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2)
휘이잉···!
스산한 바람이 오두막 덧창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나무 틈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방음 결계 너머, 하얗게 질린 볼크마의 얼굴을 보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하긴, 모르는 입장에서야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한 상홍.
허나 초월자들을 상대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 댈런은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과수원의 주인, 샤니아 필로폰. 평소에는 은둔해 있지만 미궁도시가 위험에 빠지면 그 누구보다 앞서서 도시를 지키려 하는 초월자지. 친밀도를 높이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지만, 한 번 내 편으로 만들면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고.’
머릿속 한구석에 정리된 정보들을 빠르게 훑어내고, 동시에 다음 문장을 구성할 단어들을 골라낸다.
샤니아 필로폰은 제한적으로나마 영역 그 자체의 입구를 현실세계에 겹쳐 열어내는 역량의 보유자.
영역에 대한 이해도만 놓고 보면, 금강궁의 초월자 중 하나인 에버론마저 뛰어넘는 역량을 가진 초월자다.
그런 존재가 호의를 내걸고 제시한 시험이라면, 불쾌하다기보다 오히려 기꺼운 게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필로폰은 원래라면 시에나라는 연결고리를 가지고서도,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려운 존재.
반대로 생각하면 그녀의 의뢰를 받아 마녀의 궤계를 멈춰 세우고, 뒤처리로 마약상들까지 때려잡은 지금이야말로 그 호의를 얻어낼 절호의 기회겠지.
“이해하오. 비밀을 아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양날의 검이지.”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 안쪽, 이글거리는 녹광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댈런은 급하지 않게 찻잔을 들어, 그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키고서 말을 이었다.
“허나 부활의 영약을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꿈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홀로 간직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없는 것 아니겠소? 그걸 알고 있으니 젊을 적에 금강궁을 뛰쳐나온 것일 테고.”
“···시에나에게 비범한 자라는 걸 듣기는 했지. 허나 너무 많은 비밀들을 손에 넣었구나. 심상 너머에서 전지의 편린에라도 닿았느냐?”
필로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내가 아는 게 좀 많긴 하지.”
“뭐, 그래. 나쁘지 않다.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 세상. 이 땅에 필요한 건 너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어.”
후우웅···.
창밖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든다. 이내 언제 숨었냐는 듯 구름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햇살.
여느 때처럼 인자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필로폰은, 찻물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끌끌, 다만 부활의 영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단다. 백 년을 쏟아부은 끝에야 알게 되었지. 불멸성을 손에 넣는 것과, 이미 벌어진 죽음을 되돌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걸.”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풀어가는 이야기.
닿지 못할 비밀, 쥘 수 없는 힘을 거머쥔 이에게 초월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조차 가지지 못한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지워버리려 들거나.
혹은 반대로, 그 미지의 가능성에서 희망을 엿보고 전례가 드문 호의를 품게 되거나.
에버론이나 적창이 그랬던 것처럼, 샤니아 필로폰은 명백한 후자에 속했다.
댈런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그걸 경험해서 알고 있기에, 그녀의 민감한 비밀을 카드로 들이밀 수 있었던 것이고.
“금강궁에서 요청한 도움을 주기로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금강궁에는 내 혈육이 있지. 필로페린 가문의 증손녀, 엘리나 필로페린.”
“그쪽의 언니군. 맞소?”
“홀홀···그래, 잘 아는구나. 이번 사건으로 언니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단다. 필로페린의 마법진에 문제가 생겨 수확량이 적어질 예정이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 내 영역의 힘을 빌릴 수 있겠냐고 했지.”
필로폰의 심상인 이곳, 과수원 주변의 드넓은 옥토를 경작할 심산인가.
부가적인 설명은 다소 부족했지만, 전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두막과 과수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땅덩이는, 현실 세계에 반쯤 걸쳐서 구현된 필로폰의 영역.
정확한 심상의 정수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려웠지만, 풍경만으로도 어떤 이상향을 꿈꾸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부활의 영약을 꿈꾸고 있으니···분명 그와 관련된 갈망이 녹아있겠지.’
전설에나 나올 부활의 영약. 그 원재료가 될 미상의 약초.
