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73화 (173/288)

왕도 에클라힘(1)

휘이이이······.

차디찬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댈런은 뺨을 긁적이며 능선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주변에서는 오천에 달하는 병력이 추위에 맞서 행군하고 있었다.

모두 함락된 요새에서 구출해낸 생존자들이거나, 악마의 공세를 버텨낸 성채에서 지원받은 병사들이었다.

‘방어선 동쪽에서 3주 만에 오천 명···그 어느 회차보다도 많이 모였군. 이번 회차의 차르국 방어선이 생각보다 더 견고하게 버텨줬어.’

지난 몇 달간 이어져 온 후방에서의 반란이 성공적으로 제압됐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댈런과 성기사단의 개입으로 철혈군대의 인력 투입 역시 최소화되었으니, 최전선의 병력은 분산될 일 없이 방어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모아낸 병력은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 모두 부족함이 없었다.

그중에도 함락된 요새에서 구출해낸 생존자들의 역량은 상상 이상.

악마가 열어낸 지옥문의 오염을 이겨내고, 구출될 때까지 마물을 죽이며 살아남았다는 건 그 자체로 능력과 의지의 증거.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 할 만한 그들은, 악마를 향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사기 진작의 주축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의 지옥도에서도 버티던 이들이기에, 전선 동부의 요새들이 절반 이상 무너졌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물론 용살자 용병과 악마 살해자 성기사, 한 마탑의 수장 대마법사가 지원군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수확도 나쁘지 않았다.’

댈런이 북부 전선의 절반을 순회하며 얻은 건 병력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죽은 시체들 역시 그에게는 또 하나의 보상이었다.

‘눈밭의 반사광에 시력을 잃은 궁사의 시체’

‘거인이 던진 바위에 묵사발이 난 주술사의 시체’

‘북부인 전사를 힘싸움으로 이긴 용병의 시체’를 위시로 한 여섯 구의 시체들.

악신이 직접 대륙을 침공하는 최후의 대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도, 차르국과 북부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해왔다.

주로 용병 신분으로 캐릭터를 키운 댈런이었기에, 북부 전선에는 자연스럽게 끼어들 구석이 많았다.

회백의 권사라는 캐릭터로 악신의 침공을 본 이후에는, 침공을 방어할 전략을 세우기 위해 일부러 들린 적도 종종 있었고.

그밖에도 세계의 이빨 산맥을 내려오며 얻었던 ‘졸다가 눈사태에 파묻힌 순찰대원의 시체’와 ‘설원늑대에게 먹힌 조련사의 시체’까지 포함하면, 회백의 투사 이후에 회수한 시체는 총 여덟 구.

팔시온의 남부 지구에서 얻은 시체와 엇비슷한 개수였다.

‘고작 한 달 남짓 고생한 것치고는 분에 넘치는 보람이지.’

병력이 휴식할 때마다 시체를 찾아 움직이는 통에,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긴 했지만.

고생 끝에 얻은 열매이기에 때론 더욱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법.

댈런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 댈런

레벨 : 34

[근력 : 49] [기량 : 42] [체력 : 38]

[감각 : 38] [지능 : 37] [마력 : 41]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고유 스킬(13)

――――――――

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30 후반에서 40 초반. 근력은 무려 50이 코앞이었다.

영역의 힘을 사용하며 단순히 능력치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이적들을 실현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능력치의 중요성이 바래는 건 아니었다.

영역의 힘이든 뭐든 강력한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재능과 오성이 필요한 게 현실.

그 재능을 나타내는 지표가 능력치였으니, 여유가 될 때마다 시체와 경험치를 아득바득 긁어모아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쓸만한 주문은 지금 익힌 두 가지가 끝인 것 같고···주술사 시체에서 얻은 룰리아의 샘물은 빙정과 시너지가 괜찮겠어.’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얻을수록, 뻗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는 십수 가지가 늘어난다.

서로의 심상을 그리고 지워나가는 초인들 간의 싸움에서, 그런 선택지들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았다.

승리를 결정하는 데는 힘의 크기만큼이나 전투를 설계하는 능력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

주문과 술식을 포함한 다양한 능력들은, 그 설계 자체를 다변화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댈런. 왕도가 보입니다.”

상념을 뚫고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댈런은 상태창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 너머, 능선 저 아래쪽으로 거대한 도시가 흐릿하게 내려다보였다.

***

머지않아 눈보라가 완전히 걷혔다.

새하얀 백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면적의 도시.

그 한가운데 높이 솟은 청백색의 궁전.

도시의 전경을 본 펠버가 나직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말했다.

“대륙 북부의 지배자 차르의 도시이자, 서릿발 왕좌의 에클라힘 궁전이 솟아오른 곳. 왕도 에클라힘. 젊을 적에는 이곳에서 얼어붙은 땅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었지. 오랜만이구만.”

“크하하하! 얼음과 화약의 성지라니! 나 역시 정말 오랜만이군! 한때는 나도 이곳의 궁전을 집처럼 드나들었···어억!”

“화약에 미친 친구여, 듣는 귀가 많다네.”

“끄어어, 내 두개골!”

허공에서 소환되어 뚝 떨어진 돌덩이에 얻어맞은 비요른이, 부어오른 정수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혀를 쯧쯧 차는 펠버와 난쟁이의 머리에 얼음 찜질을 해주는 아카샤.

난장판이 된 썰매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시아가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북부 전선의 수많은 요새들이 함락당했는데, 왕도는 함락은커녕 공격조차 받지 않고 있다니······.”

