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마을(1)
댈런이 의뢰 이야기를 들은 날에서부터, 차르국 특무대로부터 의뢰가 정식으로 들어오기까지 일주일이 더 걸렸다.
특무대를 통해 시에나가 새롭게 구축한 정보망이, 그만큼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함께 가지 못해. 나는 여기 남아서 까마귀 둥지를 확장할 생각이야.”
까마귀 둥지에서 정식으로 의뢰를 수령한 날.
사무실 안에 흩날리는 수많은 깃털 사이에서 시에나는 그렇게 말했다.
“마녀의 능력이 정보 전달에도 획기적인 수단이라는 걸 이번 일로 확인할 수 있었어. 당신이 돌아왔을 때쯤이면, 까마귀 둥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단체가 되어있을 거야.”
깃털의 마녀가 가진 권능을 조직을 키우는 데에 활용할 심산인가. 까마귀 둥지의 주인다운 발상이었다.
원래라면 시에나가 마녀의 힘을 되찾는 건 아무리 빨라도 몇 년이 흐른 뒤.
그 어느 회차들보다 빠르게 권능을 회복함으로써, 그녀가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정보망을 갖추게 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행운을 빌게. 잘 다녀와.”
시에나는 간드러진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댈런은 사흘 뒤 도시를 떠났다.
에버론에게 중독자 사태의 보수를 받고, 미스릴 제련소에서 새 창과 갑옷을 장만한 그는 도시를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차르국 남동부의 도시, 발틴그라드를 목적지로 하는 기나긴 상단의 행렬.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상회 중 하나는, 백금패의 용병을 호화로운 사두마차까지 대령해가며 맞이했다.
쏴아아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백 명이 훌쩍 넘는 긴 행렬이 출발한다.
댈런은 유리창 너머로 멀어져가는 라이칸트 강의 정경을 바라봤다.
상단 행렬의 소란스러움과 빗방울이 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널찍한 마차 내부의 적막함은 묘한 합주를 이루고 있었다.
“올해는 유독 비가 많이 오는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이 정적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날씨가 계속 습하면 화약이 젖을 텐데···안 되겠어. 물속에서도 타오르는 화약을 만들어야겠군.”
“차르국도 좋아할 거요. 대부분의 지역이 겨울에는 눈보라에, 봄과 여름에는 시도때도없이 부슬비가 내리는 곳이니까.”
“그렇겠지. 자네에게 빚을 많이 졌네. 차르국 왕실에서 적법하게 화약의 재료를 구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라니.”
비요른이 수염을 씰룩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궁에서 특무대의 길잡이가 되어준 의뢰의 보수로, 댈런은 외눈의 명공과 차르국 사이의 합법적인 화약 공급을 요구했다.
한 개인이 내걸기에는 얼핏 무리해보일 수 있는 보수.
그러나 원혼의 밤 사태로 한 방 먹은 차르국 왕실의 입장에서, 그 원흉인 칼카스를 소멸시킨 댈런의 존재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비요른은 기밀에 부쳐졌던 원재료와 기술을 공급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차르국 왕실과 협업으로 연구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지금껏 열악한 상황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뽑아낸 장인이, 국가 규모의 후원을 받았을 때 만들어낼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겠지.
동시에 댈런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지게 된 비요른은, 훗날 있을 악신과의 전쟁에서 그 누구보다 그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 테였다.
“그나저나 갈리오스 상단주가 없는 게 아쉽군. 재미있는 친구였는데.”
“바쁘다고 들었소.”
“맞네. 유리 공방을 시작으로 예술품 사업까지 발을 뻗으려 한다던가. 내가 자네와 함께 북쪽으로 간다고 하니, 어쩌면 엘가이아 마탑주와 마주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
엘가이아 마탑주, 펠버 발렌티노.
본디 마탑의 원로 마법사였던 그가 마탑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은 댈런도 얼마 전에 전해 들은 바였다.
댈런의 권속이 되어 새 육신을 받았음에도, 스스로 빚어낸 대영역의 역량을 감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방도를 찾고 있는 노년의 대지술사.
그가 마탑을 떠나 방랑한 지도 벌써 한참이 지났다.