약기운에 취한 눈앞의 노인이 꿈꾼 건, 그런 약초마저도 자생할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대지임이 분명했다.
그런 곳을 개간하고 파종하기만 한다면, 서부 지구의 기능 저하로 인해 발생할 식량난이라도 충분히 타개하는 게 가능할 터.
금강궁의 초월자 중 하나인 노인의 초대 필로페린의 후계자는, 이를 위해 자신의 동생에게 영역을 열어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오래도록 잃은 걸 되찾고자 하였으나, 노쇠한 나이 때문인지 이제는 지쳤단다. 처음부터 잃지 않는 게 정답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삶의 지혜랄까.”
끌끌 웃으며 소금병에 담긴 하얀 가루를 찻잔에 솔솔 뿌리는 노인.
저렇게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노인이 했을 고민의 무게는 평소의 배나 듬뿍 집어넣는 약물의 농도만큼이나 짙고 무거웠을 테다.
백 년이 넘도록 이상을 좇던 초월자는, 마침내 현실과의 괴리 사이에서 타협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댈런의 앞에도 놓여 있을지 모르는 갈림길.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 것인가.
‘쓸데없는 고민이군.’
댈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이상은 부활의 비약이나, 세계의 평화 같은 거창한 종류가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한 번쯤은 고향의 땅을 밟아보고자 하는 향수.
처음부터 드높은 꿈이 아니었기에, 포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그 간단한 소망조차도 가로막으려 드는 종말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이렇게나 하고 있는 것일 뿐.
달칵.
찻잔을 깨끗하게 비워낸 필로폰은, 테이블을 가로막고 있던 방음 장막을 해제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홀홀, 미안하게 됐구나. 늙은이의 푸념이나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닐 텐데 말이야. 상단주에게도 미안하네.”
“아니오.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렇게까지 구하고자 한 사람은 누구였소?”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댈런이 문득 물었다.
호의를 얻었고, 스스로의 길을 정했지만.
인간적인 호기심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끌끌끌, 그게 그렇게 궁금했느냐?”
예상 외의 질문이었을까. 기분 좋게 웃어젖힌 필로폰은, 속눈썹으로 긴 호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시에나는 제 아비를 참 많이 닮았지. 내가 그 아이를 아끼는 이유란다.”
***
“과수원을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 뵙겠습니다.”
깍듯한 직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건물을 나선다. 댈런의 손에는 두 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두터운 장서 쪽은 대형 마탑이 따로 없는 식목계 술식의 기초 이론서, ‘식목계 마법 개론’.
그리고 그 반의 반도 안 되는 얇은 두께의 노트에는, ‘약초를 찾고 쓰는 법. 샤니아 필로폰 저.’라고 적혀 있었다.
“으하하! 대단하네, 댈런! 아무리 약속되었던 추가 보수라고 하지만, 약초술의 한 획을 그은 위인에게서 직접 저서를 물려받다니! 앞으로 자네를 고용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구만. 몸값이 이렇게나 높아져서야!”
뒤따라 나온 볼크마가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댈런은 픽 웃고 품속에 책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 본 다음 중고로 어디 내놓을 생각은 없나?”
“욕심도 많소, 상단주. 약초 장사에 유리창 장사까지 했으면서 만족할 생각은 없는 거요?”
댈런은 살짝 질린 눈으로 볼크마를 쳐다봤다.
갈리오스 상단을 이끄는 그가 도시에 도착한 건 정확히 이 주 전.
청뢰(靑雷)로 인해 근방 일대의 유리창이 죄다 박살난 걸 알아채자마자, 재빠르게 유리 공방들을 인수한 그가 수십 궤짝어치 금화를 쓸어담은 건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만족하는 순간 뒤처지는 걸세. 이쪽 세계는 냉혹한 법이야. 돈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그걸 노예로 부릴 정도가 되어야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볼크마.
그 능글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상인정신 스킬이라는 게 있다면 S등급을 달았을 게 분명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네, 댈런! 조만간 자택으로 한 번 찾아가겠네!”
대로변에서 상단주와 갈라진 댈런은, 익숙한 골목을 따라 까마귀 둥지로 향했다.
원래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조금 전 과수원을 떠날 때 필로폰이 남긴 말로 인해 계획이 조금 바뀐 것.
