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67화 (167/288)

회백의 투사(3)

영역의 힘.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건 그저 모호한 게임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수백 번씩 되풀이되는 회차들 속에서, 대영역을 이룬 캐릭터들은 몇 명이나 존재해왔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방식의 한계였던 걸까.

각종 부가 효과나 등으로 명확하게 나타났던 고유 스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영역 개방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몇 번의 이펙트가 끝이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볼 수 있던 건 과정이 생략된 결과뿐이었지.’

번쩍거리는 수차례의 이펙트가 사라진 뒤.

화면에는 서로가 어떤 버프와 디버프를 주고받았고, 얼마만큼의 피해를 교환했는지만이 나타날 뿐.

때문에 영역 개방이 대충 필살기 비스무리한 능력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파헤치기는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과 땅을 보는 건 댈런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 회백색 대지 위를 내달리며, 공간의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투사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고.

「회명(回冥)」

잿빛 그림자가 일렁이고, 남자의 거체가 흐릿해진다.

단순한 눈속임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신비를 꿰뚫는 파영의 마안도, 암월단의 유물 중 하나인 환상 살해자도 소용없었다.

찌지지지직―!

마치 질긴 천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남자의 신형이 증발하듯이 모습을 감추고.

다음 순간 댈런 주변의 여덟 방위를 점한 채 모습을 드러내며, 동시에 여덟 갈래의 공격을 동시에 뻗어낸다.

「팔연답산(八聯踏散)」

두두두두두두―!

팔다리를 휘두르는 단순한 공격들.

허나 그 한 방 한 방에 담긴 파괴력은 집채만 한 바위도 너끈히 부술 정도다.

공기를 뒤흔드는 파공음의 한가운데, 댈런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술식갑주 : 백풍갑(伯風甲)」

「열풍(裂風)」

찰나 동안 느려진 시간.

일순간에 팔과 다리를 휘감는 회오리바람.

델로스 마탑의 주문인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해, 술식 그 자체를 갑주로 삼아내며 팔방위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맞선다.

휘이이이···!

팔다리를 중심축 삼아 수십 갈래로 찢어진 바람이, 공세의 타점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들고.

존재하지 않는 틈을 억지로 비틀어 열어내면서, 동시에 짓쳐오는 공격 사이에 시간차를 만들어 대응해낸다.

치이이익!

검면을 정권에 가져다대어 흘린다.

후우웅―!

고개를 슬쩍 틀어 머리를 노리는 발차기를 피한다.

정면에서 찍어올리는 무릎. 한 발 나아간다. 내디딘 다리로 허벅지를 밀어내 방향을 비틀어버리고, 옆구리를 찔러오는 수도를 팔꿈치를 내리찍어 쳐낸다.

사각을 노리는 손끝과 발끝.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걷어내며 피해를 최소화한다.

이 모든 공방을 주고받은 시간은, 일반인이라면 인지하지도 못할 찰나의 간극.

들이쉰 호흡이 다하는 순간, 느려졌던 세상이 속도를 회복하며 십수 번의 파공음이 동시에 몰아쳤다.

쩌저저저저──!!

“후우―”

거칠어진 호흡. 가다듬을 여유는 없다.

땅을 밀어차 몸을 뒤로 뺌과 동시에,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흐릿한 신형이 내려찍혔다.

콰아아아앙!

내리찍은 발밑에서 쩍 하고 갈라지는 지면.

그 위력에 감탄할 새도 없이, 남자의 손발에 일렁이는 잿빛 기운이 휘둘러졌다.

「회백투영(灰白鬪影)」

「이팔지순(二八至瞬)」

회백의 기운이 실존하는 팔다리의 형태를 띠고 쇄도해온다.

거머쥔 주먹. 쫙 펼친 손바닥. 손날과 발끝, 팔꿈치와 무릎, 머리 위에서 내리찍는 발뒤축까지.

평범한 인간이 맨몸으로 한 번에 내지를 수 있는 공격은 오직 하나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손발은 네 개뿐이라는 상식을 정면에서 깨부수는 스물여덟 갈래 공세.