마탑의 입장에서는 대영역을 이룬 마법사를 이대로 놓치는 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겠지.
그래서 반 년째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원로 마법사를, 명목상으로나마 마탑주의 자리에 앉힌 것일 테였다.
물론 그 정도로는 육체의 격을 끌어올리고자 떠도는 그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겠지만.
“노인장이 북부로 갔소?”
“갈리오스 상단주가 좋은 의원을 추천하긴 한 모양이네. 르비바흐의 약초술로 활력을 많이 얻고서, 이제는 공기가 맑은 북쪽 산지를 다니며 요양을 할 생각이라더군.”
난쟁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상단주는 다들 북쪽으로 가는 게 유행이냐고 하던데. 얼마 전에 보급품 품목들을 계약한 성기사단도 북쪽으로 점점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는 중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군.”
성기사단이라.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댈런은 창턱에 턱을 괸 채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그때 곁에서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 뵐 수 있는 겁니까?”
“···어머니라니. 무슨 소리냐?”
대답이 늦은 건 얼마 전에 들은 충격적인 발언 때문이겠지.
댈런은 슬쩍 눈길만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주문으로 머리칼과 눈동자를 검게 물들인 소년, 청린용 아카샤는 순수한 기대감으로 표정을 물들인 채 말했다.
“아,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닌 관계적인 어머니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황금빛 머리칼에 청옥 같은 눈동자를 가지신 성기사님, 신의 은총과 고강한 잠재력을 품으신 그 분이 제 어머니 아니십니까?”
“···잠이나 자라.”
“전투나 과격한 실험으로 인해 극심한 피로가 쌓인 게 아니라면, 진룡에게 불필요한 수면은 존재의 낭비입니다. 저는 세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마법체계를 완성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여전히 순전한 표정으로 읊어대는 말.
대체 어른 앞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저 말버릇은 어디서 배워먹은 걸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에, 댈런은 손을 휘휘 저으며 논지를 뭉겠다.
“그래. 그러면 창밖이나 구경해라.”
“합당한 조언이군요. 역시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소년. 댈런은 오랜만에 미간이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가 좋은 아버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좋은 아버지라도 저런 아들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되뇌면서.
다시금 찾아온 나른한 정적 속.
덜컹거리는 마차는 라이칸트 강 일대를 완전히 벗어나, 추운 북부로 접어들어갔다.
***
종말이 다가올수록 대륙의 마물은 들끓는다.
일행이 몸을 실은 상행 역시 습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들은 도적 무리와 오크, 고블린, 어중이떠중이 사령술사들과의 전투를 매일 같이 치러야 했다.
물론 상단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해주지는 않았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회 소속의 상단인 만큼, 이럴 때를 대비해 거금을 들여 육성한 사병들까지 대동했으니까.
다만 두세 번쯤 위험한 순간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고, 일행은 그럴 때마다 나서서 싸움을 순식간에 마무리 짓곤 했다.
그렇게 상행이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감사합니다, 용병 어르신!”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고 그 무용담을 전하겠습니다!”
백금패 용병과 그 동료 난쟁이는 상행 내에서 영웅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저희는 넉넉하게 한 달쯤 머무르며 시장을 살피다 내려갈 예정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머무시는 동안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의뢰비를 두 배로 인상해드릴 테니···.”
“마음은 고맙지만, 출발할 때 말했듯이 일정이 있소. 기회가 닿으면 언젠가 다시 보도록 하지.”
상단주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한 뒤, 도시에서 말을 빌린 일행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의 이빨 산맥은 대륙의 북동쪽 끝자락, 서리고원 너머의 척박한 동토에서부터 뻗어 내려오는 기나긴 산맥.
동쪽으로 향한 지 보름쯤 지나자, 끊임없이 부슬거리던 빗줄기가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그렇게 축축한 눈보라를 뚫고 며칠을 더 갔을까.
안개 너머로 저 멀리 엿보이는 민간의 불빛에, 드워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푸흐. 드디어 마을이 보이는군. 오늘은 저기서 푹 쉬고 출발하도록 하세.”
