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49화 (149/288)

폭풍전야(3)

차향과 종이 냄새가 가득한 사무실. 댈런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을 채우는 차가운 각성감과, 혀끝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씁쓸함은 떠나온 고향의 맛과 닮아있었다.

댈런이 시에나의 사무실을 즐겨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 원, 커피는 그렇게 즐기면서, 왜 항상 차는 술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는 거야? 차나 커피나 똑같이 식물에서 나온 음료인데.”

“마약과 약초도 식물에서 나오지. 하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오.”

잔을 살살 흔들면서 내놓은 대답. 시에나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비유를 해도 꼭. 아무튼 엘가이아 마탑에서 연락이 왔어. 다음 달부터는 원두를 세 종류로 늘려서 보내주겠다고. 저쪽도 당신과의 관계를 어지간히 신경쓰는 모양인데. 하긴, 용병 길드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까.”

“용병 길드?”

잔을 내려놓은 댈런이 되물었다. 시에나는 살짝 웃으며 테이블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올려놓았다.

“당신 이름값이 어지간히 높아졌어야지. 나도 이런 경우는 거의 들어본 적 없다니까. 열어봐.”

달칵.

순금처럼 보이는 잠금장치가 열리고, 붉은 천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운데 놓인 물건은 댈런의 이름과 용병 길드의 등록일자가 적힌 백금 용병패였다. 더불어 용병 길드마스터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한까지도.

“따로 신청을 넣지 않았는데도 보낸 걸 보면, 자기 쪽에도 끈이 닿아있다는 걸 생색내고 싶은 모양이야.”

“뭘 노리는지 알겠군. 백금패 용병은 명단이 공개되니까.”

“맞아. 하지만 이름이 팔리는 걸 생각해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거라 생각해. 굳이 서부의 길드 연맹까지 가지 않더라도, 용병 길드는 전 대륙에 영향을 미치는 단체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선택은 당신의 몫이고.

그렇게 말하며 상반신을 살짝 뒤로 빼는 시에나를 보며, 댈런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백금패를 품에 집어넣었다.

새로운 보물에 기뻐하는 악마의 탄성을 한 귀로 흘리며 상자를 옆으로 치우자, 시에나가 다시금 진중해진 얼굴로 서류 몇 장을 꺼내놓았다.

“급한 일은 처리했으니,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청동 구역 뒷골목을 주름잡는 정보상의 음색으로 그녀가 말했다.

“악신 쑴의 악마들이 서리고원 너머에서 관측됐어.”

***

지옥.

환상세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악마들의 영역.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 속에는, 그런 지옥이 수백 개나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많은 회차를 플레이한 댈런도 그 낭설이 진실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아는 건 설령 지옥이 수백 수천 개가 있다 해도, 그중에도 가장 깊고 무거운 악이 잠든 대지옥은 다섯 개뿐이라는 사실.

종말의 근원지인 악신들의 머릿수와 동일한 숫자였다.

‘그중에도 악신 쑴이 기거하는 파멸궁전은 싸움과 불, 파괴, 살육의 지옥이라 불리지.’

살육과 불의 악신, 쑴.

에낙사구스가 갖은 궤계로 대륙의 몰락을 꾀하고, 라필렘이 역병과 오염으로 땅을 정복하려 한다면.

쑴의 전략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냥 쳐들어가서 다 부수고 죽이는 것.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북방인 부족들 중 많은 숫자가 쑴의 노예가 된 게 이미 이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이야.”

시에나가 길고 검은 머리칼을 꼬아대며 이야기했다.

사실 지옥의 전력을 현실에 직접 쏟아내는 건, 악마와 악신들의 입장에서도 상당한 힘이 소모되는 일이다.

악신들이 흑마법사 같은 대리자를 만들어 활동하는 건 그런 이유.

다만 다채로운 대가로 유혹하는 다른 악신들과 달리, 쑴이 제시하는 보상은 오로지 싸움과 파괴뿐이다.

일반적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었을 터.

‘하지만 북방인들은 예로부터 투쟁에 열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

오랜 옛적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던 유일신이 투쟁의 신이기 때문일까.