대족장이라도 막아내지 못했을 잿빛 파도의 면전에서, 댈런은 성검을 놓고 재빠르게 수인을 맺어냈다.

「염사(炎巳)」

땅이 화염을 토해낸다.

지면을 뚫고 솟구친 염열의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쏟아지는 잿빛 공세를 역으로 덮쳐들었다.

으지지지직···!

화염의 뱀마저도 남자의 공세를 막아내진 못했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전소시킬 수 있는 불길이, 권각에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는 건 말 그대로 한순간.

하지만 상관없었다.

댈런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그 한순간의 여유였으니까.

우르릉···.

염사가 벌어다준 일말의 지체를 틈타, 저 너머의 하늘이 나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검붉은 먹구름이 잿빛 천구를 짓뭉개며 강림해, 수십 줄기의 불기둥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대하주염(垈煆柱炎)」

이글거리는 화염 기둥이 잿빛 대지를 덮쳐든다.

마치 도화지 위에 유화의 물감을 덧칠해가듯, 회백색 세상 위에 덧씌워지는 붉음.

먹구름이 휘두르는 수십 줄기 붓끝은 스물여덟 갈래의 공세를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남자의 신형을 뒤쫓으며 그 존재마저도 덮어씌우려 했다.

“뛰어나다! 가히 역천의 우물이 선택했다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염열의 향연에, 공간을 건너뛰며 불기둥을 피해 다니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허나 아직도 부족하다! 산봉우리를 날려버린 내 마지막 일격마저도, 쑴의 갑옷에 고작 흠집을 내는 데 그쳤거늘! 하물며 나 하나도 손쉽게 쓰러뜨리지 못하는 네가 다섯 악신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 마디 한 마디에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난다.

세상을 집어삼킨 종말을 향한 분노.

끝내 이겨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

회한과 두려움, 질투, 아집. 녹진한 울컥임이 남자가 내뱉은 문장마다 뚝뚝 떨어졌다.

그즈음 남자의 전신을 뒤덮은 백색 문신이 눈부실 정도로 빛을 내뿜고, 갈색 눈동자마저 돌변해 회백색 광채를 흘리기 시작했다.

‘백색 주술문신···하이 오크들이 동족으로 인정했다는 상징이지.’

댈런은 저 문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얼핏 하이 오크들에게 새겨진 것과 유사한 문신은, 족장들 중에서도 뛰어난 주술사들이 힘을 모아 새겨 넣어준 종족 차원의 선물.

종족이 다름에도 수십 년간 가족처럼 함께하며, 숱한 난관을 함께해온 그를 동족의 일원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어서 나를 납득시켜 보란 말이다! 날 이겨! 그리고 내 힘을 취해보라고!”

당연하겠지만 문신의 능력 역시 하이 오크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과 지성을 투지의 연료로 삼아, 평소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방식의 주술.

하이 오크 족속만큼이나 단순해져가는 말투 역시, 지성과 감정을 불태워가며 본인의 무력을 높여낸 결과의 부작용이겠지.

그리고 많은 것을 희생한 만큼, 나타나는 효과 또한 극명했다.

쩌어어엉!

쏟아지는 불기둥을 향해 주먹을 꽂아넣는다.

굉음과 함께 공간이 이지러지며, 직경 수 미터의 불기둥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하고 꺼졌다.

먹구름이 쏟아내는 수십 갈래의 불기둥을, 단신의 권격만으로 모두 상쇄해내는 기예.

‘아니, 이 정도면 기예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지.’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다.

들려오는 파공음은 단순히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아닌, 공간 그 자체가 으깨지는 파괴의 소음.

남자의 성명절기인 고유 스킬 ‘회망’이 무투가로서 공간과 간격이 의미하는 바를 깊게 연구한 끝에, 그림자 주술을 매개로 삼아 공간의 틈을 파고든 기예였다면.

지금의 권격은 그걸 넘어서서, 아예 공간을 짓씹고 으스러뜨리는 이적이나 다름없었다.