‘그나저나 시에나가 널 찾더구나. 까마귀 둥지로 한 번 가보렴. 아가용이 널 찾는다고 하던데?’
“아가용이라.”
지나치게 귀여운 어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댈런은 왼팔을 걷어올렸다.
젊은애들끼리 만들어낸 암호냐며 재밌어하던 필로폰의 생각과는 달리, 아가용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몇 주 전까지 문신이 빼곡하게 들어찼던 왼팔에는, 이제 저주막이의 인장과 신성문신만이 남아있는 상태.
마녀와의 싸움 이후, 새끼 청린용이 문신의 형태로 돌아가기를 꺼려했던 탓이었다.
‘버번은 급격한 성장기라 그렇다고 했지.’
아무리 그가 부모로서 각인되었다고 해도, 용의 생태와 성장은 같은 용이 가장 잘 아는 법.
잠시 자신에게 맡겨두라는 버번의 제안을, 댈런이 망설임 없이 수락한 건 그런 이유였다.
‘몇 주 정도는 도시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기도 했고, 용심장 덕에 청린의 힘 없이도 용의 기운을 숨길 수 있게 됐으니 문제는 없지.’
상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간판이 보인다.
[까마귀 둥지]
[영업시간 : 오후 6시 ~ 오전 4시]
댈런은 거침없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얼굴에 훅 부딪히는 열기.
시끌벅적한 공기 사이로 퍼지는 알싸한 향취.
한때 정적만이 감돌던 까마귀 둥지의 주점은, 시에나가 돌아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느 때보다도 붐벼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 애송이한테···!”
“글쎄 이번 서부 지구의 중독자 사태에서 내가 구해낸 사람만 스물이 넘는다니까!”
“웃기고 자빠졌네. 혼자 도망가기 바빴겠지.”
“자, 그럼 다음 탐험을 위하여! 건배!”
고막을 두들기는 수많은 소음들 사이를 거닐며, 댈런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바테이블에 다가갔다.
물론 그의 예민한 감각은 과장된 소음들 사이, 은밀하게 주고받는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 맞지? 용살자 댈런?’
‘얼마 전에는 미궁에서 악마를 죽였다고 했소. 이번 중독자 사태에서도 최전선에서 활약했다는 소문이 있더군.’
‘아직까지 금패 용병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데. 물밑으로 영입을 시도해볼까?’
‘관둬. 까마귀 둥지를 통해 의뢰를 넣어도 대부분 거절당하는 판이다. 제 몸값을 모르는 멍청이가 아냐.’
호기심과 경탄, 탐욕, 아쉬움.
다채로운 감정이 뒤섞인 속삭임과 시선들 속에서, 의외로 대놓고 적대적인 느낌은 없었다.
이곳이 그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까마귀 둥지라는 영향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쌓여온 명성이 단순한 시기와 질투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를 향해 어중간한 시비를 거는 게, 더이상 실리적으로 이득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반대로 말하면 그에게 적대적인 이들일수록, 앞으로 더욱 대놓고 그의 목숨을 노릴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어쩌면 이미 금강궁의 초월자들과 시선을 나란히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
‘말도 안 되오. 이런 신성이 5위계라니? 물론 강한 건 인정하지만, 초월자들 특유의 압도감은 잘 느껴지지 않소.’
‘위계? 위계가 뭔가?’
‘나도 몰라 새끼야.’
더불어 위계라는 개념을 알 정도의 실력자들이, 시에나의 영업권 안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끊이지 않는 속삭임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댈런은 바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주문하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에 얼음과 술을 따라진다.
잔을 들어올리자 그 밑에 깔려있던 짧은 깃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로. 급해.’
손끝을 가져다 대는 순간, 머릿속에 또렷하게 울려퍼지는 전성.
‘서리고원에 악마 군대가 나타났다는 속보가 들어왔어.’
짧은 두세 마디뿐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잘 마셨소.”
갈색 액체를 단숨에 들이킨 댈런은, 자연스레 깃털 위에 잔을 내려놓고는 슬쩍 목을 풀었다.
알차게 써먹었던 이 주간의 휴가가 드디어 끝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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