그녀의 말대로였다. 왕도 에클라힘은 유일하게 성채이자 도시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삼중으로 지어진 성벽은 실금 하나 없이 단단하게 솟아있고, 그 위의 병사들 역시 만전의 태세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한편 남쪽 성문 앞으로 까마득하게 줄 선 인파에는, 상인과 농민, 용병, 수레와 짐마차들이 검문 순서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전운의 긴장감은 감돌고 있으나, 직접적인 타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몇 주간 수많은 참상들을 지나쳐왔기에, 오히려 더욱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일상의 정경.

이런 정경은 결코 우연히 펼쳐지지 않는다.

댈런의 예상이 맞다면, 분명 차리나는 이미 서릿발 왕좌에 앉아 홀로 악마의 군세를 저지하는 중이겠지.

그리고 댈런과 일행은 그 사실을 머지않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댈런 님. 차르국의 왕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차리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서릿발 왕좌의 주인이, 그들을 직접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

오천에 달하는 병력은 큰 탈 없이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

왕도의 경비병들이 무능한 건 아니고, 그저 미리 예정된 수순이었다.

전선 동부의 성채들을 수습하면서, 댈런은 이미 왕도로 몇 번이나 사절을 보내 지금 지원군을 이끌고 가는 중이라 전달했었다.

왕도에서도 환영의 뜻을 알리며, 가능하다면 조속히 지원군을 끌고 와달라는 차리나의 말로 화답했었고.

덕분에 난데없는 대규모 병력의 등장에 성에서 설랑(雪狼) 기마대가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성문 앞에 줄선 사람들을 잠시 물리고, 간단한 검문절차를 거치며 병력을 들여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그리고 병사들이 한창 검문을 받는 동안, 댈런과 일행은 에클라힘 궁전으로 초대되었다.

그것도 귀족들 중에도 특별한 몇몇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서릿발 왕좌가 놓여진 전당 안쪽으로.

쩌적. 쩍.

바닥은 물론, 벽면과 천장까지 꽝꽝 얼어버린 기나긴 복도.

에클라힘 궁전에서도 가장 심부에 있는 복도의 끝에는, 어지간한 성문보다도 두꺼운 문이 온갖 마법진으로 도배된 채 자리하고 있었다.

기긱, 그그그극―

“흐읍···!”

문틈이 벌어지는 순간 불어닥치는 냉기.

스승의 뒤를 따르던 토미가 고통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스승의 주문을 계승하며 평범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진 소년으로서도, 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를 감당하는 건 버거웠기 때문.

“견딜 수 없다면 돌아가시오. 차리나께서 계시는 전당에서 시체를 치우는 일은 원치 않으니.”

문 앞을 지키는 왕실 수호대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화르르르···.

등 뒤에서 뻗어나온 흑염의 날개가 불어닥치는 냉기를 상쇄해낸다.

단순히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걸 넘어서서, 주변 수 미터 반경의 냉기를 완전히 몰아내는 열원이었다.

“······.”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된 왕실 수호대. 댈런과 일행은 그들을 지나쳐 전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오.”

“신이시여······.”

전당 안은 광활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얼어붙은 대지는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졌고, 하늘에서는 얇은 눈이 끊임없이 내리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간을 왜곡시켜 넓혀내기라도 한 걸까.

혹은 미궁도시의 약재상 필로폰의 거처와 같이, 차르국 왕조에 대대로 내려오는 심상 그 자체를 구현해낸 장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댈런은 조금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내리는 눈발 너머로 높게 쌓아올려진 단상과 옥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얼음으로 빚어놓은 듯한, 인간 여성의 형체를 띈 동상도.

그 동상의 입술이 달싹였다.

[환영합니다.]

[방랑하는 칼라드라쿰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자, 제국과 차르국의 기술을 훔친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

[에드거 라인하르트의 기대를 받는 악마 살해자,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 루시아 카스타챌드.]

[용신의 좌완 갑주의 시간선에 손을 댄 대지술사, 엘가이아 마탑주와 그 주문을 이어받은 제자. 펠버 발렌티노와 토미 발렌티노.]

[숨겨진 종말의 안배였으나 이제 부친으로 택한 자와 함께 종말에 대항하는 용. 아카샤 리울라크.]

[그리고···.]

쩌저적.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상의 입술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쨍―!

이내 맑은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얇은 얼음 파편들.

왕좌 위에 동상처럼 얼어붙은 여인, 차리나 비잘리나 요스코브는 얼음에서 벗어난 얼굴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악마 학살자. 용살자. 두 마녀를 죽인 자. 역천에 드리운 어두운 별나무를 길들인 자. 군주에게 버려진 용의 피를 품은 자. 성도 가문도 알 수 없으나, 신들의 주목을 받으며 결정된 모든 걸 뒤흔드는 자. 댈런.”

“······.”

“역천의 우물은 정말로 당신을 예언한 것일까요. 나는 맞다는 데에 내 운명의 표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지요. 쑴의 백여덟 악마, 그 절반을 홀로 막아내면서.”

청백색의 눈동자가 댈런을 응시했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마력을 품은 눈이었다.

영역의 일면이 아닌 전체를 투영해낼 수 있는 경지.

신비를 자신만의 소유로 비틀 수 있는 존재.

6위계에 오른 마법사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댈런은 가만히 손을 들어 턱을 긁적였다.

그는 생각했다.

시발, 또 주문쟁이 특유의 어려운 말 시작이네.

17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