추가됐다.
사로잡히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물욕. 거기에 강해진 본신의 능력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결과물.
[에헴, 잘 정리해서 차후에 문서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댈런은 악마에게 주변 정리를 맡겨두고, 수호견의 시체 곁에 놓인 잿빛 인영에 손을 가져갔다.
[하수도를 전전하던 창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화영창술(D)]
“흠.”
마약상 하나 잡자고 이틀을 낮은 거리에서 허비했지만, 그래도 보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찌됐건 언젠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다. 이번에는 더불어 은둔한 초월자인 필로폰의 호감도와 보수까지 챙길 수 있는 기회였고.
후반부까지 도달한 강자들의 시체에 비해서야 적은 보상이었으나, 원래 레벨업에 들어가야할 노력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효율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남부 지구 쪽은 끝인가.”
댈런은 잠시 멈춰서서 숫자를 셈해보았다.
서부 지구에서 마녀를 퇴치한 이후, 그는 의뢰 수행 겸 시체를 회수하는 데 몰두했다.
굳이 나서서 스스로를 드러낸 적이 없음에도,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날개 돋친 듯 치솟았다.
매일같이 까마귀 둥지로 의뢰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당연하게도 그것들 중에는 그가 죽었던 장소나 인물에 엮인 의뢰 역시 존재했다.
댈런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회수해야 할 시체인데, 돈까지 얹어준다니 고마울 따름.
그렇게 2주간 시체 회수에 매진한 끝에, 남부 지구 전역의 시체를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환각제에 심취한 마도구 장인의 시체’
‘여색에 빠진 뒷골목 악사의 시체’
‘낮은 거리 무덤 도굴자의 시체’를 포함해 총 여덟 개의 시체들.
회수한 시체들에게서 얻어낸 능력치는 도합 10을 넘어섰다. 얻은 것들을 정리할 겸, 댈런은 상태창을 열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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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29
[근력 : 43] [기량 : 38] [체력 : 34]
[감각 : 34] [지능 : 33] [마력 : 36]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고유 스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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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30이 지척이었다.
마녀를 쓰러뜨리며 한 번 레벨업한 이후, 2주간 의뢰를 수행하며 추가로 한 번 더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것.
거기에 계승 보상으로 스킬 두 개를 습득했고, 성화의 불씨 스킬을 비틀어 고유 스킬도 하나 얻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지구도 한 번 훑어보고 싶지만···.’
그럴 여유까지는 없을 게 분명했다.
마녀를 통한 마지막 공격 이후, 실패의 충격 때문인지 악마들은 약 보름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포기할 놈들이었으면, 수백 회차 동안 종말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었겠지.
슬슬 재개할 놈들의 움직임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제때 움직여줘야,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
어쨌든 이런 여유가 또 언제 올 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지난 2주간 눈코 뜰 새 없이 하수도 구석구석을 쏘다닌 것이고.
[정리 끝났습니다, 주인님. 이놈은 어떻게 할까요?]
“자루에 넣어서 가져간다. 필로폰에게 넘겨줘야지.”
[알겠습니다.]
악마가 재빠르게 마약상의 시신을 수습한 뒤, 댈런은 지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부서진 낮은 거리의 통로에는, 최상급 마물의 시체만이 남아 성화의 불꽃에 부스러져갔다.
***
쿵.
테이블 위에 큼직한 자루가 올려졌다.
검붉은 피딱지가 군데군데 앉은 걸로 보나, 딱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로 보나 내용물이 평범할 리는 없어보이는 자루.
오두막의 주인, 샤니아 필로폰은 자루의 주둥이를 슬쩍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이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홀홀, 이걸로 골치 아픈 바퀴벌레는 모두 끝났구만. 자고로 장사를 한다면 상도덕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안 그런가?”
“천 번이라도 옳은 말씀입니다, 어르신. 상인들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는 법이죠.”
“끌끌끌, 젊은 친구가 식견이 넓구만. 엘가이아 마탑주가 눈여겨보는 이유가 있었어.”
“으하하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계시는 약제상께 과분한 칭찬을 듣게 되다니, 지난 삼십 년의 수고는 모두 오늘을 위한 것인가 봅니다.”
주거니 받거니 덕담을 나누는 샤니아와 볼크마.
아니,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약제상 필로폰과 갈리오스 상단주라고 불러야 할까.
의뢰 보수를 받으러 들른 과수원의 오두막에, 예상치 못한 선객이 있을 줄이야.
약초도시 르비바흐에서 좋은 거래처를 많이 만들었다더니, 아무래도 팔시온으로의 판매 루트는 필로폰네 과수원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에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은 저 상인에게 더 어울리는군.]
‘내 말이 그 말이오.’
오두막에 들어온 지도 벌써 10분 지났다.
안 그래도 말 많은 양반인데, 거래처모드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대화가 끊길 줄을 몰랐다.
“홀홀홀. 아, 시에나에게는 이르지 말아주려무나. 내 보수를 두둑하게 얹어줄 테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와 함께 찻잔에 뭔지 모를 가루를 듬뿍 넣어대는 노인. 건네받은 돈주머니의 무게가 약속한 것보다 반 배는 무거웠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또 쓸데없는 수다만 잔뜩 떨어대겠지. 댈런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일로 필로페린의 마법진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들었소. 어떻게 해결되는 중인지 아시오?”
“···홀홀. 곤란한 질문을 하는구나.”
차를 음미하던 노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두 사람과 볼크마 사이를 갈라놓는 소음 마법.
“그 질문을 굳이 나를 찾아와서 한다는 건, 내 핏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야기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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