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60화 (160/288)

선조들의 무덤(2)

다행스럽게도 일행이 오크 고기를 먹을 일은 없었다.

댈런이 악마 아르보르의 아공간에 비상식량을 넉넉히 넣어두고 다닌 덕분.

하이 오크들이 사냥의 전리품을 쩝쩝거리는 사이, 일행은 악마의 마법으로 신선하게 보존된 재료들을 스튜로 만들어 먹었다.

물론 루시아의 요리 실력으로도 비위가 상하는 걸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체격과 문신 유뮤만 다를 뿐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종족의 팔다리를 뜯어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상당히 밥맛 떨어지는 광경이었으니까.

“모지리 오크들 고기 질기다! 맛없다!”

“그래도 먹어라! 영양가 있는 고기다!”

“이 정도면 고블린들이 요리 잘 한 거다! 나 때는 먹고 토하고 다시 먹었다!”

“우웁! 우웨엑!”

원정 경험이 없는 젊은 오크들이 밥 먹다 말고 피자를 구워대는 건 덤.

“아···씨발 토할 거 같아.”

“끌끌끌. 가끔씩은 책으로 읽는 게 나은 경험도 있다네, 심문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던 옛 욕쟁이 성기사의 모습이, 그 광경을 보며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한편 원정 첫날 오크를 사냥해 먹은 뒤, 하이 오크들의 행군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오크 고기가 하이 오크들에게 영양가 있는 식량이라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것처럼.

‘아니면 역겨운 오크 고기를 하루라도 더 먹기 싫다는 의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닷새길이라 여겨졌던 여정은 나흘로, 그리고 이내 사흘로 단축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부락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밤.

천칠백 명의 하이 오크 군대는, 성소의 유일한 입구인 무덤 골짜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

무덤 골짜기.

모든 하이 오크들이 죽으면 묻히는 장소.

무덤 골짜기는 깊고 넓은 중심부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좁은 골짜기들과 크고 작은 동굴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는 지형이다.

그리고 뻗어나간 동굴과 골짜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하이 오크들의 시신이 안치되는 장소.

생전에 많은 명성을 쌓은 전사일수록, 선조들이 잠든 성소와 가까운 곳에 묻힐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명성의 기준은 잘 먹고 잘 싸우는 것이었고.

구구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리는 땅.

성소의 유일한 입구이자 통로인 무덤 골짜기가, 당장에라도 무너져 붕괴될 듯이 진동했다.

하이 오크들 사이에서 당황 섞인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가족이나 친구를 숱하게 매장해왔지만, 이런 진동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

“대족장···정녕 우리를 배신한 건가.”

“스툼파는 더이상 대족장이 아니다. 그는 하이 오크의 적이다. 싸우고 죽여야 할 적.”

다만 대족장들은 당혹감 대신 깊은 회한 섞인 한숨을 흘렸다.

그들은 이 현상의 원인과, 그게 나타내는 의미를 알고 있었으니까.

‘성소의 결계를 발동시켰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생각했다.

하이 오크의 선조들이 묻힌 성소는, 사실 단순히 무덤이라는 목적만으로 세워진 시설이 아니다.

오래 전 초대 대족장의 예언에 따라, 언젠가 있을 대혼란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요새가 바로 성소.

댈런이 악신과의 대전쟁을 목도한 첫 회차가, 다름아닌 이곳 하이 오크들의 성소였던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인간이 쌓아올린 왕국과 제국들이 몰락하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하이 오크의 성소는 최후까지 버텨냈으니까.’

쿠륵! 꽈드득!

골짜기 곳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이빨을 가는 듯한 굉음이 메아리친다.

외세의 침략에서 성소를 지켜내는 결계가, 하이 오크의 군대를 대상으로 발동된 것이었다.

기이이이잉―

주술 문양으로 가득한 흐릿한 결계가, 성소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빈틈없이 틀어막으며 침입자를 차단하고.

이내 골짜기 양쪽으로 솟아오른 절벽의 일부분이 뚝뚝 떨어지고, 바윗덩이 째로 낙하하면서 앞뒤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쿠웅― 콰과과과······.

거대한 질량이 지면에 충돌하며 흙먼지가 수 미터 높이까지 치솟는다.

“골렘이다!”

곧이어 먼지가 밀려나고 드러난 건, 신장이 2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바위 골렘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

“하이 오크 전사들이여! 골렘을 공격해라!”

“덜격! 적을 쓰러뜨려라!”

“골렘을 무너뜨려라!”

“싸운다! 이긴다! 구와아아아아!”

타룸의 명령에 함성으로 화답한 하이 오크 전사들이, 제각각 다양한 무기를 뽑아들고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우아아아아!

구와아아아아!

