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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59화 (159/288)

선조들의 무덤(1)

싸움은 머지않아 끝났다.

성소 수호자 하나가 붙잡히자마자, 대족장은 성소 수호자들을 즉시 물려 후퇴시켰다.

기습으로서의 효용은 이미 다했고,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봐야 큰 이득 없는 소모전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혹은 댈런과 펠버가 본격적으로 싸움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얻어낸 이득을 역으로 토해내야 할 상황이 될 거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오늘, 족장 일곱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 오크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세계의 이빨 산맥에 자리 잡은 하이 오크는 모두 스물세 부족.

그중 삼분의 일에 달하는 숫자가, 하루아침에 각 부족 최강의 전사이자 지도자인 족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칭구들을 기억할 거다.”

족장들과 여타 전사들의 시체를 수습한 자리에서, 타룸은 그렇게 선언했다.

댈런은 살짝 떨리는 타룸의 눈동자를 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족장 회의를 습격한 성소 수호자는 도합 서른 남짓이었다.

하나하나가 5위계, 혹은 5위계에 근접한 전사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주술의 집합체.

비록 영역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생전의 완력과 기술뿐 아니라 언데드로서의 이점까지 더해진 게 성소 수호자였다.

일체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주술핵이 파괴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 존재들.

아무리 족장들이 영역을 이룬 강자들이라 해도,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그런 괴물을 상대로 선전하기란 힘들었다.

거기다 기습이라는 점 역시 큰 패널티로 작용했고. 아무리 싸움에 미친 족속이라 하더라도, 족장 회의에서 칼부림이 날 걸 예상하고 대비한 이는 없었으니까.

“고맙다, 댈런. 덕분에 부락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어느새 장례를 마치고 다가온 타룸이, 솥뚜껑보다도 큼직한 손을 내밀어 감사를 표했다.

“무너진 돌집은 쌓아올리면 되고, 불탄 밭은 다시 심으면 된다. 족장 칭구들은 싸움의 의무를 다하다 죽었지만, 우리 부락 하이 오크들은 거의 죽지 않았다. 전부 너와 네 칭구들 덕분이다.”

“고마워할 것 없다.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밥도 얻어먹지 않았냐.”

“···역시 넌 똑똑한 전사다. 좋은 잉간이다.”

“울지 말고. 이런 거에 감동해서 울면 전사가 아니다.”

“울지 않았다! 눈알에 뭐가 들어가서 그렇다!”

타룸이 눈물을 글썽이며 버럭 소리쳤다. 댈런은 낮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타룸의 말대로 부락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전사 몇이 죽긴 했으나, 대부분의 피해는 재산적인 부분에서 그쳤다.

적들이 대부분의 전력을 족장들에게 집중하기도 했고, 일행들의 무력 역시 성소 수호자 몇 정도 막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

펠버와 루시아를 비롯한 일행은 지금도 피해를 수습하고, 마을의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는 작업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중이었다.

“엘르― 마이아린.”

“멋지다! 돌이 혼자 움직인다!”

“눈 감았다가 뜨니 돌집 한 채가 지어졌다! 늙은 마법사 똑똑하다! 어린 마법사 칭구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대지술사인 펠버와 토미가 토목 작업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 당연한 일.

“온몸에서 힘이 솟는다!”

“우어어! 날아갈 것 같다!”

더불어 루시아 역시 전투 기도로 하이 오크들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며, 고된 작업 현장을 수월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덕분에 큼직한 피해들은 하룻밤이면 다 복구할 것 같다. 그러니 이제···가장 어려운 일만 남았다.”

심호흡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쉰 타룸은, 절벽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댈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르보르의 사슬로 사로잡았던 성소 수호자.

족장의 의식 일부분을 묶어둔 포로를 심문하러 갈 시간이었다.

***

[손님을 모셔놓고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절벽 위, 폐허나 다름없이 박살난 타룸의 돌저택.

푸른 사슬에 결박된 성소 수호자는 살아남은 족장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까드득.

살기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들. 꽉 다문 입에서는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새어 나온다.

그 여과 없는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수호자에게 의식을 투영한 대족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목 축일 술은커녕 앉을 의자도 없어.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가르쳤나?]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대족장.”

쿵.

