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살해자(2)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거리.
건물들을 집어삼키며 타오르던 불길이 주춤하는 가운데, 마을 회관 주변은 마물의 피와 살로 진창이 되어있었다.
댈런은 회관 안에서 투박한 나무잔을 기울이며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옅은 씁쓸함이 혀 위에서 맴돌다 목구멍으로 사라져간다.
이제는 생산할 수 없게 되어버린, 본디 이 마을의 특산품인 독주였다.
“순찰 결과 마을의 생존자는 총 마흔 네 명이었습니다. 부상자들은 포션과 신성력으로 치료해두었고, 회관 주변의 사악한 마력도 충분히 정화했으니 하룻밤 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꿀물로 목을 축인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 외딴 마을에 성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난 건 다름아닌 그녀였다.
변방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차리나가, 곧바로 성기사단에 지원 요청을 보낸 것.
‘머리를 잘 썼고, 상황까지 적절하게 들어맞았군.’
서리고원 너머에서 집결중인 악마들의 군대로 인해, 북쪽 전선에 집중된 군대를 뒤로 물리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을 파악한 차리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없다는 듯, 즉시 국고의 일부를 털어 성기사단에 헌금했다고 한다.
‘차르국의 보물과 성기사단 지부에 대한 세금 감면, 그리고 자유로운 군사 활동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 나라의 간악한 사교도들을 퇴치해주세요.’
헌금과 함께 들어온 그녀의 요청. 악마 토벌에 진심인 기사단이 이를 거부할 리는 만무했다.
때마침 성기사단 병력 일부가 도시연합 북부에서 악마 숭배자들을 토벌중이었고, 이들은 본단의 명령을 전해받은 즉시 북진했다.
“밤 사이에 대략 마을 건물의 8할 정도는 전소될 것 같습니다. 밤이 늦고 불길이 다 잦아들지도 않았으니, 일단 오늘은 다들 쉬게 하고 아침에 챙길 수 있는 물건들을 챙겨서 피난을 떠나게 할 예정입니다.”
“고생했소. 그쪽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댈런의 말에 루시아가 지친 웃음을 지어보였다.
충분히 힘들 법한 일정이었다. 듣자하니 도시연합 북부에서의 작전만 해도 몇 주나 이어져왔고, 그게 어느 정도 마무리되려는 차에 곧바로 이곳 차르국까지 원정을 온 것이었으니까.
무리한 이동과 전투, 거기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수색과 구조 작업까지.
아무리 신성문신의 힘을 입은 성기사들이라도,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이 마을 주민들을 돌보는 모습이야말로, 이들의 굳건한 사명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아닙니다. 댈런이 여기 계시지 않았다면,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생존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음에도 한 발 늦었군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야만인 용병보다 성기사단의 비호에 더 안심할 거요. 나도 누굴 간호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고.”
댈런이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독주를 벌컥이는 그 모습에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평안한 밤 되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회의실을 나서자, 방에 남은 건 두 사람이었다.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중인 특무대 요원 크레이그와, 그 앞에서 나무잔을 치우고 아예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댈런.
“후우, 정신을 붙잡아두기 힘든 하루군요.”
크레이그가 깃펜을 놓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댈런은 병나발을 불면서 그의 보고서를 슬쩍 곁눈질했다.
방금 전 루시아가 전달한 내용을 요약하고, 거기에 보고자의 소견과 차리나의 현명한 판단에 대한 찬사까지 덧붙인 내용.
“······.”
하수도 청소부였던 페니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안정성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공무원은 그와 맞지 않았다.
“그래도 평생 잊지 못할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용살자에 이어 악마 살해자까지 두 눈으로 보게 됐으니까요.”
“악마 살해자?”
병을 내려놓은 댈런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루시아가 저번에 낮은 거리에서 악마 하나를 잡긴 했었지만,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이 곧바로 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무대 같은 정보기관 요원이 이름 대신 이명을 주워섬길 정도는 더더욱 아닐 테고.
댈런의 반응을 눈치챈 요원이 의외라는 듯 질문했다.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없소.”
그냥 악마 살해자도 아니고 뭐가 더 주렁주렁 붙었군. 수준급의 영웅인 루시아에게 수많은 이명이 따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너무 급작스러운 면은 없잖아 있었다.
대체 어느 수준의 공을 세워야···.
“심문관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근 몇 주간 진행된 성기사단의 사교도 토벌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검증된 정보로만 다섯 마리가 넘는 악마를 퇴치했다고 합니다.”
“···다섯 마리?”
술병을 들어올리던 손이 멈칫한다. 입을 멍하게 벌린 그를 향해 크레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자료를 몇 번이나 대조했습니다. 그만한 악마와 흑마법사가 이 대륙에 숨어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걸 이 짧은 시간에 찾아내서 쓰러뜨렸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 아주 많이.”
댈런이 지금껏 처치한 악마의 수가 다섯이 채 안 되었다.
물론 용 역시 넓은 범주에서는 악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고, 마녀를 포함해 그가 쓰러뜨린 실력자들 중에도 악마에 필적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어찌됐건 고작 몇 주만에 다섯이나 되는 악마를 처치한 업적은, 기나긴 성기사단의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애당초 음지에 암약한 흑마법사들과 악마들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고난이도일 터.
수백 회차의 지식을 가진 댈런이라도, 여기저기 거점을 옮겨대는 흑마법사들을 일일이 추적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시도조차 안 하지 않았던가.
