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68화 (168/288)

회백의 투사(4)

입을 열기도 힘들어 가만히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자,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펠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 자네가 갑자기 쓰러졌네. 온몸이 으스러져서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었어. 시간도 되돌려지지 않고, 루시아의 신성력도 거의 통하지 않더군. 그나마 용의 재생력 때문에 버텨낸 것 같은데······.”

“···쿨럭, 그래서?”

“짧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인간의 기준에서 자네는 쉰 번쯤은 죽었다가 살아났네.”

“칭구. 죽었다. 온몸이 으스러졌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리고 또 죽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죽고 살았다.”

대족장 타룸이 펠버의 말을 거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멍청한 말투인 걸로 봐서, 저쪽도 적잖이 놀라기는 한 모양이었다.

[영역에 난입한 불청객이라, 기이한 일 투성이로구나. 역천의 우물을 언급하는 걸 보아하니 이 시간선의 존재조차 아니던 모양이던데···아무튼 잠시 심장을 빌렸느니라. 이대로면 싸움에서 이기고서도 죽을 게 뻔히 보였거든.]

‘내가 이겼단 말이오?’

[그럼. 이겼지. 네 몸이 상한 것도 팔 할은 네 스스로 한 짓이니라.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구나. 놈의 마지막 일격이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서야 받아내기 힘든 위력이라는 건 알겠지만, 정말 스스로의 목숨까지 태워버릴 작정이었느냐?]

‘······.’

[뭐···굳이 말하자면 감명 깊은 짓거리이긴 했느니라. 상대방은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했으니까.]

심상 너머 적창이 약간의 핀잔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제야 머릿속에 상황이 좀 그려지는 듯했다.

영역에서의 싸움은 그의 승리였다.

정확히 어떻게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최후의 격돌에서 살아남은 게 이쪽이었으니 승패는 명백했다.

다만 문제라면 그 격돌의 여파에 더해, 마지막 일격을 날린 반작용이 후폭풍으로 현실의 육신까지 강타했다는 것.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날린 일격의 기반이 되는 심상은 오래 전, 처음으로 영역의 힘을 끌어냈던 권격의 기억.

어떤 스킬의 도움도 없이 대사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그 권격은, 당시에도 스스로의 몸을 으스러뜨리곤 했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그대로 뒈질 뻔할 줄은 몰랐는데.’

당시에는 팔 한 쪽을 박살내고 오장육부를 적당히 손상시키는 선에서 끝났던 반작용이다.

물론 일반인의 시선에서야 죽기 직전까지 간 거나 진배없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 수준의 폐혜는 아니었던 것.

‘···하긴. 마지막 순간에 산봉우리가 날아가는 게 보이긴 했으니까.’

그 정도 파괴력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육체라도 버텨낸 것 자체가 기적이긴 했다.

용심장을 바탕으로 하는 온전한 용혈의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원주인인 적창의 개입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세상에 가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어쨌든 적창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승리는 맞았으니, 이제 힘을 회수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물을 차례···.

“···가만. 시체···시체는?”

“시체요? 장례를 말하는 거면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불현듯이 스치는 생각에, 댈런은 잿빛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선조의 돌무덤 곁, 회백의 투사가 최후의 일격을 내뻗었던 자리에 시선이 닿은 순간이었다.

[회백의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4, 기량 +3, 체력 +2, 감각 +3, 지능 +1, 마력 +2, 회명(고유), 회백투영(고유)]

본 적 없는 길이로 주르르 나열되는 알림창과 함께, 온몸을 덮칠 듯이 쏟아져오는 빛가루의 파도.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빛무리가 전신에 스며듦과 동시에,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막대한 힘이 차올랐다.

***

꾸드드드득···!

온몸의 근육이 섬유 단위에서 재배열된다.

모든 감각이 왈칵 뒤집어졌다가 바로잡힌다.

용혈이 흐르는 혈관에 끓어넘치는 마력과, 손끝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오는 기묘한 전능감.

탈력감을 모두 메꾸고도 흘러넘쳐 전신을 내달리는 미지의 힘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자극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시 상태가 악화되나 싶어 놀란 루시아가,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신성 문신에서 빛을 내뿜는 순간이었다.

“댈런, 괜찮···!”

