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4)
생존자는 많지 않았다.
왕실 특무대 출신으로 전선 방어 임무에 투입된 요원들이 여덟.
기존의 요새 방어병력 중 소대 규모 이상의 지휘관급 인사가 스물 남짓.
기껏해야 서른 남짓 되는 이 생존자들만이, 천 단위의 병력이 머물던 요새가 남긴 흔적이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자, 이리 와서 이것 좀 들게나. 그동안 고생 많았네.”
먼저 야영지를 구축하고 기다리던 펠버가 돌아온 댈런과 생존자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미리 예비해둔 모닥불 몇 개를 생존자들에게 내어줬다.
생존자들은 반쯤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채 비척거리며 모닥불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붉게 충혈된 눈. 피와 먼지에 절어버린 몰골.
그들이 지난 며칠간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지는,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스튜와 빵, 따뜻하게 덥힌 술로 몸을 녹이는 사이 댈런은 그들에게 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베테랑답게, 휴식하는 와중에도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시군요. 저희도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만, 직접 겪어보고 나니 알 수 있었습니다. 상식적인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놈들이에요.”
“놈들은 성채를 함락한 뒤 지옥문까지 열어놓고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갔습니다. 후방 교란이나 전선 침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요.”
“그저 본대의 힘을 불려 에클라힘에 결집한 중앙 방어군과 크게 한 판 붙으려는 생각만 있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싸움에 미친 야만인 새끼들···아니, 댈런 님의 출신을 비하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썩을, 서리고원 너머에는 가본 적도 없다니까 그러네.
여기서 ‘나 야만인 아니오’ 하고 말해봐야 별 소용 없겠지. 그리고 신분을 오해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차르국 내에도 서리고원 너머의 북부인 출신 이민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니까.
악신과 전선을 맞대고 있는 만큼 악마의 유혹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차르국의 주민들이다. 그렇기에 타락하지 않은 북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댈런쯤 되는 명성과 지위를 가졌으면, 사실상 인종에서 비롯된 불이익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댈런은 굳이 해명을 늘어놓는 대신, 다른 생존자들처럼 스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차리나께서 고용하셨다던 용병이 댈런 님이셨군요. 성기사단 이외에도 몇 군데 지원을 요청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댈런 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스튜를 우물거리던 로만 바르코프가 말했다.
미궁에서의 임무가 끝나고 집행관으로 승진한 그는, 요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 나름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직속 상관을 잃은 뒤 나름대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해온 것일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역시 미궁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소영역을 막 이룬 3위계 초입이거나, 영역을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그에 근접한 수준의 경지에 닿아있겠지.
돌아보면 다른 생존자들 역시 영역을 이룬 초인들까진 아니라도, 일반인의 수준은 한참을 뛰어넘은 강자들이다.
악마가 요새 한가운데 열어버린 지옥문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사특한 마력에 오염되지 않으려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했으니까.
“이 사람아, 댈런 님은 그냥 용병이 아니야. 동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도 댈런 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막심했을 걸세.”
생존자들을 관리하던 집행관 크레이그가 끼어들었다. 로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아니, 동남부 반란은 성기사단이 해결한 문제 아니었나?”
“성기사단이 주로 개입하긴 했네만, 맨 처음 습격을 저지한 건 댈런 님의 공이 컸네. 내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았나?”
크레이그는 신난 얼굴로 로만에게 남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두 사람이 특무대 요원 양성소의 동기 출신이라던가. 털털한 인상의 크레이그와 달리 다소 올곧은 느낌이 있는 로만이었지만,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지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 대화를 반쯤 흘려들으며 딱딱한 빵으로 남은 스튜를 싹싹 긁어먹고 있자, 루시아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댈런. 잠시 이야기 괜찮겠습니까?”
***
“예상대로 쑴은 거대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휘부 막사 안.
주변의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봤습니다. 악마 두 마리가 이끄는 마물 군세는 성을 한 시간 만에 함락하고 지옥문까지 열어놓은 뒤,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방해꾼을 제거하고 본대에 전력을 보탠 거요. 마지막 싸움을 위해서겠지.”
“···그렇게 보입니다.”