‘성기사단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설마 그 능력을 벌써 개발한 건가?’
루시아가 악마 살해자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많은 악마를 쓰러뜨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애초에 이름 날린 용병이라도 평생 한 번을 마주치기 어려운 존재가 악마.
세상이 개판이 되어가면서 악마의 활동이 급증하고 있긴 하나, 아직까지 대륙 중부는 비교적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암약하던 악마와 흑마법사들을 이만큼이나 빠르게 색출해냈다는 건, 그녀의 재능이 몇 년을 앞당겨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소리겠지.
‘그 능력을 개발했다면, 영역 역시 일궈냈을 게 분명하다.’
서부 지구의 싸움에서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었던 걸까.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고는 생각했는데, 루시아의 성장은 그의 예상을 몇 번이고 뛰어넘고 있었다.
‘펠버와 시에나에 이어···루시아까지.’
원래라면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꽃을 피우고, 몇 년은 뒤늦게 되찾아야 할 능력을 한참 전에 제 것으로 취해낸다.
앞당겨지는 건 악신들의 행보와 종말의 시기만이 아니었다.
마치 세상을 재는 정교한 저울이라도 존재하는 듯, 종말에 대항하는 세력과 영웅들 역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끼이익.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댈런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봤다.
종이에 펜이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계속 그 자세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
다음날.
마을 주민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불타고 남은 폐허를 돌아다녔다.
고작 마흔 명 남짓한 생존자들로 마을을 재건하는 건 불가능한 일.
잿더미 속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들을 건진 뒤, 주민들은 크레이그와 함께 먼 피난길에 올랐다.
“큰길만 골라 다니되, 다른 마을이 나온다면 눈에 띄지 않게 돌아서 가십시오. 아직 반란군의 편에 붙은 마을들이 다 드러나지 않았으니, 안전을 위해 발틴그라드까지는 최대한 다른 마을과 접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런 말씀 정말 죄송하지만, 성기사단의 호위는 부탁드리기 힘든 겁니까?”
“여러분을 호위해드릴 수 있다면 저야말로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하지만 다른 마을에도 여러분과 같이 무고한 피해자들이 있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하룻밤동안 자신들의 방패가 되어준 성기사들을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한편 혼자서 마흔이 넘는 인원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었는지, 크레이그는 댈런에게도 동일한 부탁을 했다.
“나에게는 의뢰가 먼저요. 윗선에서 내 행방에 대해 묻거든, 서리고원 너머의 악마를 상대할 무기를 찾으러 간다고 보고해두시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차르국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시기를.”
피난민과 성기사들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난 뒤, 댈런과 일행 역시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일한 목적지에 동일한 여로.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일행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점일까.
“···그런데 그쪽은 왜 여기 붙으셨소? 그쪽이 아까 그 성기사들의 지휘관 아니었나?”
댈런의 물음에 루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세계의 이빨 산맥으로 가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소만.”
“하이 오크가 지배하는 땅이군요. 강력한 괴물들이 도사리는 곳이죠. 심문관이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명령권이 주어졌을 뿐, 이번 파견에서의 제 임무는 대륙에 숨어든 악마를 포함해 강대한 악들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댈런을 따라가다보면 못해도 상급 악마나 그에 준하는 마녀쯤은 나오는 법이니까요.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
네가 가는 곳마다 악마든 뭐든 튀어나오면서 일이 비정상적으로 꼬이곤 했으니, 오히려 이번에는 임무를 위해 따라가겠다 이건가.
싱긋 지어내는 예쁜 미소와는 별개로, 어딘가 찝찝한 내용의 대답이었다.
[주인님, 혹시 주인님의 정체가 액운을 부르는 인형 같은···.]
‘닥쳐.’
[으읍! 으아악!]
아공간의 악마가 후속타를 넣으려다, 자연스레 품속에 넣은 손으로 물 흐르듯 두들겨맞았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말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지 않겠느냐, 기억 잃은 나무여.]
‘···그쪽까지 그러기요?’
[내가 무슨 말 했느냐?]
다만 심상 속의 진룡이 반죽이 된 악마를 달래며 그 바톤을 이어받을 줄은, 댈런조차 예상하지 못한 바.
“으하하하! 이 친구랑 있으면 싸움이 끊일 줄을 모르기는 하지! 끝없이 몰려오는 대적자들. 쉼이라곤 주어지지 않는 투쟁의 인생! 그거야말로 영웅의 길 아니겠나!”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어머니.”
“어머니라니? 아직 이름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아카샤···아니 뿌까입니다.”
“······어머.”
맞장구치며 웃어젖히는 드워프와 난데없이 숨겨진 자식 선언을 하는 소년 사이에서, 댈런은 간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기사에 악마, 용과 난쟁이, 거기다 용병까지. 괜찮은 조합이구나.]
심상 너머 설산의 절벽 위, 고룡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댈런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아무래도 이번 여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
일행은 동쪽으로 향하며 세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더 거쳤다.
다행히 분위기가 삭막한 곳은 있어도, 먼젓번과 같은 민란의 조짐을 보이는 마을은 없었다.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철혈군대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겠지.’
대부분의 병력이 북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국경들을 텅 비워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세계의 이빨 산맥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하이 오크의 영토. 남쪽 도시연합이나 서부의 길드 연맹과의 국경보다 더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순찰대와 마주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그렇게 불타버린 마을을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일행은 세계의 이빨 산맥 초입에 접어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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