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무덤(3)
쿠르릉···.
어두운 복도.
석재 벽면이 흔들리며 오래된 먼지가 푸스스 쏟아졌다.
족장들이 싸우는 전장에서 이곳 성소까지의 거리는 족히 수 킬로미터. 그럼에도 전투의 여파는 지면을 타고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
댈런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털고 다시 걸어나갔다.
영역을 이룬 초인들 십수 명이 동시에 전력을 투사하는 상황이다.
거기서 발산되는 힘의 총량은 지형마저도 족히 바꿀 수 있겠지.
그 전장 한복판에 있는 일행들의 걱정이 잠시 발목을 붙잡았지만,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그르칠 여유는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빠르고 확실하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처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쪽이 합리적이었으니까.
우르르······──.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던 진동이 불현듯 뚝 멎는다.
동시에 예민하게 돋아난 기감이 어떤 막을 통과했음을 느꼈다.
성소의 지하 깊은 곳, 하이 오크 선조들의 유해를 안치해둔 전당 구역에 진입한 것이었다.
화륵!
복도에 설치된 횃대에서 푸른 불길이 타오른다.
일정 거리마다 배치된 횃불이 방문자의 걸음에 맞춰 밝게 타올랐다가, 그가 완전히 지나치고 나서야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전당 자체가 깨어나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모습.
댈런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 걸어가며, 그 일렁이는 횃불의 빛에 드러난 벽면의 조각들을 무심하게 관찰했다.
평화롭게 산맥을 다스리는 하이 오크.
그 영토를 침범한 마물들.
소규모의 국지전. 부족 단위의 싸움. 강림한 악마에 맞서는 부족 연합체. 그리고 종족 전체의 전쟁까지.
기나긴 복도를 따라 그려진 조각은 하이 오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은 하이 오크들만이 아닌, 수많은 종족들이 뒤섞여 악신의 군세에 저항하는 정경이었다.
수천 년 전 대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모니터 너머에서도 설정상으로만 들어봤던 대전쟁의 일면.
댈런은 복도 끝의 거대한 석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석문에는 연합군의 필두에서 달려나가는 하이 오크 전사의 뒷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대족장. 우리들의 대선조.]
전사의 머리 위, 거친 필체로 휘갈겨진 고대 오크어를 적창이 읽어내려갔다.
‘고대 오크어도 읽을 줄 알았소?’
[나도 꽤 오래 살았느니라. 지금 이런 신세라 해서 그 시간을 허송세월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만.]
심상 너머, 고룡이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나직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댈런은 가던 길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대선조가 조각된 석문에 손을 얹자, 석문이 거친 마찰음을 내며 저 혼자 옆으로 밀려났다.
기기기긱···쿵.
열린 문 안쪽은 드넓은 원형 전당이었다.
수십 개의 석관들은 원형 전당을 둘러싸듯 자리했고, 완만한 돔형 천장의 구멍에서는 한 줄기 빛이 뻗어나와 전당의 중앙으로 흘려내린다.
빛줄기가 내리쬐는 전당의 중심부에는 다른 관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누구의 관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기나긴 복도에 이어지던 조각들을 떠올려보면, 저 관에 묻힌 이는 분명 대미의 석문에 새겨진 장본인일 테니까.
그리고 그 추측을 긍정이라도 하듯, 관 위에 걸터앉아있던 하이 오크가 입을 열었다.
“최초의 대족장이었던 대선조를 비롯해, 모든 대족장들이 온전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니다.”
위에서부터 내리쬐는 빛 때문에 그림자 진 얼굴.
낮고 굵은 목소리가 전당을 울린다.
“육신을 온존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어금니 한 조각만을 간신히 남긴 이들도 있었지. 그들은 성소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는 대신, 생전에 모든 걸 바쳐 동족을 지켜낸 공으로 이곳에 안치되었다.”
쿵.
훌쩍 관 아래로 뛰어내린 하이 오크. 바로 선 자세가 되자 놈의 체격이 보다 명확하게 와닿는다.
신장은 어림잡아 4미터를 넘어섰고, 덩치와 근육 역시 그에 걸맞게 비대했다.
다른 하이 오크 족장들보다도 한참 큰 키와 덩치는, 족히 댈런의 두 배는 될 법했다.
더불어 진녹색의 피부 위를 빼곡하게 덮은 흰 문신은, 그가 이 산맥에서 가장 강한 하이 오크라는 증거.
“하이 오크에게 이곳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선조들의 무덤이다. 하지만 나로서는···가증스러운 원수에 불과하지.”
꽈악.
수박만 한 주먹을 쥐어 들어올리고.
파앙―
가볍게 뒤로 털어낸다.
콰과과광!
그 단순한 손짓 한 번에, 전당 중앙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거대한 석관이 수백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났다.
천장에서부터 내리쬐는 빛줄기 아래, 대족장의 모습을 가리고 연막처럼 뿌옇게 차오르는 먼지구름.