“가만. 그대로 내버려두게.”

가장 빨리 이변을 눈치챈 건 다름 아닌 펠버였다.

루시아를 제지한 노인은 낮게 끌끌 웃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댈런을 바라봤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네만···아무래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니까.”

새로운 깨달음.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폭증한 능력치로 신체가 변화하는 사이, 절정에 다다른 무투가가 이뤄낸 고유 스킬의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육체가 회복되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

하지만 되살아난 몸 상태에 적응하기도 전에, 어떤 굳센 의지가 그의 의식을 잡아끌고 강제로 내면을 향해 시선을 돌려냈다.

쿠르르릉···.

하늘을 가득 채운 검붉은 먹구름과, 그 먹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수십 개의 봉우리가 늘어선 영역의 정경.

개중 두 봉우리만이 망치로 날려버린 듯 윗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댈런과 회백의 투사가 치고받았던 싸움터가, 바로 그 두 봉우리 사이에 넓게 펼쳐진 대지.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선명한 땅 위에 시선을 집중하자마자, 회백의 투사가 가진 심상의 정수가 보란 듯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치지지지직······!

물들어간다.

통에 담긴 물감을 왈칵 쏟은 것처럼, 대지와 천구 위에 빠르게 잿빛이 퍼져나갔다.

광대한 면적이 회백색의 음영으로 물들어가는 동안, 댈런의 머릿속에서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흐릿한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처음 눈을 뜬 설산의 오두막.

십여 년간의 용병 생활.

산속에 파묻혀 수십 년간 수련에 몰두하며, 하이 오크들과 동고동락한 끝에 동족으로 인정받았던 시간들.

대영역을 이루고 무의 끝을 향해 달려가며, 한때 갈망했던 재물과 명성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하다 느꼈다.

어느날 산맥을 침공한 거대한 악신의 군대가, 그 모든 일상을 깨부수기 전까지는.

‘크아아아악!’

‘댈버 칭구! 내 부락을 부탁하···커어억!’

가족이나 다름없던 전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고.

‘···댈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스승이자 둘도 없는 친우였던 대족장 쓰툼파마저 무릎을 꿇었다.

성소 뒤쪽에 비밀스레 숨겨진 대선조의 돌무덤. 그곳에서 대족장의 심장이 멈추는 걸 지켜보며, 댈버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에 휩쓸렸다.

무력했다.

그리고 분개했다.

그 모든 감정을 제물로 태워내어, 골짜기로 짓쳐오는 악마의 군세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생명을 불살라가면서까지 날린 권격에 수백의 마물과 열에 달하는 악마가 찢겨나갔다.

공간이 으스러지며 골짜기가 무너지고, 드높이 솟은 산봉우리마저도 증발했다.

그럼에도 악신에게는 닿지 못했다.

쑴의 검격 한 번에 지워진 공격은, 놈의 갑옷을 조금 구기는 정도에서 그쳤을 뿐.

‘이제 나를 이해할 수 있겠나.’

투사의 주마등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잿빛 천구 아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건 회백의 투사가 남긴 잔류 사념이었다.

폭발하던 감정은 죽음 앞에 모두 흩어지고, 무미건조해진 투사의 음색.

댈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하지 않을 거요.”

‘···뭐라?’

목소리에 의문이 어린다.

실체도, 형태도 없는 잔류 사념일 뿐이지만 댈런은 진심을 담아 대답해주었다.

“나는 쑴의 목을 칠 거니까.”

‘······푸흐, 과연 그렇군.’

한참이나 뒤늦은 대답. 건조한 음색 위에 얕게 감정이 쌓인다.

곧이어 잿빛으로 물든 대지와 천구가, 서서히 설산의 풍경에 융화되기 시작했다.

“······.”

스며든다.

산속에서 수십 년간 쌓아올린 무의 극치가.

마지막 순간 악마의 군세를 짓이긴 일격에 담긴 감정이.

설산의 일각에 자리잡은 회백색의 영역은, 그렇게 댈런의 의지 아래 기존의 영역과 하나가 되었다.

무의 핵심 중 하나인 간격을 비틀고 넘나든 끝에, 최후에는 공간 자체를 으스러뜨린 무투가의 유산이었다.

‘너에게···맡겨 보겠다.’