게임에서도 항상 보여왔던 패턴 그대로다.
지옥문을 열어 전선의 요새들을 재건조차 불가하도록 초토화시키고, 그렇게 방해 요소들을 제거해나가며 마지막 단 한 번의 싸움을 강요하는 전략.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제대로 된 한 번의 싸움에 목을 매는 악신다운 발상이었다.
“아마 앞으로 거쳐갈 요새들도 함락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제대로 된 지원 병력을 얻기는 힘들지도 모르고요.”
“······.”
“엘가이아 마탑주님께 차리나와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듣기는 했습니다만···솔직히 소문일 뿐 아닙니까. 진짜로 악마의 대군세를 막을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는 모습.
병사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불안감이었다.
“방어선의 요새들을 무시하고 진군한다면 며칠이라도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차리나와 에클라힘 궁전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상, 하루라도 빨리···.”
“루시아.”
“······.”
“불안하시오?”
잠깐의 침묵.
그 끝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불안합니다. 이건 저 하나만의 목숨이 달려있는 일이···아니니까요.”
참아왔던 감정이 울컥 쏟아진다.
작게 떨리는 손끝. 신성 문신이 반짝거리며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후르르 진동한다.
신의 부름을 받고 전장의 선두에서 달려나가는 성기사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루시아처럼 영역을 이뤄낸 초인들이나, 더 나아가 종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라 해도 다르지 않다.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서도, 미래는 불분명한 암흑일 뿐.
오히려 위로 올라가며 그 암흑의 편린을 엿볼수록 고뇌는 더욱더 깊어질 따름이었다.
원래부터 공포는 완전한 무지가 아닌, 어둠 속에 움직이는 흐릿한 실루엣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었으니까.
“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저희의 싸움이 실패하면 차르국은 쑥대밭이 되겠죠. 그 다음은 도시연합과 팔시온, 그리고 성기사단이고요.”
가늘게 떨리는 손길로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열고 목을 축인다.
한 번 둑이 터진 감정은 쉽게 진정될 줄을 몰랐다.
병사들 앞에서 이토록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건가.
함락된 요새를 눈앞에서 목격한 뒤에도 이탈자가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대마법사인 마탑주와 성기사단의 심문관, 그리고 용살자 용병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와해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군대다.
스스로의 위치를 아는 만큼, 병사들 앞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자 노력해왔겠지.
“······.”
목을 축이고 푹 떨구는 고개. 쏟아지는 금빛 폭포 사이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툭. 툭. 테이블 위에 무늬지는 작은 동그라미들. 금발 너머로 들썩이는 어깨를 눈앞에 두고, 댈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두렵소.”
***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었다는 반응.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과 같은 이유는 아닐 거요. 인류를 수호한다거나 문명을 지킨다거나 하는 거창한 핑계를 대기에는, 나는 그리 선한 사람이 아니니까.”
끼익.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막사 천장으로 시선을 들어올린다.
짐승 가죽으로 보온성을 더한 막사 천장은, 건조대에 비쩍 마른 사슴 가죽이 매달려 있던 설산의 오두막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방이 하얗던 세상에서 눈을 뜬 뒤, 얼마나 극심한 공포에 몸을 떨었던가.
산길에서 도끼 한 자루로 늑대 무리를 조각내고, 용병 일에 몸을 담고서 도적들에게 같은 일을 행하면서도.
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건 강력한 육체에서 오는 어떠한 고양감도 아닌, 게임이 취미이던 회사원 아저씨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소. 잊혀지는 게 두렵고.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는 게 두렵소.”
“······.”
“처음부터 칼과 도끼로 사람이며 마물을 죽이고 다녔던 게 아니오. 주문이나 칼질은커녕, 주먹 한 번 시원하게 내질러보지 못하던 게 나였소. 얻어맞으면 얻어맞았지, 때리지는 못했던 인간.”
“···댈런이 맞고 살았다니. 아무리 어릴 때라지만 상상이 안 가는걸요.”
“그렇겠지. 나도 지금은 왜 그랬나 싶으니까. 맞을 땐 맞더라도 그 새끼들 아구창이나 한 대 후려줄걸.”
