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51화 (151/288)

타오르는 마을(2)

“아들도 많이 컸구만! 욘석아, 삼촌 기억나냐?”

“기억 날 리가 없지. 완전 갓난아기일 때가 마지막이지 않소.”

“크흐흐, 그렇겠구만. 주인장! 여기 늘 먹던 걸로 3인분 더 주시오.”

남자는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려대고는, 자연스럽게 아카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남자의 정체를 짐작한 댈런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들도 보조를 맞추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난쟁이야 백 년이 넘도록 나름 이런저런 사건들로 잔뼈 굵은 베테랑이었고, 새끼용은 상황을 판단하는 지성 자체가 남달랐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애드립에 가까운 연기를 오래 끌 필요는 없었다.

“빵과 사슴고기 스튜요.”

여관 주인이 술과 음식을 내오고 얼마 있지 않아, 테이블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마력이 움직인 것이다.

스으으으···.

남자의 품속에서 새어 나와 테이블 주변을 둘러싸는 옅은 마력의 흐름.

기척 왜곡과 소리 차단, 환상 계열 술식들이 교묘하게 몇 겹으로 덮어씌워져 주변의 시선을 완벽하게 속여낸다.

외부에서 봤을 때 그들은 여전히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푸는 중인 고향 친구로 보이겠지.

그러나 술식 너머의 진짜 테이블 위에는, 방금까지의 쓸데없는 잡담이 잦아든 채 미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자, 이제 됐습니다.”

“굉장히 정교한 주문이군.”

댈런은 주변을 둘러보며 솔직하게 감탄했다.

같은 환상 계열 술식이라 하더라도, 특정 대상을 혼란시키는 것과 다수에게 동일한 장면을 꾸며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난이도다.

테이블을 둘러싼 술식들은 그걸 어색함 없이 해낸 것도 모자라, 은밀함까지 동시에 겸비한 수준급의 주문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술사가 아니라면 이를 간파하기는커녕, 뭔가 이상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겠지.

댈런의 칭찬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제 능력은 아닙니다. 마도구 덕이죠.”

“확실히 차르국 왕실이 특무대에 신경을 쓰긴 하나 보군. 이런 변방의 마을에 파견 나온 요원까지 그런 마도구를 들고 있을 정도라면.”

“···역시. 눈치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짚어내는 댈런의 말에, 남자가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의 신분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머나먼 북부의 변방에서, 연기를 해 가면서까지 댈런과 일행을 도와주려는 이가 과연 누가 있을까.

마을 주민들 사이로 자연스레 녹아든 듯한 행동과, 지방 속에 숨겨진 단단한 훈련의 흔적들 사이의 모순은 심증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더불어 본인의 능력 이상으로 강력한 환상 계열 마도구를 소지했다는 건, 그만큼 거대한 조직에게 잠입과 첩보활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런 변방 마을에까지 그만한 자원을 아끼지 않을 조직은 하나뿐이다.

‘이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 차르국 왕실.’

“차르국 특무대 수석요원, 크레이그 비드로프라고 합니다. 댈런 님께서 미궁에서 특무대를 도와, 간악한 반역도들과 놈들이 추종하던 악마를 쓰러뜨리신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반갑소.”

“왕실의 의뢰를 수락하시고 북부 전선을 향해 떠나셨다고 들었는데, 이 구석진 마을까지는 어쩌다가 오신 겁니까?”

남자가 스튜를 퍼먹으며 무심하게 질문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행보와 목적지를 유도해내려는 질문.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의뢰서에 언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말은 없더군. 기왕 올라온 거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는 중이었소.”

“···그렇군요. 관광이 목적이시라면 인구가 많은 서부 쪽을 추천드립니다. 이쪽으로 계속 가시면 춥고 척박한 땅과 세계의 이빨 산맥에 없으니까요.”

“추위는 잘 안 타서. 사람 많은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배려는 고맙소.”

“하하, 특무대의 은인이신데 이 정도야···.”

“그런데 말이오.”