해일처럼 몰아치는 녹색 물결.

개개인이 백 미터를 숨 몇 번 몰아쉴 동안 주파하고, 완력만으로 절벽을 움켜쥐며 몸을 날리는 곡예를 선보인다.

골렘이 미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개미떼처럼 놈의 전신을 뒤덮은 하이 오크들이 일제히 놈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주먹질로 바위도 깨뜨리는 괴력의 행사에, 거대한 골렘 하나가 저항도 못 하고 우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위이이이이―!

온전히 형체를 갖춘 골렘들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바윗덩이 머리통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광선의 형태로 쏘아져 나왔다.

콰과광!

콰지지지지―!

광선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주술의 마력이 불기둥처럼 폭발한다.

오크의 단단한 가죽과 근육마저 어렵지 않게 꿰뚫고, 스치기만 해도 산 채로 피부를 불태워버리는 주술 광선.

앞뒤에서 퍼붓는 수십 줄기의 폭격으로 인해, 득달같이 달려들던 오크들의 전선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오크들의 진형 한가운데.

황금빛 파동이 터져나온다.

연달아 동심원을 그리며 골짜기를 가득 매우는 눈부신 빛의 잔영.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각각의 존재 자체를 땅으로 삼아, 그 시간선을 읽어내고 개입하는 대마법사의 영역이 힘을 드러낸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복잡한 수인과 함께 맺어내는 주문.

제자인 토미는 스승의 곁에서 끊임없이 영창과 수인을 거듭해가며 보조한다.

사제가 엮어낸 주문에 의해 펠버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황금빛 정광이, 파동 위에 몸을 싣고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위이이···치지직. 지직.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골렘들을 뒤덮자, 주술 포격이 힘을 잃고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골렘들에게 부여된 파괴 주술의 시간대를, 결계 발동 이전으로 되돌려 아예 고정시켜버린 것.

물론 수십이나 되는 골렘들의 동력 그 자체를 무효화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거대한 덩치에서 말미암은 파괴력은 그대로라는 뜻.

그러나 포격만 멈춘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할 싸움광들이 수백이 넘게 있으니, 그런 자잘한 문제는 상관없었다.

“놈들이 눈에서 빛살을 못 뽑는다!”

“뜨거운 빛줄기가 사라졌다! 돌덩이 부술 수 있다!”

“덜격! 하이 오크는 덜격한다!”

포격에서 자유로워진 하이 오크들이 눈이 뒤집혀서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팔다리에 매달리는 걸 시작으로 몸통과 머리까지 기어올라, 마치 광부가 암석을 쪼개듯 커다란 무기로 내려치며 돌조각을 깎아내려가는 전사들.

그우우우웅···!

쿠궁! 쿵!

골렘들이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이리저리 날아가 나동그라졌지만,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니고서야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들기를 반복한다.

“먼저 들어가게. 여기는 나와 토미가 이 싸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맡을 테니.”

수인을 멈추지 않은 채 펠버가 말했다. 싱긋 웃는 그의 얼굴에서는 이전과 달리 식은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발밑에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황금빛 파동이 뿜어지며, 추가적으로 튀어나오는 바위 골렘들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진룡의 진체를 과거 시간대로 돌려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쉽더라도, 엄연히 시간선에 직접 손을 대는 고난이도의 작업.

그런 일을 손쉽게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몇 달간의 노력 끝에 그의 육체가 한 단계 높은 격으로 상승했다는 증거였다.

“마법사 칭구가 우리를 돕는다! 족장들은 나를 따라와라!”

타룸이 외치자 족장들과 일부 전사장들이 함성을 지르며 골렘들 사이를 돌파했다. 몰려갔다. 댈런과 나머지 일행도 함께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길을 막고 있다! 어떻게 하나, 족장 타룸!”

“나와 봐라.”

쐐애애액―!

골짜기를 가로막은 결계 장막에 곧장 암월의 주문살해자를 꽂아버린다.

비검의 힘으로 그 능력을 폭주시키자, 미친 듯이 떨리던 단검이 그대로 폭발하며 결계를 깨뜨렸다.

“결계를 부쉈다! 역시 똑똑한 전사 칭구다!”

“이름 댈런이라고 했다! 똑똑한 전사 칭구 댈런이다!”

성능 좋은 단검을 하나 잃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펠버와 하이 오크 전사들에게 바위 골렘들을 맡겨두고 침투한 상황이니만큼, 지금부터의 작전은 사실상 시간 싸움.

어차피 마법 역시 어지간한 주문쟁이들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리 큰 손해가 아니기도 했고.

댈런은 타룸과 함께 환호하는 족장들을 이끌고 결계 안쪽을 질주했다.