힘을 다한 듯한 목소리가 회백색 천구와 대지를 아스라이 울렸다.

윗부분이 날아간 두 산봉우리 사이를 공허하게 메아리치다가, 스르르 자취를 감춘 속삭임.

목소리가 사라진 잿빛 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절벽 위에 웅크리고 앉은 용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각별한 존재였느냐?]

댈런은 고개를 기울였다.

각별하다라. 그런가.

애정이 담긴 분신 같은 존재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가상의 캐릭터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요동이 느껴지는 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던 투사의 기억 때문일까.

32인치 화면에 떠오르던 수십 시간의 플레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한 인생이 시작되고 저물어간 수십 년의 기억.

[그 투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느껴졌다만.]

‘···있었지.’

이 세계는 무엇인지. 나는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어째서 그간 수많은 캐릭터들의 힘을 회수할 수 있었던 건지. 그들은 원래 어디에서 온 존재들인지.

수많은 의문들과 확정되지 않은 추측들은, 지금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금껏 수십 구의 시체를 회수했지만, 댈런은 그중 단 하나도 뇌리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잿빛으로 물든 죽음의 순간들은, 색이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감정을 절절하게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게임 캐릭터의 가짜 죽음이 아니다.

실존하는 세계에서 살아 숨 쉬던 한 사람의 마지막 장면.

심심풀이로 플레이하던 게임이 누군가의 인생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음 구석진 곳에 스며들었던 의문은 단 한 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없소. 적어도 지금은.’

댈런은 피식 웃으며 잡념을 털어버렸다.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획득했고, 그에 못지않은 경험 역시 얻어냈다.

잿빛 천구 아래 메아리치던 힘없는 속삭임에, 평안함이 깃든 걸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머지않아 회백의 투사와 같은 초월자들의 시체를 회수할 기회는 또 생길 터.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들은 그때 풀어내도 되는 일이다.

‘대영역을 이룬 캐릭터들···그 시체들을 찾아나서야겠군.’

생각을 갈무리하고 내면의 시선을 거둔다.

영역에서 눈을 돌려 현실로 돌아오자, 열 쌍이 넘는 걱정 어린 시선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족장 타룸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말했다.

“괜찮나, 칭구?”

“보다시피 완전히.”

“천 년에 한 번 정도, 대선조의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는 하이 오크가 있다고 알고 있다.”

대선조라. 그 양반은 어차피 하이 오크 아닌가?

타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타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댈런, 혹시 너는 변장한 하이 오크인가?”

“아니다. 걱정 마라. 그리고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너희 대선조와는 무관한 일이다.”

“다행이군.”

나직하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하이 오크다웠다.

하이 오크의 대족장은 대대로 종족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가 거머쥐는 자리.

이번 내전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댈런이 사실은 대선조의 선택까지 받은 하이 오크라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이 오크의 대족장은 너다. 넌 잘 할 거다.”

“고, 고맙다.”

댈런은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기 대족장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는 게 기꺼웠을 따름이었다.

먹을 것과 싸움에 취해 다른 건 생각도 하지 못하는 하이 오크가 태반이다.

강맹한 전사인 동시에 돌대가리인 이들 종족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권력욕이 뭔지 알 정도의 시야는 가져야 할 터.

하이 오크의 존망은 그저 이들 종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시작될 대전쟁에서 이들 종족 역시 큰 힘이 되어줄 테였으니까.

“대선조는 위대한 하이 오크다! 그의 도끼와 검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댈런의 격려에 한껏 자신감이 부풀어오른 걸까.

족장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타룸을 보며, 댈런은 낮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대선조의 돌무덤 곁, 흐릿하게 보이는 한 인영을.

“······.”

종족은 인간. 키는 댈런과 비슷했다.

2미터 남짓에, 덩치 역시 그와 엇비슷한 수준.

남자는 한 손에는 큼직한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실체도 아니고, 영체도 아니었다.

신비나 환상일 리도 없었다. 남자의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뚜렷했으니까.

“노인장. 저건 뭐···.”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며 펠버에게 묻는 순간, 검은 눈동자가 댈런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응? 뭐 말하나?”

“···아니오.”

댈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족장 타룸의 일장연설이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로써 장례는 끝난 것이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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