톡. 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남자가 입을 열기 전에 역으로 의문을 던진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군. 어쩌면 그쪽의 진짜 의도는 나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왕실에 고용된 내게 감추고 싶은 광경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원혼의 밤 사태로 피해를 본 지방의 민심이 아직까지도 수습되지 않은 것이라던가. 아니면 자멸했다고 알려진 차르국 반란군이, 사실은 아직까지 이런 변두리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지도 모르겠군.”

여전히 나뭇결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손끝.

댈런은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사람이 드문드문 들어찬 여관 안을 둘러봤다.

의도된 행동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기 마을 사람들이 꽤나 불만이 많아 보이더군.”

이상할 정도로 외지인을 배척하던 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로 들끓는 감정들.

아무리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정상은 아니다.

댈런은 그걸 지적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실에서 그를 정말로 신경 써서 고용할 생각이라면, 이런 치부들을 알량하게 숨길 생각 말고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정곡을 찔렸군요. 댈런 님의 말이 맞습니다.”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숙였다.

“원혼의 밤 사태 이후, 주로 피해를 본 차르국 남동부의 마을과 도시들은 왕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죠. 반란군이 내분으로 갈기갈기 찢어졌음에도, 여전히 그 잔당 중 일부는 살아서 변방 지역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한숨과 함께 이마와 눈가에 깊은 주름이 일그러진다.

쾌활하게 웃어젖히던 조금 전에 비해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요원의 얼굴이었다.

“이 마을도 놈들의 손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장로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는군요. 저도 며칠 내로 임무를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힘없는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당신 같은 영웅이 이런 곳에서 발목 잡혀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십시오.”

***

“준비는 끝났나?”

달이 밝은 밤. 눈발이 잦아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내가 말했다.

곁에서 수정구를 지켜보던 주술사가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건물 지하실마다 폭약이 매설되었고, 여관과 마을 회관에는 특별히 두 배를 더 묻어두었습니다. 장로는 오늘 밤 회관에서 업무 처리를 위해 밤을 샐 예정이라고 하니, 거사를 치르기에 알맞은 날이군요.”

“신이 우리를 도우시는 거지.”

펄럭.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디찬 북풍에 흑마법사 특유의 단색조 로브가 흩날렸다. 반면 그 로브 안의 몸뚱이는, 일반적으로 흑마법사라 하면 연상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났다.

사슬갑옷 너머로 비치는 돌덩이 같이 각진 근육들. 2미터에 가까운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유일하게 맨살이 보이는 목덜미와 얼굴은 온통 흉터로 가득했다.

일곱 왕관의 수호단. 그중에도 첫째 왕자를 따르는 파벌의 원로는, 잘 길러서 묶은 회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외지인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 여관에서 방을 잡고 쉬는 중이라고 합니다.”

“관문을 걸어 잠그는 건 티가 나니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쉴 곳을 찾지는 못하게 하라고 했을 텐데.”

“크레이그의 고향 친구라 하더군요. 크레이그가 워낙 인망이 좋은 남자라, 여관 주인도 뭐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수상한 구석이 많은 놈이었어. 이로써 그놈이 차리나의 끄나풀인 게 확실해졌군.”

뚜두둑.

원로가 어깨를 풀었다. 그는 발치에 꽂혀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잘난 인망이라도 신의 은총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법이지. 놈은 자신이 신뢰하던 주민들의 손에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다.”

“화약과 의식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이곳은 신의 성지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주술사가 실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원로는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야트막한 언덕 위의 마을을 바라봤다.

오후까지 불어오던 눈보라는 어느새 말끔하게 걷히고, 맑은 하늘에는 달과 별이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밤이면 하늘로 뻗어나가는 불길도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겠지.

원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마을을 가리켰다.

“마을을 불태워라. 차리나의 끄나풀과 외지인을 포함해,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죽여라. 우리에게 협력하는 이들은 약속대로 은총을 받을 것이고, 저항하는 마음을 품은 이들은 제 이웃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리라.”

원로의 명령에, 주술사가 수정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집행해라.”

화악―

시작은 섬광.

