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3)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던 전대 차르들의 치세 하에서도, 일부 충성스런 귀족 가문들에 의해 북부 전선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왔다.
개중 대표적인 부분이 전선 사이를 빠르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둔 다리와 동굴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눈밭과 가파른 산비탈은 천혜의 방어벽인 동시에 아군의 이동 역시 방해하는 요소였고, 차르국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사로 이를 극복해냈다.
루시아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런 다리와 동굴들을 이용해도 전선 중앙부까지 가는 데 열흘 이상이 걸린다는 사실.
전선의 동쪽 끄트머리에도 악마가 둘씩이나 쳐들어왔다.
중앙부를 노리는 숫자는 그 열 배 이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중앙 전선은 괜찮을 걸세.”
루시아의 걱정에 대답한 건 펠버였다.
썰매 위에서도 가장 널찍한 뒷자리. 노인은 명상을 위해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이야기했다.
“북부 전선의 중심은 대륙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그 자체로 거대한 요새인 왕도 에클라힘이지. 그곳이 수백 년간 몰락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네.”
“무슨 이유입니까?”
“에클라힘 궁전의 서릿발 왕좌는 이 나라의 역사보다 오래된 유물이지. 곧 보게 될 걸세.”
끌끌 웃으며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는 펠버.
그 표정은 마치 선물을 포장지로 덮어둔 채, 아이에게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문답을 좋아하지 않는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관심을 끊었다.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댈런은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펠버가 다분히 짓궂게 굴기는 했지만, 그 말대로 왕도 에클라힘은 한동안 건재할 것이다.
현 차리나는 미궁도시의 초월자들에게도 전혀 꿇리지 않는 강자였고, 서릿발 왕좌라는 기상천외한 보구까지 더해지면 그 능력은 배 이상이 될 터.
설령 악신 쑴이 직접 강림한다 해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전력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버티기만’ 한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그래서 지원군이 필요한 거지.’
전략은 이랬다.
전선의 동부 끝에서부터 중앙으로 이동하며, 주요 요새나 거점들을 하나씩 방문해 병력을 불려나간다.
그렇게 방어선 동쪽의 가용 인원을 전부 그러모아, 전선의 중심인 에클라힘에 배치하는 게 계획의 첫 단계였다.
사실상 방어선의 일면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한 요새에 전력을 쑤셔박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생각.
하지만 바보에게는 바보처럼 맞대응하라는 말도 있듯이, 싸움에 미친 광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전략의 개념을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수백 회차 중 북부의 대공세를 최후까지 막아낸 단 몇 번이, 전부 이런 방식으로 왕도 에클라힘을 지켜냈던 회차이기도 했고.
[흐음···상식적인 전략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나, 내 생각에도 쑴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적합할 듯하구나. 놈이라면 북부의 전력이 한군데 모여있는 걸 보고 발정난 개처럼 달려들 테니 말이다.]
심상 너머의 고룡 역시 계획에 동의하는 어조였다.
어째 말에 뼈가 좀 많긴 하지만, 설정상 용족과 쑴은 거의 원수에 가까운 관계이니 그런 것이겠지.
“그럼 문제는 귀족들을 어떻게 설득하냐군요.”
특무대의 집행관, 크레이그 비드로프가 말했다.
“제가 있던 성채의 성주와 신하들이 꽉 막힌 노인네들이긴 했지만, 능력이나 심성적인 면에서는 유약하기 그지없었죠. 하지만 전선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실력 있는 귀족들이 성주의 자리에 앉아있을 겁니다. 그들이 방어선의 병력을 빼는 일에 동의할 리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크레이그는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댈런은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비교적 안전한 변방 성채에 있다가, 지원 병력으로 차출되어 원정길에 오른 상황.
당연히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크레이그에게 그런 감정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흐흐.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낭만이 있지. 낭만이······.”
오히려 종종 지금처럼 입꼬리를 씰룩이는 걸 보아하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후덕한 동네 아저씨는 어디 가고, 단단한 육신에 이유 모를 광기가 번뜩이는 요원이 남아있는 모습.
어찌 됐건 비탄에 잠겨있는 것보다 이런 모습이 낫긴 하리라.
그리고 크레이그의 걱정과는 달리, 댈런은 설득에 대한 부분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번 계획에서 중요한 건 설득이 아니었으니까.
“아, 아슬파르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앞서갔던 척후병이 썰매 곁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척후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던 탓일까.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어떻게 엿들었는지, 병사들 사이에 순식간에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지원군을 이끌고 조금 더 나아가자, 산비탈 저 아래로 반파된 요새에서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댈런은 썰매에서 내리며 말했다.
“노인장. 근처에 진을 치고 계시오. 한 번 둘러보고 오겠소.”
무너진 요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한 줌뿐인 지원군이라도 구하러 갈 시간이었다.
***
폐허가 된 아슬파르 요새.
전선의 동쪽 변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댈런이 출발했던 성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요새다.
이중으로 된 성벽과 수십 대의 수성병기는 균열을 틀어막고 있던 성기사단의 요새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
타락한 북부인들과 마물의 군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최소한 이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콰직.
불타버린 투석기의 잔해를 짓밟고 요새 안으로 접어든다.
무너져내린 성벽은 강대한 악마는커녕 사람 하나의 침입도 막지 못하는 실정이다.
“인적이···없군요.”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요새 안쪽은 조용했다. 악마는커녕 마물 한 마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의 파괴 속에서 생존자는커녕 시신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결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루시아와 함께 요새의 중심부로 향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그 이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
무너진 잔해의 음영 속에서 꿈틀거린 그림자.
“크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응달에서 뛰쳐나온 병사가, 부러진 검을 쥐고 댈런의 목덜미를 노린다.
