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살해자(1)
위태롭게 버티던 건물들이 거리를 향해 와르르 무너진다.
밀려오는 잔해와 치솟는 불길 한가운데, 1왕자파의 원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왼팔이 잘려나간 고통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재생력이라면 적당한 재생 포션 한 병으로 없는 팔도 자라나게 할 수 있었다.
그보다는 이 도끼를 날린 장본인. 그 정체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
‘크레이그의 지인이라더니.’
완전히 속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알아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북방 야만인 같은 근육질의 거체.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은 분명 그 전사의 인상착의와 동일했다.
거기다 허리춤의 성검과 손도끼를 날리는 전투 방식까지.
놈은 분명히 그 전사였다.
3왕자파와 5왕자파의 원로를 죽이고, 칼카스 소환의 대계를 망가뜨린 소문의 장본인.
‘백금패 용병 댈런.’
슈화아악―!
상념을 뚫고 난데없는 돌풍이 불어닥친다. 연기와 불꽃이 단숨에 날아가며 탁 트인 시야. 그 너머에서 잿빛 창이 찔러들어왔다.
카아앙!
원로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걷어냈다. 정면으로 막은 게 아니라, 창날을 쳐 튕겨냈음에도 손아귀가 저릿했다.
“무슨, 힘이···!”
혈통 때문에 태생적으로 힘이 강한 그였다. 거기에 악신의 힘을 받아 신체능력 전반이 향상되었다.
일반적인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육체는, 2미터에 가까운 거검을 한 손으로 무리 없이 휘두를 정도.
그런 그가 근력에서 확연하게 밀렸다.
간을 보기 위한 찌르기였는지, 창끝을 회수한 남자가 눈썹을 슬쩍 들고 물었다.
“잘 버티는데. 원로급인가?”
“1왕자파의 원로, 파파샤 카리모프다.”
“잘 기억나지 않는군. 내가 모든 NPC들 얼굴이랑 이름을 외우고 다닌 건 아니어서.”
의미를 모를 단어를 섞어가며 하는 말.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들어올린 그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콰가가각!
눈 깜빡할 사이에 몇 번이고 부딪히며 얽히는 창과 대검.
대담하게 베어들어가고, 어긋맞춰 튕겨내며, 현란한 견제와 속임을 섞은 끝에 서로의 목줄을 노린다.
실력의 격차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무슨···신체능력이···!”
창술 자체의 숙련도는 높지 못하다. 익힌 지 얼마 안 된 게 눈에 보일 정도.
허나 사내의 힘과 빠르기, 기량과 감각은 그 모든 걸 찍어누르고도 남았다.
단순히 기존의 창술을 소화하고 모방해내는 걸 넘어서서, 원본 이상의 것을 빚어낼 조짐까지 보일 정도로.
콰아아앙!
창대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원로가 붕 떠서 날아갔다.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고 몸을 뒤집어, 마치 야수처럼 두 손과 두 발로 내려앉았다.
“커헉···!”
거멓게 죽은 피가 울컥 치솟는다. 원로는 입가를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전사를 올려다봤다.
“단단하군. 쑴의 축복을 받기 이전에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겠어. 균형을 잃었을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자세나 짧게 몰아치는 검로를 보아하니···늑대인간인가?”
무감정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말. 그 내용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일까.
‘엿 같이 꼬였군.’
원로의 머릿속에 턱을 긁적이는 눈앞의 사내에 대한 정보가 줄줄이 스쳐지나갔다.
전 대륙을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은 백금패 용병. 허나 그 뒤에 감춰진 위명은 단순한 용병의 신분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악마들을 죽이고 성기사단의 반란을 막았으며, 마녀를 처단하고 진룡의 목을 떨어뜨렸다.
성기사단과 차르국 특무대에게 은인으로 대접받음은 물론, 금강궁과도 물밑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역을 이룬지 몇 달 안 되어 3위계의 벽을 넘어섰다던가. 일신의 능력은 이미 4위계 초입을 벗어났다는 이야기까지도 돌았다.
‘이길 수 있을까.’
사내의 여유로 만들어진 짧은 순간. 원로는 자문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벌써 붙을 정도의 재생력에, 늑대인간의 형태로 변하면 지금보다 반 배는 더 강해지는 신체능력.
차리나의 직속 호위대에게도 밀리지 않을 검술과 4위계에 닿은 지 오래인 심상.
어지간한 하급 악마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건만, 눈앞의 사내 앞에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로는 맹세를 떠올렸다.
에클라힘 궁전에서 쫓겨난 1왕자. 본디 정당한 왕홀의 주인으로 왕좌에 앉아야 할 존재.
그를 지키기 위해 원로는 모든 걸 다 바치기로 맹세했다. 자신의 몸과 영혼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차르국 백성의 절반이라도.