이 땅 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현현해, 악마의 끝없는 공세를 막아냈다는 전쟁신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북방인들은 역사 이래로 숱하게 있었다.

끝없는 싸움 끝에 주어지는 영원궁전의 영광.

악신 쑴은 지난 백 년간 그 투쟁의 방향을 꺾고 비틀어, 마침내 같은 인간을 향하게 만든 것이다.

“차르국에는 서리고원 너머를 관측하는 경계탑이 있어. 지난 백 년간 쑴의 추종자들과 전쟁을 벌인 끝에 만들어진 시설이지. 내 정보망에 따르면 스물에 가까운 악마들이 서리고원 너머에 소환됐다고 해.”

“스물이라···그나저나 차르국에는 언제 또 손을 뻗은 거요?”

“손을 뻗었다고 할 것까지야. 미궁을 오가면서 특무대 요원들 중 몇 명과 친분을 좀 다진 것뿐인데.”

미궁이라. 칼카스의 흑마법사들을 쫓으며 정신없던 와중에도 정보망은 착실히 넓혀갔다는 소리군.

재능 하나는 확실히 비범한 여자였다. 지금의 저 간질거리는 눈웃음 뒤에도, 수많은 전략과 경우의 수들이 오가고 있겠지.

“일단 아직까지는 세력을 모으는 중인지, 악마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고 해. 어쨌든 머지않아 댈런 당신에게도 왕실 특무대의 이름으로 의뢰가 들어갈 예정이라더라. 다만···.”

“가겠소.”

“···어?”

“어는 무슨 어요. 그쪽도 내가 갈 거라고 생각했으니 여기로 부른 것 아니었소?”

특무대의 의뢰라면 사실상 차르국 왕실이 직접 의뢰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

그럼에도 만약 그뿐이었다면, 시에나는 굳이 댈런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댈런이 그녀를 통해 수행해온 의뢰만 두 자릿수에 달한다.

영민한 정보상이 고객의 행동 양식을 분석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댈런에게 의뢰를 맡기고자, 혹은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자 하는 요청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을 터.

그 모든 걸 쳐내고 굳이 하나만을 댈런에게 먼저 전달해준 이유가 무엇일까.

“그쪽이랑 일을 시작한 지도 반 년이 훌쩍 넘었지. 그동안 악마와 엮인 것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이 의뢰만을 나에게 전해준다는 건, 내가 다른 의뢰들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 아니오?”

“···맞아.”

얕은 한숨과 함께 돌아온 답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나의 어조는 댈런이 의뢰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무적인 어조 속에 숨겨진, 희석되고 희석된 미묘한 불안감.

댈런은 그걸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죽을까 봐 겁나시오?”

“······.”

침묵은 긍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은 아니다.

그간 쌓여온 마음의 빚에 더불어, 미궁의 일 이후로 시에나는 그를 친구라고 확신하는 듯했으니까.

자기 사람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게 그녀의 성정이다. 그렇기에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지는 의뢰 요청들 중, 고르고 골라서 댈런이 선호할 만한 의뢰를 골라낸 것이겠지.

허나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해서 위험 속에 몸을 던지는 댈런의 행보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걱정 마시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마녀의 머리를 헝클어준다.

숱한 싸움 속에서 벌써 몇 번째나 사선을 넘어왔지만, 다음 출발선에 발을 디디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수락하겠다고 이야기해주시오. 세계의 이빨 산맥을 경유해서 갈 예정이니, 조금 늦을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여주고.”

“세계의 이빨 산맥? 하이 오크들의 땅에는 왜?”

“회수해야 할 게 있거든.”

“······?”

의미 모를 답변에 시에나가 고개를 기울인다. 헝클어진 머리로 그런 표정을 지으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엿보였다.

“아무리 저쪽에게 선공권이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소.”

지난 2주간, 댈런이 아무 생각 없이 시체 회수만 하고 다닌 건 아니었다.

칼카스의 지옥을 깨부수고, 고대의 마녀를 떨어뜨리며 얻어낸 가능성은 그로 하여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얻어낸 고유 스킬이 벌써 열 개에 가까웠다.