댈런은 가만히 손을 뻗어 놈의 목을 잡았다.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목줄이 잡힌 병사가, 그륵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댈런을 노려봤다.
붉게 변한 눈.
길게 자란 손발톱.
사슬 갑옷을 군데군데 뚫고 자라난 뿔과 가시들은, 이미 완전하게 변이되어 손 쓸 수 없다는 증거였다.
칵! 칵!
부러진 검으로 댈런을 연신 찔러보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과 질긴 피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댈런은 손아귀에 힘을 조금 줬다. 우득 소리가 나면서 병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캬아아악! 카아악!”
꺼무룩 죽어버린 건 거짓말이라는 듯, 번뜩 눈을 치켜뜬 병사가 댈런을 향해 이빨을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휘적이는 몸통과 이빨을 부딪히는 머리가 아예 분리 된 채, 그대로 두 마리의 마물이 되어버린 것.
성벽이 무너지고 건물들이 박살나는 와중에, 길거리에 시체가 거의 없던 이유였다.
지옥 마력의 영향으로 전부 되살아난 채, 먹잇감을 기다리며 가만히 숨어있었던 것.
요새의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마력은 성벽 안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밀도 높은 마력의 흐름 탓에, 이런 자잘한 마물들의 존재감은 어지간히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는 알아채기 어려웠다.
“심상치 않군요. 이런 현상이라면···아마 멀지 않은 곳에 지옥문이 있을 겁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물이 된 병사를 던져버렸다.
“크에에엑! 카학!”
콰광! 콰르르르!
마지막까지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놈은 돌벽에 부딪혀 박살난 뒤, 돌무더기에 파묻히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
끈적이는 마력은 요새의 심부로 걸어 들어갈수록 농도가 짙어졌다.
동시에 처음 죽였던 병사 마물과 비슷한 놈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깨진 채 창칼을 꼬나쥔 말단 병사.
내장을 파먹히고 텅 비어버린 뱃가죽을 열어놓은 채로 덤벼드는 나팔수.
좀 더 들어가자 여러 육체가 붙어서 만들어진 기괴한 괴물이나, 내장과 뼛조각들이 뭉쳐진 거대 벌레 따위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예 죽지 않았음에도 지옥 마력에 오염된 채,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병사들도 존재했다.
“이 정도로 오염되어서는···사실상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지옥의 기운에 물들었어요. 생존자가 아닌 마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염된 병사를 되돌릴 방도가 있냐는 질문에, 루시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변이체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단신으로 악마도 썰어버릴 수 있는 두 사람에게, 겉보기에만 흉악한 이런 마물들은 문자 그대로 한주먹거리도 안 되었으니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전진한 끝에, 두 사람이 발견한 건 요새의 중앙광장 한가운데 이글거리는 지옥문이었다.
“···신이시여.”
“악마가 직접 연 지옥문이군. 맞소?”
“맞습니다. 흑마법사 놈들의 지옥문이 다량의 제물과 계약을 통해, 일정 수준의 마물이나 악마를 쏟아낸 뒤 닫히는 문이라면···그 지옥의 거주자인 악마는 통로 자체를 뚫어버리죠.”
두 사람 모두 지옥문 자체는 질리도록 봐왔으나, 이런 종류를 맞닥뜨리는 건 처음이었다.
검붉은 고리의 형상으로 이글거리는 지옥문.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사특한 마력으로 인해, 광장은 이미 지옥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색채로 물들어있었다.
흑마법의 결과물과 다르게, 악마의 지옥문은 홀로 닫히는 법이 없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의 원혼과 생기를 죄다 빨아들여 동력으로 삼아내고.
그렇게 얻어낸 힘으로 다시금 주변을 오염시키는 게 가장 핵심적인 특징.
흑마법사들이 단순히 힘과 군세를 얻고자 지옥문을 열어낸다면, 악마가 연 지옥문은 그 목적부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악마와 마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것.
지옥 아닌 곳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악마 놈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이끌고 온 병력을 물리길 잘했군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요새의 성벽 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마물이 되어버릴 겁니다.”
생존자가 있기는 힘들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루시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댈런은 허리춤에서 성검을 뽑아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콰득!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자락이 잘려나가고, 독특한 색채의 비늘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빛을 머금어 반짝거린다.
댈런은 손을 들어 은신 도구 뒤에서 찔러오던 창을 붙잡았다.
묵직한 감촉. 무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한 이의 창격이었다.
기습이 실패한 남자는 곧바로 물러나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찢어 죽일 악마의 하수인들! 특무대 집행관의 이름을 걸고, 너희를 반드시······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외침.
핏발 선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아,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었···? 옆에 성기사님이···어라? 어어?”
당황한 채 말을 더듬거리는 남자. 기습의 저의를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물들을 처리하면서 오느라 피와 살점 범벅이 된 댈런을, 악마의 하수인쯤으로 오해하고 죽이려 한 것이겠지.
애당초 저 남자 자체가 구면이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몇 주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로서의 구면.
“오랜만이군. 검열관 로만 바르코프. 맞소?”
“마, 맞습니다. 댈런···님······.”
핏발 선 눈동자에, 피와 땀으로 떡진 머리칼이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미궁에서 부하들을 지키다 최후를 맞은, 집행관 사샤 타란의 직속 부관.
남자는 악마 칼카스를 소환하려는 반란군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미궁 안으로 떠난 원정에 함께했던 동료였다.
“그, 정말 죄송합니다! 절대 고의가 아니라 정말 마물처럼 생기셔···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댈런은 왠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성검을 내리그었다.
푸른 섬광으로 지옥문을 으스러뜨린 그는 광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요새에 당신 말고 생존자가 더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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