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65화 (165/288)

회백의 투사(1)

밤공기가 찼다.

산맥의 계곡과 능선을 따라 흐르는 한풍이 옷깃 사이를 자비 없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내리 퍼붓던 눈발이 잠잠해져서 다행이었다. 대족장의 장례 행렬은 청명한 밤하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선두에서 걷던 댈런은 무심코 턱을 쓰다듬으려다, 손을 내려 뒤따르던 루시아의 손을 잡아봤다.

“으아? 대, 댈런?”

“차갑군.”

“아, 아무래도 날씨가 추우니까 그렇겠죠? 댈런은 이, 이상하게 따뜻하네요?!”

“갈 길이 꽤 멀다고 알고 있소. 손발의 체온을 유지해두는 게 좋을 거요.”

댈런은 엄지로 루시아의 손바닥을 피게 하고, 그 위에 마력으로 빚은 화염을 올려주었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화염 덩어리는 뜨겁지 않았다. 뭉근하게 자작거리며 은은한 온기로 손을 덥혀주었을 뿐.

손난로를 만들어주고 다시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자, 아공간의 아르보르가 괜스레 뿔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시도때도 없는 애정행각은 정말···어디 그것도 고향의 문화라고 해보시죠. 원주민인 하이 오크들은 그렇다쳐도, 나머지 사람들은 손도 아니라 이겁니까?]

이 새끼는 왜 또 시비지. 요즘 덜 맞았더니 기어오르는 건가?

댈런은 아공간 입구를 열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아무리 그래도 대족장의 장례 행렬이니, 누굴 패기에 적당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왜 이렇게 뿔이 났는지 알 것 같기도 했고···.

‘즈탄크의 정수를 먹였다고 삐지기라도 한 거냐?’

[······.]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소화 못하고 토한 건 안타깝지만, 어차피 토사물 정도야 아공간의 조작 권한을 가진 너라면 금방 치울 수 있지 않냐.’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상한 정수를 억지로 먹이는 건 자제해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무기처럼 휘두르거나 하실 때랑은 비교할 수 없게 힘들단 말입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댈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로 노예처럼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르보르도 결국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할 동료다.

최근 들어 이전보다 활약도 꾸준하게 늘고 있고.

뭔가를 억지로 먹이는 데 무슨 PTSD 같은 거라도 있는 듯하니, 이 부분만 조심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박. 사박.

며칠 동안 쌓인 눈밭에 발밑이 푹푹 빠진다. 장례 행렬은 마을의 경계를 벗어나 무덤 계곡으로 향했다.

고작 며칠 전에 피튀기는 전투가 벌어졌던 계곡을 넘어서, 절벽으로 둘러싸인 성소 분지로 접어든다.

거대한 돌무더기가 된 성소를 지나치고.

그 뒤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용암 호수를 크게 돌아간다.

새하얀 눈밭 위, 행렬이 남기는 자취는 성소 분지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모양새였다.

무덤 계곡에서 이어지는 입구로부터 반대쪽에 위치한 좁은 샛길.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난 비좁은 길에 발을 들일 즈음, 대족장 타룸이 입을 열었다.

“잉간들은 가족이나 친구를 떠나보낼 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부른다고 들었다.”

“그렇지.”

“하이 오크는 다르다. 오로지 가족만이 하이 오크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지. 대족장이 죽으면 족장들과 특별한 손님들이 모여서 떠나보낸다. 대족장은 모든 부족의 가족이니까.”

어둠 속. 타룸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큼직한 눈에 살짝 맺혀 고인 물기. 댈런이 말했다.

“울지 말고.”

“우, 울지 않았다! 전사는 안 운다! 눈알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다!”

타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그의 등허리를 두드려줬다. 어깨를 두드리기에는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그래도···이렇게 숫자가 적은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눈가를 문지르던 타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작게 한숨을 쉬고 뒤를 슬쩍 돌아봤다.

선두에는 그와 대족장 타룸이, 그 뒤로는 댈런의 일행과 석관을 짊어진 족장들이 따르는 장례 행렬.

전부 다 합쳐도 스물이 채 안 되는 머릿수였다.

세계의 이빨 산맥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장례라기에는, 지나치게 조촐한 숫자.

이번 싸움으로 족장들이 절반 넘게 죽지 않았더라면, 행렬을 뒤따르는 이들의 수는 지금의 배는 되었겠지.