무너진 돌무더기를 짓밟고 온몸에 문신 가득한 하이 오크가 나타났다. 박살난 저택의 집주인인 족장 타룸이었다.

“오늘 너는 손님이 아니라 포로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우리에게 잘 대답해야 할 거다.”

[이런 짓이라···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대족장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족장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았나?]

“반역이라니. 억지도 정도껏이다. 그러면 악마는 왜 성소에 불러들인 거냐?”

[내가 왜 악마와 결탁했다고 여기는 거지?]

묵빛의 하이 오크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댈런이 서 있는 방향을 고갯짓했다.

[저 북방 야만인이 그러던가? 내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그렇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하이 오크 대족장이 악마와 손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나 봤나?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데. 대대로 쑴의 악마들과 결탁해온 족속이 누구지? 돌아오지도 않을 자기들의 신만을 기다리던 서리고원 너머의 야만족들 아닌가?]

대족장의 말에 몇몇 족장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수호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첫 대면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긴 했다.

분명 대족장의 기억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왠지 그가 아는 대족장과는 뭔가 다른 느낌.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게 아닌, 모니터 너머에서 선택지를 골라 가며 말을 섞은 게 전부인 만큼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이 새끼가 왜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잘해?’

이제야 그 간질거리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 만큼 굳건한 신념을 가졌다뿐이지, 원래 이놈도 굉장히 단순무식한 놈팽이었는데?

[마침 나를 묶은 이 사슬도 에낙사구스의 하수인인 칼카스의 권능이로군. 저 떡덩이 같이 생긴 악마로 칼카스의 힘을 빌리거나 했겠지. 아닌가, 악마 숭배자 북방인?]

[떠, 떡덩이라니···!]

무너진 저택 한구석에서 사슬의 힘을 유지 중이던 아르보르가 발끈했다. 대족장은 거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악마를 걸고 넘어지자 족장들의 시선도 하나둘씩 댈런을 향했다. 작은 웅성거림은 그들이 대족장의 말에 조금이나마 동요되고 있다는 걸 의미할 터.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내 노예인데, 문제라도 있나?”

[크하하하! 노예라니! 인간 따위가 악마를 노예로 삼는다고? 지나가던 고블린이 웃겠구나!]

미친 듯이 폭소하던 대족장은 어느 순간 웃음을 뚝 멈췄다.

놈은 구멍 뚫린 이마에 옅게 주름을 잡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족장의 자리를 걸고 다시 족장 회의를 열겠다. 이 자리에 있는 족장들은 전부 참석하도록.]

다시 한 번 술렁임이 일어난다. 이전보다 더 큰 동요였다.

다짜고짜 기습을 가하고 족장들을 죽인 대족장을 향한 분노와, 천 년이 훌쩍 넘도록 대족장의 자리가 가진 권위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등하는 것.

그때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타룸이 몸을 일으켰다. 대족장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는가, 족장 타룸?]

“그렇다.”

[좋다. 다만 명심해라. 너는 내 후계자다. 차기 족장 후보로서 네 발언이 가질 무게를 생각해도록 해라. 내 가르침을 잘 배웠다고 믿는다.]

“알고 있다, 대족장. 네 가르침은 언제나 나를 이끌어왔지.”

타룸은 고개를 끄덕이며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등 뒤에 매달린 거대한 양날 도끼가 그 걸음에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기억한다.”

[···뭐지?]

“문제가 있으면 맞아야 한다고. 맞으면 고쳐진다고.”

덜컥.

3미터가 넘는 문신투성이 거체가 검은 오크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오크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뒤틀렸다.

초조함. 당혹감. 약간의 불안.

빈껍데기 시체만 아니었다면 한 줄기 식은땀이 더해졌을 터. 그러나 대족장은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문제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군. 내 가르침을 잘 이해한 게 맞···.]

“너는 너무 말을 잘한다. 마치 악마 놈들처럼.”

후웅―

거친 손동작으로 뽑혀든 도끼.

수십 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철덩어리가 세차게 공기를 가른다.

“대족장, 아직 들을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버텨라! 악마가 네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반드시 고쳐주겠다!”

타룸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자줏빛으로 번뜩이고.

콰지지직―!