“드워프는 추위에 강하다고 하지 않았소?”
“이 사람아, 나는 불과 화약의 온기에 익숙한 장인일세. 추위에 약한 게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예민할 뿐이야.”
“······.”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거 아닌가.
수염에 하얗게 서리가 눌러붙은 난쟁이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뭣해서,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의 속도를 조금 올렸다.
추위와는 상관없는 몸뚱이가 된 지 오래였지만, 그 역시 야영지의 습한 잠자리보다는 여관의 푹신한 침대를 선호하는 건 사실이었으니.
안개를 뚫고 삼십 분쯤 말을 몰아가자 낡은 목책과 나무문이 그들을 반겼다. 댈런은 익숙하게 은화 한 닢을 문지기에게 쥐어 주었다.
“문제 일으키지 마시오.”
끼기기기···.
문이 열리며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일행은 무뚝뚝한 자경단 문지기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중심부에 으레 있는 여관을 찾아가던 댈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이상하군.”
공기는 사뭇 차가웠다.
사람의 온기가 존재함에도 감도는 기이한 냉랭함. 희미하게 육감을 간질거리는 불쾌한 위기감.
지나치는 행인들의 시선에서는 경계심 이상의 이글거림이 섞여 있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마저도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를 더욱 신경 쓰이게 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권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겠지.
“분노가 가득하군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기이한 느낌을 받은 건 댈런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상합니다. 인간들이 낯선 이에게 경계가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지금껏 지나왔던 마을들에 비해서 정도가 많이 심하군요.”
검은 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댈런과는 달리 불쾌하다기보다 그저 순수한 의문에 가까웠다.
타고나길 불멸하는 존재이기에 느껴지는 감흥 역시 다를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이 마을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이었다.
“흐음···어떻게 할 텐가?”
이쯤 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비요른이 품속을 자연스럽게 더듬으며 물었다.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피하는 게 상책일까. 부딪히는 게 더 나은 수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선 여관부터 찾지.”
***
일단 방부터 잡고 진상을 파헤치려던 댈런의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초장부터 꼬여버렸다.
“안 받네.”
산적처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여관 주인이, 대뜸 손바닥을 내밀며 그들을 거절한 것이다.
“뭐, 뭐요? 왜 안 받는다는 건지 이유라도 말해 보시오!”
“외지인은 안 받네. 금화를 줘도 소용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가.”
“아니 무슨 그런 논리가 있소! 이 고블린 코딱지만 한 마을에 다른 여관이 어디 있다고!”
비요른이 하얗게 얼어붙은 수염을 흔들어대며 항변했지만, 여관 주인의 표정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선택의 시간이었다.
과연 저 산적수염의 심지는 얼마나 굳셀지, 금화 무더기를 들이밀어 확인해보느냐.
아니면 더 이상의 분란을 조장하지 않고, 조용히 이 마을을 떠나 갈 길을 가느냐.
‘혹은···.’
자연스레 허리춤으로 내려가는 손을 내버려두는 것도,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이 마을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법들 중 하나겠지.
“어이! 이쪽이네!”
그때 누군가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반가움이 가득 담긴 외침. 반면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댈런을 거칠게 끌어안으며 웃어젖혔다.
“거 형님을 찾아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아,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본 건가? 핫하하! 내가 수염도 기르고 좀 많이 변하긴 했네! 사실 나도 자네 몰라볼 뻔했어! 으하하하!”
“······.”
어색함 한 점 없이 등을 두드리는 손. 두툼한 살집 속에 숨겨진 단련된 전사의 근육.
“······.”
동시에 댈런의 예민한 감각만이 간파할 수 있는, 못다 지워낸 일말의 어색함까지.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댈런은 남자를 장난스레 밀쳐내고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에 수염은 왜 기른 거요? 살은 또 어쩌다 그렇게 붙었고.”
“크하하하! 이놈 이거 성격 안 변했네! 주인장, 저번에 말한 내 어릴 적 친구 기억하시오? 이쪽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오!”
남자의 소개를 들은 여관 주인의 표정이, 놀람을 거쳐 미약한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댈런은 남자의 호들갑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낮게 웃었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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