댈런은 그 먼지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기는 집어치우기로 한 거냐?”
“크흐흐흐, 그래. 멍청한 전투광 종족이니 우두머리만 집어삼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불청객이 끼어들 줄은 몰랐단 말이지.”
“······.”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쯤은 겪었어야 할 잡음이지. 너를 죽이고 대족장 후계자인 타룸의 몸을 집어삼킨 뒤, 내 충실한 하수인들로 족장 자리를 채우면 될 뿐.”
천천히 흐려져가는 목소리. 가라앉는 먼지구름 너머, 거구의 하이 오크는 이미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 시체늪의 대공이 어떻게 대족장의 의지를 꺾었는지 궁금하겠지. 간단했다. 미래의 편린을 엿보는 것은 초월자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는 자격인 동시에 대가. 멍청한 녹색 종족의 일원이지만, 대족장 놈도 5위계에 오르며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은 것이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악마의 목소리.
댈런은 무시하고서 가만히 고개를 꺾어 빛이 내리쬐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번에도 꽤나 머리 아프게 꼬인 상황이었다.
시체늪의 대공, 즈탄크가 개입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싸움에 미친 하이 오크의 감성을 긁어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싸움에 모든 걸 건 쑴 휘하의 악마들 뿐.
그리고 쌈박질과 유혈사태밖에 모르는 머저리들 중에서 즈탄크는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다.
쑴 휘하에서 가장 싸움을 잘 한다는 여섯 대공에 속하면서도,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는 대신 교묘한 감언이설을 늘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놈은 이전 회차들 중에도 몇 번쯤 하이 오크를 회유하려고 수작을 부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진짜 통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계약을 맺은 걸 넘어서서, 아예 대족장의 몸을 점거해 버릴 거라고는 댈런도 예상하지 못했었고.
[···정해진 운명의 자각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의 종착지에는 무력감이 기다리는 법. 나는 그에게 거래를 제시했을 뿐이다. 모든 걸 바치는 대가로, 하이 오크 종족을 구해주겠다고.]
“······.”
후우.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오른다.
대체 어째서일까.
실타래를 애써 풀면 풀수록, 되려 점점 꼬여만 가는 듯한 이 상황들은.
일 년도 지나기 전에 악마를 몇 마리나 죽였고, 진룡의 목도 썰었다.
미궁도시의 곡창이 홀라당 불탈 뻔한 걸 막거나 성기사단의 반란을 저지한 건, 원래라면 몇 년은 더 지나서 수행해야 할 퀘스트였다.
이 정도면 족하지 않나? 대체 언제까지 더 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상념들을 머릿속에 스쳐보내면서, 댈런은 번개같이 도끼를 뽑아 왼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가슴 속의 응어리를 죄다 담아내듯, 전력을 다해 도끼를 내리쳤다.
쩌━━━━
바닥이 쪼개진다.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달려들던 대족장도 거의 쪼개질 뻔했다.
놈은 두 손으로 잡은 대검으로 도끼를 받아내 간신히 버텨냈다.
흐릿하던 놈의 몸뚱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자줏빛 이채를 띈 검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검을 막았음에도 쇄골부터 옆구리까지가 길게 갈라져 피를 주르륵 흘리는 대족장. 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어, 어떻게. 분명 너는 4위계일 텐데!”
놈이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하자, 도끼와 맞닿은 부분의 이가 나가고 미세한 실금이 그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놈의 팔. 댈런은 조금 더 힘을 줬다. 검과 도끼 사이에서 카가각 불똥이 튀며 대족장의 자세가 조금씩 더 낮아졌다.
두 배 차이 나던 눈높이가 이내 평행선을 이뤘다. 검은 눈이 검은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놈의 위계고 지랄이고.”
카득!
검과 도끼 사이, 불꽃이 한 번 더 거칠게 튀어오르고.
“니가 껴입은 대족장 몸뚱이보다 내가 힘이 더 세다고. 그거 근력캐가 아니라 민첩캐야, 씹새야.”
푸른 전격을 둘러낸 무릎을 들어올려, 대족장의 옆구리를 찍어버린다.
「술식갑주 : 청뢰갑(靑雷甲)」
「청륜(靑輪)」
콰지지지직―!
전당의 바닥을 짓이기며 대족장의 몸뚱이가 엎어진 채 미끄러진다.
사방으로 튀어나간 작은 전격의 원반들에 석관이 부서지며 파편과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바닥에 길게 흔적을 남긴 대족장이 처박힌 곳은, 원래 그가 앉아있던 거대한 석관의 잔해 더미.
곧이어 작은 집채만 한 돌더미가 쾅 하고 폭발하며, 대족장의 신형이 천장에 가까울 정도로 높이 치솟았다.
“크하하하! 굉장하구나! 과연 에낙사구스가 괜히 너를 주시하는 게 아니었던가!”
