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백의 투사(2)
이전 캐릭터와의 결투.
DLC 안내문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죽은 캐릭터의 힘을 회수할 수 있다고만 했지, 그 캐릭터랑 치고받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게임이었다면 컨텐츠 넘친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건 게임이 아닌 칼에 찔리면 죽는 현실이었다.
1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주먹 쥔 사내를 눈앞에 두고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야, 댈버.”
“말하라. 별들의 시선이 주목하는 자여. 허나 질문을 받지는 않겠다. 네가 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는 게 먼저니까.”
“···그러냐.”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칼 같기는.
의문과 추측들이야 많고 많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 대답들의 일부나마 손에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하지만 그 당사자가 역천의 우물이니 시간선을 넘었니 하는 소리만 늘어놓을 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줄 의향은 하나도 없어보인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겠지.
스륵―
착 감기는 손잡이.
설산의 반사광에 번짝이는 도끼날.
번개같이 뽑아든 손도끼는, 많고 많은 의문들을 대신해서 눈앞의 사내에게 돌려줄 첫 번째 대답이었다.
댈런이 말했다.
“일단 좀 맞자.”
맞고 나면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줄 마음이 생기겠지.
휘리―!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 동시에, 도끼 쥔 오른팔이 흐릿해지고.
쐐애―!
공간을 빗겨내며 자취를 감춘 손도끼가, 남자의 얼굴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어엉!
무언가를 쪼갰다기에는 좀 이질적인 피격음.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끼를 잡은 것이었다.
심지어 손잡이를 잡은 것도 아니고, 날 부분을 손아귀 힘으로 움켜쥔 것.
“과연, 기대한 대로 좋은 대답···!”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황금빛 폭발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폭발의 여파에 바닥에 쌓인 눈이 확 밀려나며 눈보라처럼 휘몰아친다. 댈런은 눈보라를 정면에서 뚫고 달려들었다.
널널한 가죽옷이 역풍에 펄럭거린다. 하이 오크들이 입던 걸 적당히 수선해서 만든 임시 복장이었다.
르베론의 대장간에서 받았던 갑옷은 대족장과 싸우며 망가져 못 쓰게 되었던 탓.
‘여분 갑옷을 아공간에 넣어 다니던가 해야지.’
집이 좁아진다며 투덜거릴 악마의 목소리를 예상해보면서, 설산에 몰아치는 마력의 바람을 팔다리에 휘감는다.
「술식갑주(術式甲冑)」
「화염갑(火焰甲)」
“크하하하! 따끔하구···으읍!”
유물 무기의 폭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버린 사내의 안면을, 화염을 둘러 두 배쯤 커진 손아귀로 움켜쥐고.
「답보(踏步)」
발 디딜 곳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밀어차며, 폭발하는 마력을 완력으로 치환해 남자를 내던진다.
꽈앙―!
포탄처럼 쏘아진 두 신형이 오두막을 부수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급변하는 시야 아래쪽, 산 아래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득하게 스쳐지나갔다.
연달아 허공을 걷어차며 내던져진 남자의 몸뚱이를 따라잡고, 답보로 그 위를 점한 뒤 튕기듯이 다리를 내려찍는다.
「화염갑 : 홍류섭(紅流燮)」
뻐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서 터져나오는 새빨간 불꽃.
남자의 몸뚱이가 붉은 화염의 폭포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구구구···!
눈 쌓인 침엽수들이 이쑤시개처럼 꺾여나가고, 산비탈에 흘러내린 불꽃이 확 퍼지며 동면하던 일대의 초목을 불태워버린다.
댈런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발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얀 눈밭을 씻어내고 불타오르는 수 미터 반경의 화염구덩이. 그 한가운데 깊이 처박힌 남자의 갈색 눈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흐으···꽤 하는군.”
남자는 멀쩡했다. 피부가 약간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뿐이었다.
성소 수호자의 단단한 육체마저도 무너뜨렸던 일격에, 남자는 오히려 흥이 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이 정도도 안 됐다면 실망할 뻔했어.”
씰룩이는 입꼬리에 묻어나는 옅은 광기.