‘설령 내 영혼이 지옥에 저당잡히고, 이 땅이 악마의 나라가 된다 하더라도, 온전한 왕위는 되찾아져야만 한다.’
뿌드득! 콰직!
결단과 동시에 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한다. 팔다리의 골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근육이 부풀어오르며 날카로운 털이 전신에 돋아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원로의 눈에서는 검붉은 불길이 귀화처럼 타올랐다.
‘이길 수 있다. 적어도 붙잡아두는 건 가능하다!’
아우우우―
일대를 포위한 정예병들에게 긴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내고, 늑대인간의 형태를 취한 원로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이질적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
“늑대인간이 맞군.”
검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늑대인간을 바라보며,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거의 3미터에 달하는 신장. 금속이나 다름없는 강도의 잿빛 털.
이 세계에 떨어진 지 3년이 다되어가지만, 제대로 된 늑대인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늑대이간 특유의 남성미 넘치는 자태는 모니터 너머에서 볼때마다 감탄하곤 했었지. 쓸데없는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댈런의 두뇌는 자연스레 상대에게 적절한 수십 가지 전략을 구상해냈다.
자연스레 심상을 이끌어내면서 창을 뻗어낸다. 증폭된 놈의 힘을 재단해보는 게 첫걸음이었다.
콰아앙!
검과 창이 부딪힌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격돌이었다.
댈런이 힘으로 찍어누르고 원로가 기교로 흘려내던 형태에서, 이제는 얼핏 비등한 충격력을 교환하며 서로를 짓누른다.
‘늑대인간의 힘. 거기에 악신에게 영혼을 팔아넘겼나. 쑴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육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지.’
증폭된 건 근력만이 아니었다. 재생력과 민첩함, 반응속도, 감각 모두 방금 전보다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특히나 재생력은 용혈 그 자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일부 인자만을 가졌던 과거의 댈런을 상회하는 수준.
촤작! 콰득!
가죽이 찢기고 뼈가 어긋나는 것 정도는 금방 수복해버리고, 손도끼의 폭발에 잘려나간 왼팔마저 손쉽게 재생해낸다.
“크아아! 너는! 왕홀의 주인을! 막을 수! 없다!”
놈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포효에 주변 공간이 눈에 띄게 일렁였다.
댈런과 늑대인간을 가둬 격리시키듯,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자리잡은 것.
무슨 현상인지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악신에게 영혼을 바치며 얻은 힘으로 말미암아, 놈이 불완전하게나마 영역을 개방한 것이었다.
「영역 개방 : 뒤틀린 충성심의 마지막 결투」
구우웅―
넓은 거리가 놈의 영역권 안에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화염 화살을 뽑아내 쏘아봤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며 소멸됐다.
힘과 힘의 충돌이라기보다, 개념적으로 공간 자체가 격리된 듯한 현상.
그 모습을 지켜보던 늑대인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크르르, 내 영역이 담은 심상은 숙적과의 결투! 너는! 나와만 싸운다!”
놈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괴하게 뒤틀린 병사들이 골목에서 튀어나와 회관을 둘러쌌다.
반쯤 일체화된 듯한 갑주를 몸에 두르고, 두꺼운 뿔이며 단단한 껍질들이 몸 곳곳에 돋아난 병사들.
톱날 달린 무기들을 꼬나쥔 놈들은, 비요른과 아카샤를 포함해 서른쯤 되는 생존자들을 포위망에 가두고 좁혀들어갔다.
거기다 놈들 사이사이에 흑마법사도 몇 섞여있는지, 지옥문이 열리고 거대 마물들이 공간의 틈을 비집고 기어나왔다.
아무리 비요른과 아카샤라도 생존자들을 전부 지켜내는 동시에 삼백이 넘는 괴인에 마물까지 상대하는 건 힘든 일.
늑대인간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네 동료와 더러운 차리나의 끄나풀들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길쭉한 입을 벌려 킬킬거리는 말에 답해줄 이유는 없다.
대런은 창대에서 왼손을 잠시 물려 허공에 수인을 맺어낸다.
싸움의 대상을 한정짓는 개념의 영역은 물론 신박했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신박하다는 감상이 전부.
덩굴의 마녀나 천변만화의 얼굴,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가 개방했던 영역에 비해서 그 능력이나 범위 모두 형편없었다.
그만큼 편협한 심상이었고, 얻어낼 자격이 없는 힘이라는 이야기.
“널 죽이면 해결된다는 이야기군.”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어, 마력의 바람을 비틀어낸다.
「빙정(氷晶)」
시작은 언제나와 같은 얼음꽃.
허나 그 위에 새로운 술식을 얹는다.
「살아 움직이는 뿌리」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을 공부해 익힌 주문이 발아하고, 심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섞여들어간다.
「백향근(百向根)」
촤자자자자작―!
백색 결정의 뿌리가 순식간에 지면을 뒤덮는다.