공세가 막히고 일방적으로 반격에 얻어맞았음에도,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투지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순간적인 당혹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자줏빛 안광을 번뜩이며 광기에 가까운 호승심을 불태울 뿐.
비단 폭력과 화염의 악신이라는 쑴 휘하의 악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여전히 놈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일 터.
길게 베여 피를 울컥이던 상처와, 무릎에 찍혀 터져버린 옆구리를 순식간에 회복해낸 재생력이야말로 그 자신감의 근원이겠지.
거기다 놈이 들고 있는 검 역시 실금이며 이 나간 부분이 완전히 수복되어 있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승패는 정해져 있으니!”
이제는 완연하게 자주색이 되어버린 눈동자.
놈의 전신에서 마력이 일렁이며, 눈동자와 같은 색의 기운을 뿜어댔다.
일정한 파동의 형태를 이루며, 성소의 전당 전체를 뒤덮는 마력의 파도.
“수천 년 투쟁의 역사가 담긴 이 몸뚱이가 가진 힘을 바라보아라! 신의 주시를 받는 전사여!”
보랏빛 파동이 석관이 배치된 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마력의 잔영이 뚜렷한 그림자의 형태를 구축해가고.
이내 수십 개의 석관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수십 명의 하이 오크가 영체의 형태로 서 있었다.
「영역 개방 : 선조들의 발자취」
영체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지팡이가 화염을 쏟아내고, 소리 없는 주문에 바윗덩이가 일어나 골렘으로 빚어진다.
던져지자마자 수십 갈래로 쪼개져 공간을 제압하는 투창 세례와, 폭풍을 휘감고서 내리찍는 2미터 길이의 양날도끼.
쏟아지는 공세의 한복판에서,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후우.
느려진 시간감각.
살벌하게 목숨을 노리는 공격들에 하나하나 대응해낸다.
패래랙―콰아아아!
손도끼를 위로 내던지며 유물무기의 능력을 발동, 황금빛 폭발로 투창의 화망을 깨뜨리고.
「빙정(氷晶)」
「소류지(素流枝)」
손바닥에서 띄워올린 하얀 얼음 결정이, 수십 장의 꽃잎을 펼쳐내는 즉시 수십 갈래의 냉기로 전환되어 쏟아지는 불꽃을 집어삼킨다.
「염사(炎巳)」
혼자서 뽑혀나온 단창이 화염을 머금은 뱀의 형상으로 주변 일대를 휘젓고.
「말원(抹原)」
치지지직―!
성검에 부딪힌 폭풍이 되려 찢겨나가듯 지워지며, 양날도끼와 함께 영체가 반으로 갈려 소멸했다.
“······!”
대족장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뒤틀렸다. 그 감정이 반영됐는지 영체들의 공격이 점점 거세졌지만 상관없었다.
「파영의 마안」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마력이 오감을 속이는 주술들을 간파하고, 실체와 물리력을 가진 환상은 암월의 환상살해자가 날아들어 깨부순다.
왼손에 수인을 맺어 일으킨 필즈의 바람 결계가 자잘한 투사체를 막아내는 한편, 염사의 화염을 뚫고 만신창이가 된 채 달려드는 전사 영체들을 하나씩 성검으로 처리한다.
그우우우―
그동안 주술사들이 힘을 모아 키워낸 바위 골렘이, 집채만 한 손아귀를 뻗어 댈런을 움켜쥐려 했지만.
「홍염주(紅炎柱)」
짧은 수인과 함께 바닥을 뚫고 터져나온 화염의 기둥이, 골렘의 손아귀부터 상반신의 절반을 휘감고 살라버렸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이,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다채로운 힘을 영역에 가질 수 있단 말이냐!”
염사의 호위를 받으며 합투권으로 주술사들을 두들기고 있자, 참다 못한 대족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들은 댈런은, 처음 골렘을 일으켰던 주술사 영체의 머리통을 부수고서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느새 놈이 소환했던 영체의 반수 이상이 소멸됐다.
석관이 있던 자리에서 은은하게 자줏빛이 피어나는 걸 보니 다시 소환될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대족장과 함께 이 성소에서 악신의 군세에 맞서 항전했던 무투가 캐릭터의 기억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대족장의 힘은 그 근원과 한계, 파훼법까지 이미 완벽하게 꿰고 있었고.
“꼬우면 너도 직접 잡캐로 키우던가. 남의 키워놓은 캐릭터 뺏어서 쓰지 말고.”
악마의 절규에 비웃음으로 대답해주며, 댈런은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쿠웅.
가벼운 동작과 상반되는 육중한 울림.
발밑에서부터 무채색의 파동이 퍼져나간다.
댈런을 중심으로 자잘한 돌조각들이 서서히 지면에서 떠오르기 시작하고.
“여, 영역···!”
눈이 휘둥그레진 악마의 면전에서, 두 번째 발걸음이 땅에 맞닿았다.
그리고.
「영역 개방 :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무채색의 파동이 성소 전체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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