싸움에 미친 종족과 수십 년을 같이 살더니, 본인까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한때 키웠던 캐릭터의 정신상태를 의심해보려던 찰나, 남자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투확―
남자가 서있던 자리, 한 발 늦게 솟구치는 잿더미.
스아아아―!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살기가 몰아치는 것과 함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좀 더 놀아보자고.”
「회명(回冥)」
황급히 뒤돈 순간 시야에 담긴 건, 청명한 하늘 아래 번뜩이는 잿빛 그림자였다.
허공에 난데없이 드리워진 음영의 자투리는, 분명 저 무투가 캐릭터가 익혔던 고유 스킬들의 이팩트 중 하나.
한계를 초월한 근력과 기량을 동원해, 몸뚱이 자체로 공간의 틈을 비집고 넘나드는 이동기이자.
남자에게 회백의 투사라는 이명이 붙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쉬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주먹을 내질렀다. 섬전같은 권격이 댈런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쩌어어어엉―!
“이런 씹···!”
양팔을 교차해 막았음에도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콰지지직― 쿠궁! 쿵!
경로의 나무를 등판으로 죄다 꺾어버리고도 모자라, 댈런의 신형이 물수제비를 하듯 지면 위를 퉁퉁 튀어올랐다.
“크흐흐······.”
남자는 허공을 딛고 선 채 낮게 웃으며, 산에 길쭉한 자취를 남기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화르륵!
“···응?”
주변에서 느닷없이 수십 개의 하얀 불씨들이 피어오르며, 남자의 웃음을 끊어놓기 전까지.
「발화(發火)」
「성류옥(聖蘲獄)」
촤자자자작!
씨앗에서 덩굴이 자라는 장면을 수천 배 가속하듯, 순식간에 뻗어나온 백색 화염의 줄기가 서로 얽혀들기 시작한다.
얽히고 교차하며 큼직한 구를 만들어내, 마치 덩굴로 만든 감옥처럼 남자가 선 공간을 닫아버린 화염의 줄기.
난데없이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이글거리는 신성력을 눈치챈 남자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단의 신성력···설마 신성 문신을 받고 기적을 익혔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아무 전조도 없이···.”
빠르게 좁혀오는 화염의 창살을 거친 손아귀로 붙잡아 멈춰세우는 것과 함께, 한껏 달아오른 남자의 두뇌가 오랜 전투 경험으로 이 상황을 역산했다.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남자가 딛고 선 허공은, 바로 조금 전까지 댈런이 서있던 공간이었으니까.
“···내가 뒤에서 기습할 걸 예측한 건가!”
화염의 폭포와 함께 남자를 지면에 처박은 직후.
후속타를 넣는 대신, 허공을 딛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공에 뒤따른 방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이 감옥을 몰래 깔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라면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고유의 비기 중 하나를 드러내면서까지 배후로 돌아 역습을 가한 일이, 오히려 상대방이 준비한 함정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다음 수를 읽어내고 예상했다는 듯한 전투 방식.
사실상 농락당했다는 걸 알아챈 남자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놈이···!”
그그그그극···!
새하얀 화염의 창살이 초월적인 완력만에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남자의 갈색 눈이 숲을 부수며 날아간 댈런의 자취를 쫓았다.
주먹질 한 방에 수십 미터를 튕겨나간 댈런은, 거적떼기가 된 가죽 상의를 찢어버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혔군.’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키워낸 캐릭터다.
고유 스킬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다지만, 대충 어떤 식으로 전투를 이어가는지는 수백 번도 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상대방의 다음 수가 눈에 들어온 이상, 필요한 건 그 의중을 역으로 찌를 수 있는 강력한 한 방.
성화의 불씨에서 비롯된 고유 스킬 ‘발화’.
그리고 샤니아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익힌 ‘살아 움직이는 뿌리’.
그 두 가지의 조합은 그 한 방을 만들어내기 위한 첫 번째 안배였다.
그그극― 콰직!
버티다 못한 창살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댈런은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저 건너편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적과 주문을 융합해낸 결과물을 맨손으로 우그러뜨리는 남자의 완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초조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스스로 밟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댈런이 예정해둔 두 번째 안배가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까.
“말했지.”