“그래도 너희들이 있어서 쓰툼파도 쓸쓸하지는 않을 거다.”

씁쓸한 기운을 털어버리고 타룸이 말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샛길 안쪽으로 행렬을 이끌었다.

휘이이이···!!

샛길로 깊이 들어갈수록 거센 돌풍이 그들을 반겼다. 동시에 기온은 시시각각 급격하게 떨어져갔다.

펠버가 주문을 펼쳐내 냉기를 감쇄시키고, 루시아가 전투 기도로 활력을 복돋아야 할 지경.

댈런마저 용혈의 힘을 조금이라도 끌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느닷없이 돌풍이 잦아들고 시야가 탁 트였다.

후우웅······.

눈앞에 펼쳐진 건 북부의 끝없는 동토였다.

차르국의 동쪽 변방에서 시작되어, 동북쪽으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세계의 이빨 산맥이 끝나는 지점.

신이 무딘 칼날로 잘라낸 듯,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툭 튀어나온 샛길의 끝자락이 일행이 딛고 선 땅이었다.

발밑에서 구름이 넘실거리고, 저 너머에는 별빛 가득한 밤하늘이 북부의 새하얀 동토와 맞닿는다.

마치 우주가 대지를 맞이하러 내려오는 듯한 광경에, 일행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도 다르지 않았다.

시야 한켠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잠시 치워두고, 모니터의 조잡한 픽셀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절경을 감상한다.

구름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이는 저 끝없는 동토 어딘가에는, 이 대륙을 침공하러 현현했다는 쑴의 악마들이 있겠지.

당장 눈에 보일 리는 없지만, 머지않은 시점에 그와 만나게 될 테였다.

“모두들 첫 성소에 온 걸 환영한다.”

두건을 걷어내린 타룸이 말했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북쪽 땅을 내려다보듯 만들어진 작은 돌무덤 앞에 멈춰섰다.

“첫 성소는 예로부터 대족장과 그 후계자만이 올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의 칭구 쓰툼파가 묻힐 곳은 이제 무너지고 없으니···그의 시신은 이곳에서 흙과 바람으로 돌아갈 거다.”

타룸이 손짓했다. 그러자 석관을 짊어진 족장들이 앞으로 나와, 돌무덤 앞에 석관을 내려놓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석관 위에 올린 타룸은, 하얀 입김을 흘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옛날, 악마들이 이 땅을 짓밟고 다니던 시절. 대선조는 홀연히 내려와 하이 오크와 다른 종족들을 이끌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비어버린 왼쪽 소매가 펄럭인다.

펠버가 시간을 되돌려 다시 만들어주겠다 했음에도, 이번 일을 잊지 않겠다며 극구 거절해 남은 흉터였다.

“수백의 악마를 찢어버린 후에, 그의 검은 부러지고 도끼는 깨졌다. 대선조는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여기고 하늘로 돌아갈지, 이 땅에 남아 악마들을 끝까지 몰아낼지를.”

화륵.

타룸의 손에서 자색 불꽃이 피어났다.

“대선조는 땅에 남기로 했다. 악신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대가로 목숨을 바쳤지. 대족장 쓰툼파는 대선조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의 몸은 흙과 바람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대선조의 하늘 성소에서 실컷 먹고 싸울 수 있기를.”

타룸이 입을 다물었다.

석관 입구를 얇은 막처럼 뒤덮은 자색 화염은, 아래쪽에서부터 관을 천천히 갉아 없애기 시작했다.

불꽃에 바스라진 먼지가 바람에 실려 구름 사이로 사라져간다.

석관의 크기는 쓰툼파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했고, 때문에 완전히 먼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릴 듯했다.

댈런은 콧잔등을 조심스레 긁적이고는, 숙연한 분위기를 깨지 않게 조심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선조의 돌무덤 곁에는 잿빛 시체가 있었다.

지금까지 회수한 다른 시체들과는 달리, 정권을 뻗어내는 자세로 눈을 부릅뜬 무투가의 형상.

[회백의 투사의 시체]

- 멸망에 저항했던 무투가의 시체다. 하이 오크 대족장 쓰툼파와 깊은 친분을 다졌으며, 세계의 이빨 산맥에서 오랜 시간 은둔한 채 수련을 이어갔다. 북방을 침공한 쑴의 군대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으나, 성소의 싸움에서 패퇴하고 밀려난 끝에 악마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고 죽었다.

백 회차가 갓 넘어간 시점이었나.