사슬로 꽁꽁 묶인 성소 수호자의 몸뚱이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쨍그랑.

반으로 깨진 채 툭 떨어진 주술핵. 동력을 잃고 천천히 부스러져 흩어지는 검은 육체.

하늘을 향해 김 서린 한숨을 깊이 뱉어낸 족장 타룸은, 도끼를 땅에 콱 꽂고 입을 열었다.

“대족장의 후계자로서 명령한다.”

저택 폐허를 낮게 울리는 목소리.

“내일. 우리는 성소를 공격한다.”

***

원정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각 부락으로 족장들을 돌려보낸 다음날, 해질녘에 맞춰 하이 오크 군대가 약속된 골짜기에 집결했다.

“이번 일로 족장을 잃은 부족은 원정에서 제외했다. 최고의 전사를 잃었으니···한동안은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할 거다.”

“잘했군.”

“너무 아쉽다! 너 같은 똑똑한 전사에게 하이 오크의 힘을 다 보여주지 못해서!”

타룸이 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댈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슬쩍 골짜기를 내려다봤다.

“밥! 사냥! 밥! 사냥!”

“싸움! 싸움! 근데 우리 어디로 가냐?”

“성소로 간다! 대족장이 배신했다고 한다!”

“배신? 배신이 뭐냐!”

“뒤통수쳤단 말이다!”

골짜기 한가득 드글거리는 흰 무늬의 녹색 물결.

하이 오크의 성량 좋은 외침들이 골짜기의 두 절벽 사이를 쩌렁쩌렁 울려댄다.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더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런가? 다행이다! 똑똑한 너라면 알아줄 거라 믿었다!”

짧은 감탄에 타룸이 반색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마냥 위로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

비록 일곱 부족이 원정에서 제외되었지만, 골짜기에 모인 하이 오크 무리는 여전히 작은 왕국 하나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으니까.

각 부락 별로 백 명씩, 총 천육백에 달하는 대군.

만약 모든 부족이 모였다면 골짜기에 수용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대단하군요. 징발과 지휘권 규합을 위해 따로 정해진 절차조차 없어, 고작 하루 만에 이 정도의 규모의 병력이 모이다니.”

루시아 역시 감탄한 눈빛으로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기사단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그녀이기에, 눈앞의 광경이 더 인상 깊은 게 당연했다.

하나의 신념과 규율 아래 행동하는 성기사단이라도, 천 단위를 넘어가기 시작하는 부대 통솔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산골 각지에 흩어진 부락에서 병력을 차출해, 한 곳으로 집결시키는 난이도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고.

“참, 그런데 보급은 어떻게 합니까?”

루시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 오크는 싸움만큼이나 밥에 미친 종족.

일반적인 군대 운영도 보급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데, 먹을 것에 환장한 이들이라면 분명 그 무게가 더 막중할 테였다.

“성소까지 사흘 안에 도달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보급선을 구축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고, 따로 식량을 챙기신 분은 보이지 않는데···뭔가 다른 수가 있는 겁니까?”

미간을 살짝 좁힌 채, 푸른 두 눈이 반짝이며 흥미를 표한다.

그건 그녀가 단지 한 명의 강력한 전사일 뿐 아니라, 훌륭한 지휘관의 자질까지 가졌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많은 회차에서 루시아는 종말에 맞서 최후까지 성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항전하곤 했다.

타룸은 그녀의 질문에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그답지 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급이 뭐냐?”

“예?”

“어려운 말 잘 못 한다.”

“아니, 그, 싸우려면 적어도 먹을 건 있어야 하잖습니까.”

“아, 밥 말인가! 밥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우리 부락에 올 때 많이 마주치지 않았나? 이 산맥에는 먹을 거, 특히나 모지리 오크들이 끝없이 쌓여있다!”

당당하게 외치는 대족장 후계자. 루시아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그, 모지리 오크라면···.”

“맞다! 문신 없는 오크들! 모지리들은 우리 동족이 아니다! 고기도 좀 질기긴 하지만 괜찮다! 고블린들이 잘 요리해줄 거다!”

“······.”

이날 루시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전사 하나하나가 장정 열 명 이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종족이, 왜 천 년이 넘도록 산맥 밖으로 세력을 넓힐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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