끓는 피를 뱉고서, 보란듯이 씩 웃는다.
“일단 좀 맞자고.”
쿠르르릉···.
어느새 먹구름이 모여든 하늘.
드리워진 그림자를 가르고, 저 머나먼 설산의 봉우리에서부터 한 줄기 빛살이 내달린다.
날아드는 빛살의 속도는 소리보다도 아득하게 빨랐지만, 남자의 동체시력은 그 정체를 간파하기에 충분히 뛰어났다.
“성검···토르타니스!”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먹구름을 환하게 밝히는 섬광.
하늘로부터 몇 번씩 꺾이며 내리꽂는 빛의 기둥이, 날아오는 성검의 궤적과 아슬아슬하게 겹쳐들었다.
“이런 썩을···!”
이를 악문 남자가 거세게 팔을 휘저었다.
콰지지지직!
그 힘만으로 불꽃의 덩굴들이 사정없이 끊어졌지만, 남은 덩굴들이 더욱 바짝 조여들며 남자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저항은 잠깐 뿐.
뛰어난 전사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뇌격(雷擊)」
번쩍―!
성검과 하나가 된 푸른 번개가, 남자의 신형을 휩쓴 것과 동시에 숲을 강타하고.
꽈르르르르릉!!
뒤따른 뇌성이 지면에 닿을 무렵, 밝은 빛이 세상을 뒤집었다.
***
쿠르르르······.
충격을 이기지 못한 설산의 비탈이 무너진다.
저 멀리서 쏟아지는 산사태를 관망하던 댈런은, 시선을 돌려서 깊은 구덩이 한가운데를 바라봤다.
검게 물든 대지.
불타 바스라진 나무.
수 미터 깊이의 구덩이 한가운데에는, 거구의 전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검게 탄 피부는 쩍쩍 갈라졌고, 어깨부터 반대쪽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가 피를 왈칵 쏟아냈다.
분명 치명상이라 여길 수 있었지만, 그걸 본 댈런은 도리어 혀를 얕게 찼다.
“그걸 피하냐.”
댈런은 손을 슬쩍 휘저었다. 그러자 남자에게서 몇 걸음쯤 떨어져 꽂혀있던 성검이 자연스레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제대로 들어갔다면 남자의 몸을 꿰뚫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을 일격이었다.
물론 댈런도 이 한 방으로 승패가 결정되리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예상했던 것에서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제대로 맞으면 악마도 날려버리는 공격을 저 정도까지 흘려낸 건, 남자의 체술이 상식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섰다는 의미.
성류옥에 속박되어 움직임이 제약된 상태에서 대체 어떻게 몸을 뒤튼 것인지, 능력치가 뻥튀기된 몸뚱이를 입고서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으으···잘 알겠다. 적어도 네가 예언이 가리키는 인물이라는 건, 이걸로 인정할 수 있겠군.”
저벅.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얼핏 무방비해 보이는 몸짓.
그러나 댈런은 섣불리 다가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댈런은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지금 내비치는 빈틈 하나하나가, 모두 수십 년간 쌓아온 무투가의 경험 아래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라는 것을.
“···허나 역천의 우물에서 보낸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수긍할 수 없었다. 무의 끝을 보았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겨내지 못한 종말을, 다른 누군가가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
작은 손짓. 발끝의 방향. 머리를 젓는 동작. 무릎을 터는 행동까지.
하나하나의 동작 속에 무리(武理)가 녹아들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최상의 효율을 만들어낸다.
조금 전까지의 싸움과는 완벽하게 달라진 공기. 그게 이야기하는 바는 명백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초장부터 지금까지 다소 가벼운 태도로 싸움에 임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런 자세로 임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증명해보도록 해라. 정말로 예언이 말한 대로, 네가 모든 시간선의 가능성을 모아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자인지. 그리고···”
주먹을 쥔다.
검게 탄 피부가 찢어지고.
그 아래에서 백색 문신이 빛을 토해내며.
온몸이 회백색으로 물든 것과 동시에,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걸 위해 내 모든 걸 받아갈 자격이 있는지.”
머리칼과 같은 회백색의 일렁임이, 댈런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세상이 잿빛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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