다리가 짧아 계속 뒤쳐지는 비요른은, 아카샤가 진체로 변신해 뒷덜미를 들고 날아버리는 걸로 해결.

“놔, 놔라! 으아악!”

[다리도 짧으시면서 자존심 부리지 마십시오. 저 같으면 놓으라고 말 할 시간에 꽉 잡겠습니다.]

“자, 자존심이 아니라 너무 빠르으아아악!”

질겁하는 비명을 가볍게 무시하고 속도를 높이는 새끼 청린용.

언제 저렇게까지 성장했는지, 그 크기가 못해도 체장 2미터는 훌쩍 넘어보였다.

그렇게 얼마쯤을 더 달렸을까. 어느 순간 시계가 확 트이면서, 절벽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성소다!”

“다 왔다!”

그런 환호도 잠시.

쐐애애애액!

수십 자루의 투창이 연달아 날아들어 대열을 사방에서 강타한다.

“크아악!”

“기습이다!”

이미 족장 회의 당시 한 차례 겪어봤던 투창 세례. 하나하나가 소리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지는 거대한 작살이나 다름없다.

순식간에 하이 오크의 전사장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거뭇한 인영이 사방에서 나타나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성소 수호자다!”

“조심해라! 수호자들은 옛 대족장들만큼 강하다!”

족장들이 경고했으나, 이미 삼분의 일에 달하는 전사장들이 수호자들의 칼에 쓰러진 이후.

영역의 사용을 망설이는 족장들을 향해, 타룸이 마력을 가득 실어 일갈했다.

“싸워라! 아끼지 말고 영역의 힘을 사용하라!”

“하지만 족장 타룸, 그러면 대족장과 싸울 때는···.”

“그렇다고 우리의 전사들을 희생시킬 건가! 이곳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전장을 휩쓰는 포효에 방어적이던 족장들의 태세가 돌변한다.

아껴두었던 심상의 힘을 하나둘씩 풀어내자, 일대의 마력풍이 뒤틀리며 거대한 와류를 형성했다.

화르르륵― 촤자작!

거대한 도끼에서 쏟아지는 화염. 발걸음마다 폭풍처럼 흩뿌려지는 바람의 칼날.

구어어어어!

함성을 토해내며 몸체를 원래의 두 배가 넘게 불려내는 족장과, 그 곁에서 땅에 손을 얹고 그에 비견되는 크기의 골렘을 일으키는 주술사까지.

“전사장들은 족장들을 보조해 수호자를 견제해라! 결정타는 족장들이 날릴 테니 위험하다 싶으면 빠져라!”

타룸의 지시에 따라 족장들과 전사장들이 십수 개의 조로 나뉘어 수호자들을 상대했다.

루시아와 아카샤, 비요른도 한 조를 이뤄 수호자 두 명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심상으로 현실을 비트는 이적이 사방에서 터져나오고, 5위계에 닿았던 강인한 육체가 그에 맞서며 무의 극을 펼쳐낸다.

고작 백 명이 좀 넘는 숫자가 격돌했음에도, 수천 단위의 군대가 치고받는 걸 아득히 넘어서는 파괴의 현장.

막 수호자 하나의 목을 비틀고, 성검으로 흉곽 안쪽의 주술핵을 깨부순 댈런에게 타룸이 다가왔다.

“댈런. 대족장을 맡기겠다.”

“···괜찮겠나?”

댈런이 되물었다.

결연한 의지가 맺힌 타룸의 눈동자는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자줏빛 안채는 대족장에게 대대로 전수된다는 힘의 흔적.

악마에게 사로잡힌 대족장에게 안식을 선물해주는 건, 후계자로서 당연하게 취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였다.

전대 대족장이자 스승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텐데, 선뜻 그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어지는 타룸의 고백은 그 결심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혼자 대족장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가능하지. 내 욕심대로 우리 둘 모두 자리를 비우면 족장과 전사장들이 많이 죽을 거다. 차라리 내가 여기에서 수호자들을 막고, 네가 들어가서 대족장을 상대하는 게 옳다. 내 의무는 전사들을 이끄는 것이지, 내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니까.”

“···숭고하군. 알았다.”

“어려운 말은 모르지만 칭찬인 것 같군.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타룸은 다시 멀어졌다. 그는 전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호자에게 밀리는 족장들에게 합세해 돕기 시작했다.

스읍―

댈런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리에 마력을 한껏 불어넣고 땅을 박찼다.

꽈아아앙―!

밟고 있던 지면을 박살내며,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전장을 벗어나는 그의 신형.

흐릿한 잔영처럼 보이는 그 궤적이 향하는 곳은,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있는 성소 입구였다.

보스몹 경험치는 언제나 환영인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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