댈런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항상 쉬운 선택을 해왔소. 그런데 결국 그게 가장 어려운 길이더군. 언제나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다시금 쉬운 길을 택했지. 그리고 또 반복하고, 그렇게···.”
“······.”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요. 두려움에 먹혀서 쉬운 길을 택했을 때와, 미친 것처럼 보여도 눈 딱 감고 들이받았을 때의 차이를 이제는 알고 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눈을 감고 이어내는 말.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으니까.”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번의 실패를 지나왔지만.
“그렇게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건 이전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번 잃었기에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댈런은 그 소중함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함을 깨달아갔다.
매일 매일이 지겹고 지치던 지구에서의 삶도, 잃고 나서는 꿈에 그리는 고향의 추억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삶이라고 다를까. 댈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궁 밑바닥의 소원의 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일상의 그리움을 뼈저리게 느껴온 만큼, 이 세상의 소중함 또한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내릴 선택이 무엇일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만, 어찌 됐건 지키고 되찾아야 할 동기는 이전보다 더 커진 셈이었다.
끼익.
의자가 작게 울었다. 루시아의 의자였다.
“···함락된 요새마다 생성됐을 지옥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마지막 전투를 이긴 뒤에도 북부 전선 일대가 오염 지대가 되어버리겠죠. 그 요새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야말로 악마의 군세를 상대할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베테랑들이겠고요.”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는, 하지만 논리정연하게 진정된 목소리.
“요새를 지나치지 않고 하나하나 수습할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 역시 진작되겠죠. 마지막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차리나와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신뢰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선의 요새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 결정을 가로막고 있던 건 두려움.
댈런은 그게 잘못되었다 여기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함께 싸우곘다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키겠다 따위의 소리를 하지 않은 이유였다.
댈런은 눈을 감은 채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쨌든 걱정 마시오. 내 생각이긴 한데···쑴 그놈은 지금쯤 나와 한 판 붙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테니까.”
하이 오크 대선조의 무덤에서 마주했던 투사의 기억.
하늘과 땅을 회백으로 물들였던 전사의 마지막 기억에는, 쑴의 표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절절한 살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희열, 호승심과 즐거움, 쾌락의 감정들.
댈런의 감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또렷하게 느껴지던 그 감정들이, 이번 회차에서는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회백의 투사 역시 시체늪의 대공을 죽였었지.’
측근들 중 가장 영민한 책사를 잃은 싸움꾼 악신이, 그 살해자에게 보일 반응은 한 가지뿐.
어쩌면 이렇게 요새를 불태우고 함락시키는 모든 행동들은, 그를 전장으로 부르는 초대장일지도······.
쪽.
상념을 뚫고 들리는 소리.
부드러운 감촉은 이상하게도 한 발 늦게 느껴졌다.
“이건 작별 인사가 아니에요.”
눈을 뜨자 가까워진 루시아가 보였다.
입술 끝에 남은 온기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촉촉한 눈가. 약간 발그레해진 뺨. 그 아래의 부드러운 미소.
그 미소가 열렸다.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다고 했죠?”
그리고 다시 한 번 다가와 부딪혔다.
“저도 두 번 잃지는 않을 거예요.”
천막 안에는 한동안 온기가 감돌았다.
***
지원군은 중앙 전선으로 계속 진군했다.
함락된 요새들에서 지옥문을 부수고, 생존자들을 구출해내는 작전은 하루이틀에 한 번 꼴로 계속됐다.
댈런과 루시아를 중심으로 하던 작전은, 이내 별도의 구조대가 함께 들어가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선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요새의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이전에 구해졌던 전사들이 자신과 같은 생존자들을 찾아내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함락되지 않은 요새도 있었다.
방어 병력의 저항이 거셌거나, 마물들의 군세에 악마가 하나 정도만 포함되거나 한 경우였다.
그런 요새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수비적으로 나오다가도, 구출된 생존자들에게 전황을 전해 듣고는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고 전부 차출해주었다.
그렇게 지원군의 규모를 불려가며 행군한 지 삼 주.
댈런과 오천 명의 지원군은 마침내 왕도 에클라힘을 앞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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