눈앞의 시체는 백 번에 달하는 시도에도 도저히 클리어의 기미가 안 보이자, 아예 컨트롤 연습만 지칠 때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산에 틀어박혔던 회차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하이 오크들과 함께 대련이나 사냥에만 몰두하다가, 최후의 침공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 게임의 정신 나간 난이도를 제대로 체감하게 되었던 회차.

호전적이지만 먹을 것과 싸움에는 사족을 못 쓰는 하이 오크들과 친해진 것 역시 이때가 처음이었다.

‘시체 흡수.’

티나지 않게 조금씩 움직여 손을 뻗고, 의지를 집중하자 시체가 스르르 흩어진다.

시체가 빛무리로 변해 손끝으로 빨려들어오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함이 내면에 휘몰아쳤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뭐야. 왜 알림이 나오다 말아?

게임도 아니게 된 세상에 버그가 남아있나?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며, 댈런은 혹여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끔뻑거쳤다.

끔뻑.

끔뻑.

그리고 또다시 눈을 깜빡이자.

“···시발?”

방금까지 함께하던 장례 행렬은 죄다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어 있었다.

***

설산이었다.

세계의 이빨 산맥이 아닌, 캐릭터를 처음 만들면 시작하게 되는 그 설산.

발목까지 쌓인 눈밭 위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외딴 오두막 한 채밖에 없었다.

원래는 그래야 했을 것이다.

“아···이것 참 오랜만이군.”

하얀 입김을 흩날리며 설산의 정경을 돌아보고 있는, 이 거구의 남자가 아니었다면.

댈런보다도 머리 하나쯤이 더 큰 듯한 남자는, 뒷마당에 널브러진 장작 패는 도끼며 가죽을 널어두는 건조대를 하나씩 지긋하게 뜯어보았다.

그리움 같은 감정이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한, 이유 모를 의무감만이 묻어나는 시선과 동작.

댈런은 허리춤에 은근슬쩍 손을 가져갔다. 도끼는 다행히 멀쩡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거구의 남자가 그 호흡을 끊듯이 말을 시작했다.

“잊지 못할 정경이었다. 한때는 잊고자 노력했던 적도 있었지. 허나 십 년 동안 용병들과 함께 전장에서 구르고, 그보다 몇 배나 긴 시간을 산속에 틀어박혀 지냈음에도 잊었다 싶으면 꿈에 나타나곤 했었다.”

“······.”

“향수는 아니었다. 이곳에 내가 그리워할 거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하이 오크들과 보냈으니, 친근감 또한 아니지. 대영역을 이루고서야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내 모든 것의 근원지가, 이 눈 덮인 산이기 때문이었음을.”

남자는 턱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댈런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턱을 긁적이려던 댈런은, 그 눈빛에 잠깐 손을 멈칫거렸다.

물론 잠깐이었다. 간지러운 걸 긁지 않고 둘 정도로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 행동을 본 남자가 낮게 웃었다. 왠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댈런은 상대방도 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따라 웃어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말했다.

“댈버.”

“···역시, 내 이름을 아는구나.”

알 수밖에 없지. 내가 만든 캐릭터 이름인데.

2미터 50센티쯤 되어보이는 키. 바윗덩이 같은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친 가죽옷.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길게 길러 묶은 회백색의 머리칼은, 나름 신경써서 커스터마이징한 외견이었다.

물론 그 피부 위에 수없이 뒤덮인 흉터들과, 전신에 새겨진 또렷한 백색 문신은 플레이를 하며 생긴 후천적 요소들이었고.

“오래도록 기다렸다. 시간의 개념마저 상실하게 되는 역천의 우물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의 은총을 누리지도 못한 채로, 다시 한 번 이 설산에 발을 들이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구릿빛 주먹을 움켜쥔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떨렸다.

남자가 선 곳에서 반경 수 미터의 눈이 녹아내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얕게 우르르 진동했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사선 뒤로. 가볍게 쥔 주먹을 들어올려 댈런을 겨눈 남자가, 낮게 끓어오르는 듯한 음색으로 말했다.

“오라, 마침내 시간선을 넘어 도착한,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자여. 네가 정녕 이 모든 것의 끝을 볼 자격이 있는지···내 손으로 재단해보겠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도끼머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뺐다.

검지로 도끼머리를 톡톡 건드리던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엿 됐군.”

옛날 캐릭터랑 미러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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