쩌정─ 쩡─

단순한 권격에 공간이 터지고 으깨진다.

그 파괴력은 영락했던 전대 청린용의 숨결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마지막 불기둥을 날려버린 남자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댈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흐···으······.”

투지로 이글거리는 눈빛.

일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한 살기.

처음 설산의 정경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감탄하던, 무를 갈고닦은 전사의 평정심이라고는 온데간데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평온은 모두 날아가고,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상처 입은 맹수만이 남아있을 뿐.

쿠드드드드득···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뒤로.

주먹을 천천히 뒤로 당기자, 공간이 뒤따라 비틀리며 남자 주변의 풍경이 휘어졌다.

“······.”

댈런은 살기등등한 남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했다.

움켜쥔 주먹과 부릅뜬 눈은, 대족장의 장례식에서 봤던 잿빛 시체와 닮아 있었다.

악마의 군세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뒤, 선 채로 생을 마감한 투사의 모습.

어쩌면 지금 남자의 눈에 비치는 건 댈런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계곡을 가득 채우고 달려들던 악신의 군세일지도 모르지.

쿠르르르르······.

그렇다면.

증명해주면 될 뿐이다.

최후의 그날에 설산의 봉우리를 날려버렸던 일격을, 악신 쑴이 정면에서 받아냈던 것과 같이.

댈런 역시 그 필사의 일격을 홑몸으로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면 되는 일.

그로써 회백의 투사를 무릎 꿇렸던 그 절망과 비교해, 댈런이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만 한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던 투사의 심중에도,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날 수 있겠지.

후우.

숨을 그러모은다.

그것만으로도 사지육신에 새로운 기운이 가득 채워졌다.

검술과 주문, 용혈, 기적, 등등.

지금에 이르러 수십 개의 가능성으로 뻗어나왔지만, 시작이 되었던 가능성은 그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후우.

낙뢰를 부르는 성검도, 먹구름을 만드는 주문도 없이 뇌성을 불러낸 최초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미궁도시의 광산 깊은 곳.

사교도들의 심처에서 빚어냈던 일격.

악마의 힘을 덧입은 대사도를 쓰러뜨렸던 그 권격을 되새기며, 댈런은 눈앞의 전사와 비슷한 자세로 주먹을 당겨냈다.

서로를 향해 주먹을 겨눈 채, 수십 미터나 떨어진 두 전사의 사이.

쉭―

팽팽한 공기가 깨진 건, 단 일순이었다.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회력파주(灰力破柱)」

한 권격에 공간이 으스러졌고.

「닫힌 설산의 하늘」

「권(拳)」

한 권격에 뇌성이 울려퍼졌다.

━━━━━━!

그리고 세계가 찢어지면서.

두 인영의 뒤쪽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 설산의 봉우리 두 개가 불현듯이 사라졌다.

***

‘···런······’

희미한 속삭임들.

‘댈······일어···!’

목구멍을 두드리는 비릿한 혈향.

“···런! 댈런!”

이내 코와 입으로 역류하는 열기가 정신을 바짝 일깨운다.

댈런은 눈을 번쩍 떴다.

“쿨럭! 커헉!“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욱신거리는 격통.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용혈을 온몸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툭. 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심장 어림을 몇 번 두드린다. 그러자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심장이 저 스스로 박동을 늦춰갔다.

“댈런! 댈런! 정신이 좀 드십니까!“

가까스로 시선을 돌리자 루시아가 보였다. 그리고 걱정 어린 눈길로 지켜보는 다른 일행들과, 그 너머의 푸르른 하늘도.

‘···하늘?’

루시아가 있는 걸 보니 여긴 현실인데. 내가 언제 누워있었지?

그런 의문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다시 한 번 전신을 내달렸다.

“크으윽······.”

“일어나지 마십시오, 댈런! 지금 몸 상태가 어떤지 모르십니까?”

“어, 어떤···.”

“한 시간쯤 전에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습니다. 근육과 뼈마디가 죄다 으스러지고, 장기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고요!”

시발. 그게 대체 무슨 소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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