뒤이어 불꽃.

마을 곳곳에서 거대한 화염 기둥이 치솟고, 폭발음이 반 박자 늦게 불어닥쳤다.

꽈과과광···!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굉음이었다. 두려움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쑴의 신도들도 흠칫거리며 물러설 정도였다.

“아주···마음에 드는군.”

원로가 수염을 씰룩거렸다.

발밑을 타고 올라오는 저릿함. 눈앞을 가득 메우는 화염과 연기.

쑴의 은총을 받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살육을 벌이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다.

원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욕구를 억누르며 명령을 이어갔다.

“우리가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최대한 남기지 않는다. 미리 이야기했듯 수정구를 통해 포섭한 마을 주민들을 지휘해라. 마을 장로와 차리나의 끄나풀, 그리고 외지인은 처리되는 대로 보고하도록.”

“안 그래도 지금 여관과 마을 회관에 인원을 돌입시켰습니다. 은총을 받은 이들이니 손쉽게 처리할 겁니다.”

“좋다.”

원로가 나직하게 웃었다.

삼왕자와 오왕자를 따르는 파벌의 계획이 처참하게 실패한 뒤, 지난 두 달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자칭 온건파라는 놈들과 내전에 가까운 세력다툼을 벌인 끝에야, 간신히 남은 전력을 추스를 수 있었다.

허나 고생 끝에 복이 온다는 말처럼, 그는 결국 다시 일어섰다.

짧은 시간에 십수 개의 마을을 포섭했고, 지금 그의 등 뒤에 도열한 사백 명의 정예병을 모을 수 있었다.

쑴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정예병들은, 일반적인 병사 열에 달하는 힘을 낼 수 있는 존재.

이들과 함께라면 다른 겁쟁이들이 해내지 못한 위업을, 마침내 달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북방 전선에 몰려있던 철혈군대가 사태를 눈치챌 즈음, 이미 차리나는 영토의 삼분의 일을 잃은 뒤일 테였으니까.

“놈들의 사망은 확인했나?”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소식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쩌면 폭발만으로도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수도···.”

그때 주술사가 헙 하고 말을 삼켰다. 그의 희뿌연 눈동자가 수정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이, 이것 좀 들어보십시오.”

원로가 불편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자, 주술사가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카터? 카터! 어디갔···커헉!]

[콰과광! 콰광!]

[조심해! 불발한 화약이 있다! 아, 아니야. 불발이 아니라 놈들이 설치한 함저···!]

[우두둑! 콰직!]

수정구 너머의 교신이 증폭되어 들려온다.

연이어 겹치는 비명과 파육음. 폭발과 뼈가 으깨지는 소리들.

소음의 향연은 오래지 않아 멎었다. 그리고 잠깐의 잡음 뒤, 낮고 굵은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울려퍼졌다.

[치직···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원로의 표정이 굳었다.

주술사에게 수정구를 들려놓은 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냐.”

[맞나 보군. 잠시만 기다려 봐라. 방향이랑 거리가 대충······.]

“오늘 도착했다는 외지인들인가. 목숨이 아깝다면 그쯤 하고 물러나라. 더 이상의 방해는 용서치 않겠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술사가 멍하게 들어올린 수정구 너머, 전해지는 건 한없는 적막뿐.

[휘리―]

그 적막을 뚫고 뭔가 던져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쐐애―!

다음 순간 기묘한 파공음이 수정구의 코앞에서 공기를 찢었다.

쨍강― 콰직!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확히 반으로 갈린 수정구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그 뒤에 있던 주술사가 머리통에 도끼를 꽂고 넘어간다.

우우웅···.

두개골을 쪼갰음에도 웅웅거리며 떨리는 손도끼.

손잡이와 도끼날에 새겨진 룬 문자.

기묘한 떨림으로부터 퍼져나오는 금빛 파장을 본 원로가, 경악에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라! 유물 무기···!”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콰과과과과―!

손도끼에서 황금빛 폭발이 터져나오며, 원로와 그의 뒤에 도열한 정예병을 덮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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