넓은 거리를 채운 것도 모자라, 격리된 공간의 벽을 기어올라가는 뿌리 가닥들.
벽을 넘어 천장까지 가득 메우며, 거대한 돔 형태로 두 사람을 가둔 백색 감옥에 늑대인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장 위험한 적인 나를 격리한다는 판단은 좋았지만, 확신에 찬 판단일수록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원래라면 저 뒤에 있는 생존자들이 휘말릴 걸 염려해 사용하지 못했을 광역 마법.
허나 영역을 개방해 공간 자체를 단절시킨 이상, 그런 제약에 묶일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술식을 전개할 수 있다.
늑대인간은 뒤늦게 강적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 위해 펼쳐놓은 덫이, 도리어 스스로를 가두고 패배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분초를 다투는 싸움에서 그릇된 판단은 겉잡을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법.
“묶어라.”
영창도, 수인도 아닌 간단한 언령에 사방을 점한 뿌리가 춤추기 시작한다.
전후좌우는 물론 땅과 하늘에서까지 화살처럼 쏘아지는 백색 뿌리들.
“크아아아아아!”
늑대인간은 두 눈에 귀화를 일렁이며 저항했지만, 휘감아오는 뿌리를 떨쳐낼 때마다 전신에 상처가 누적되어간다.
가죽을 긁어대는 날카로운 결정. 피부 안쪽을 파고들어 몸을 굼뜨게 만드는 냉기.
끓어넘치는 힘에도 불구하고 정교하던 늑대인간의 검술이, 점차 마구 휘두르는 괴인의 그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륵―
그 사각을 파고드는 댈런의 신형.
창촉에 냉기를 싣고, 창대를 길게 빼내어 잡은 채.
늑대인간을 노리는 뿌리들 사이에서 휘어들어가듯 찌른다.
촤악―!
“크아아악!”
수십 갈래로 짓쳐오는 공격 사이, 위장된 일격을 구분해 반응하기란 불가능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쥘 틈도 없이, 늑대인간은 쉴새없는 공세에 다시금 거검을 휘둘러냈다.
푸욱!
배후에서 들어와 등을 꿰뚫는 다음 일격. 이번에도 막거나 피할 수 없었다.
댈런은 살아 움직이는 결정의 뿌리들 사이를 누비며 놈의 사각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몇 번의 공격을 허용하고 나자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주요 급소들에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늑대인간.
허나 온몸에 그런 걸 두를 수는 없었고, 도리어 굼떠진 몸은 더 많은 상처들을 허용한다.
쿵.
머지않아 걸레짝이나 다름없어진 늑대인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크륵, 그르르······.”
주체가 완벽하게 무력화되자 이내 스르르 녹아내리는 공간의 벽.
벽 위를 하얗게 수놓았던 뿌리들 역시 기댈 곳을 잃고 함께 무너졌다.
늑대인간은 탁 트인 시야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웃었다.
“크흐, 그래도···네 동료들은 이미 신의 축복을 받은 정예병과 마물들에게······.”
끌어올렸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놈의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
생존자들과 댈런의 일행을 마을 회관으로 몰아넣어 포위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무리 요새화된 회관이라도 기껏해야 변두리 마을 수준이기에, 거대 마물의 힘이라면 손쉽게 부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반쯤 마물이나 다름없어진 정예병들과 거대 마물들은 모두 회관이 아닌 반대편 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 위, 강렬하게 빛을 뿜어내는 수십 명의 성기사 무리를.
“마물들에게 뭐?”
댈런이 피식 웃었다. 그는 성기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가장 선두에 선 금발의 성기사가 그 손짓에 잠시 흠칫하는 듯했으나, 그녀는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검을 들어올렸다.
“형제들이여―”
신성력으로 증폭되어 마을을 쩌렁쩌렁 울리는 심문관의 목소리에, 마물들이 본능적으로 위축되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하고.
“눈앞의 악을 말살하라!”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명령과 함께, 성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에 지면이 울린다.
신성력의 빛도 함께 거세졌다.
마갑과 전신갑주로 중무장한 중기병대는, 그 질량과 속도만으로도 파괴적인 이 시대의 전략 병기.
거기에 강력한 신성력을 더해낸 성기사단의 돌격은, 모든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빛의 파도나 다름없었다.
캬악! 크에에에!
그워어억―
마을 회관을 포위하던 어둠이 쓸려나간다. 반란군과 마물들 모두 고깃덩이가 되어 말발굽 아래에 짓밟혔다.
눈앞에서 작전이 물거품이 된 걸 목도한 늑대인간이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내뱉고.
“크르륵, 아, 안 돼! 정당한 차르의···!”
“자기 백성을 쳐죽이면서 정당하긴 지랄.”
그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은빛 창이 놈의 목이 떨어뜨렸다.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