기존의 심상들을 비틀어 나만의 가능성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 역시 꽤 익숙해진 상태.

완력 하나만 믿던 근육덩어리 용병 시절을 벗어나, 반 년 남짓한 시간 만에 여기까지 도달했다.

앞으로 필요한 건 더 많은 심상의 근원들을 흡수해, 그로부터 뻗어져나가는 가능성을 다각화하는 것.

‘이미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스킬을 습득해가고 있지만, 악신과의 전면전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익힌 것의 몇 배는 더 필요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비급과 주문학의 개론을 탐독하고, 경매장을 이용해 더 높은 깨달음의 원천을 얻고자 하는 건 그런 이유였다.

허나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수단들.

그 무엇보다 빠르고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스킬들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가장 강력한 캐릭터들의 시체. 그것들 중 몇몇은 슬슬 회수할 수 있을 것 같군.’

불과 번개를 흩뿌리는 전사.

용갑과 용골 무기로 온몸을 둘러싼 용살자.

일격에 언덕을 무너뜨릴 수 있던 무투가.

악마의 면전에서 몰살당한 대군을 부활시켰던 성자.

그밖에도 클리어에 그 어느 때보다 근접했던 몇몇 회차들의 유산이야말로, 댈런의 다음 목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종말의 다음 활동지가 북쪽으로 정해졌으니, 북쪽 지방에서 지금의 내 역량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시체를 함께 얻어낸다.’

처음으로 후반부까지 살아남아, 악신의 대대적인 침공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던 회차의 시체.

세계의 이빨 산맥에 잠들어있을 엔딩을 회수할 시간이었다.

[북쪽으로 간다라. 마침 좋은 소식이군.]

그때 문이 열리며 버번이 들어왔다.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뒷골목에 암약한 진룡인 그는, 서부 지구에서의 전투 이후 시에나에게 정체를 드러냈다.

[안 그래도 다음 목적지는 추운 지역으로 선택하길 권하려 했다. 세계의 이빨 산맥이라면 나쁘지 않겠···.]

“버번. 카운터는?”

[···의체 하나를 임시로 만들었다. 눈치챌 강자는 없으니 걱정 말아라.]

“요즘 자꾸 마법으로 때우는데, 매출 떨어지면 알아서 메꿀 거라 믿어. 위장 취업한 고룡씩이나 되시는데, 본가에 돈도 많을 거잖아?”

[······그러지. 누굴 닮아서 그리도 매서운지, 원.]

더불어 한동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는 노룡의 걱정이 무색하게, 시에나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입장을 철저하게 지켜내고 있었고.

역시 영웅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어찌 됐건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충분히 성장해서 다행이구나. 나오거라, 꼬마.]

버번이 말을 맺자마자, 그의 등 뒤에 숨어있던 기척이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모습을 드러낸 건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

그러나 어깨를 덮은 청백색의 화려한 머리칼과,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동자는 소년의 정체가 인간이 아님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이 창백한 피부와 상반되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제 이름은 아샤카 리울라크, 다섯 번째 청린이자, 추방당한 용신의 좌완 갑주입니다. 직접 인사하게 되어 기쁩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전사여.”

“······.”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살해한 전대 청린 ‘테데라 리울라크’는 그저 생물학적인 모태일 뿐. 인간과 달리 진룡은 알에서 깨어난 순간 가장 처음 본 진룡을 부모로 삼습니다. 당신은 제 노쇠한 어머니보다 강하고, 앞으로 더 강해질 역량을 가진 존재죠. 그러므로 전 당신이 제 부모임이 기쁩니다.”

소년이 방긋 웃었다.

정말로 순수한 아이의 미소였다.

“그,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어렵사리 입을 뗀 시에나와 달리, 댈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뒷덜미를 긁적였다.

[살다살다 용새끼가 희대의 패륜아라는 걸 알게 되다니. 이런 기억은 그냥 악신의 솥구덩이에서 잊어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는 생각했다.

살다살다 악마 새끼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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