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에클라힘(2)
“먼 길을 걸어오느라 고생했어요, 용사들이여.”
후우. 차리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찬찬히 훑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김을 보며 댈런은 생각했다. 걸어오다니. 썰매 타고 왔는데.
물론 아무리 그라도 6위계 마법사와 실없는 말장난이나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존재가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마침내 기다리던 전력들이 모두 모여들었군요. 바르샤바크는 며칠 내로 도달한다고 했으니,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어요.”
“결단이라 하시면···악마의 군세를 영토 안으로 들이시겠다는 의미입니까?”
“맞아요, 탑주. 서릿발 왕좌의 힘으로 보름째 악마들을 저지하고 있지만, 저라고 언제까지나 막아낼 수는 없어요.”
차리나의 목소리는 넓은 설원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지만, 반면 그녀의 입술은 혼잣말하듯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멈출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중간중간 고통스럽게 움찔거리는 뺨과 이마.
대악마와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6위계의 마법사에게도, 서릿발 왕좌의 힘을 사용하는 건 상당한 수준의 부담이라는 증거였다.
아마 역량이 부족했던 전대 차르들이라면 왕좌에 앉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죽었겠지.
“싸움에 대한 쑴의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우리 차르국 역시 놈의 손아귀에 놀아나다가 무릎 꿇을 생각은 없어요. 필멸자라고 얕보는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죠. 안 그런가요?”
자꾸만 얼음이 얼어가는 뺨을 움직여, 차리나가 힘겹게 싱긋 웃었다.
펠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신중한 전략가인 그답게 이 전쟁의 당사자인 그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본 듯했다.
그때 일행의 가장 뒤에 서있던 비요른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말했다.
“그, 허, 거참···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 몸은 좀 괜찮나?”
평소의 호탕한 목소리는 어디가고, 난쟁이답지 않게 쭈뼛거리는 말투.
일행이 쟤 왜 저래 하는 표정을 짓는 사이, 차리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기울였다.
그녀는 이내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증조부. 그래도 아는 척은 해주시는군요. 백 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시기에, 저희는 그저 하룻밤 불장난의 결과물로만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다. 절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진심이었다! 어떻게···.”
“푸훗, 농담이에요. 물려주신 피 덕분에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룬 마법 적성이 없었다면 고대 드워프들의 유산인 서릿발 왕좌를 이만큼이나 잘 사용할 수 없었을 거예요.”
차리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댈런은 습관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뭐야. 저 난쟁이가 차리나 요스코브의 조상이라고?
당대 차리나의 혈통에 드워프의 피가 섞여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추문 정도야, 댈런도 수많은 회차에 걸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어떤 회차에서는 직접 룬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도 봤으니, 완전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게 외눈의 명공일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상식적으로 악마의 아가리에 폭탄을 던져넣는 미친 난쟁이가, 고귀한 혈통과 연관이 있을 거라 누가 짐작할 수 있겠나.
‘제국과 차르국에서 극비리에 개발하던 화약 기술을 어떻게 빼내온 건가 했는데···그런 뒷배경이 있었던 거였나 보군.’
그러고보니 차리나가 비요른을 언급할 때 칼라드라쿰 왕조라는 이야기도 했었지.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는 온갖 베일에 감춰져 있던 외눈의 명공에 대한 설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
슬쩍 일행의 표정을 둘러보니, 역시나 펠버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차리나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부터 서릿발 왕좌의 힘을 천천히 약화시킬 거예요. 대략 일주일 뒤에 악마의 군세가 이곳에 도달할 겁니다. 각자 휴식을 취하시고, 마지막 준비를 하시길.”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살얼음이 덮여가기 시작하는 얼굴. 불현듯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 너머로 왕좌의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져갔다.
댈런은 일행과 함께 전당을 떠났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기 전, 머릿속에서 차리나의 전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댈런, 조심하세요. 당신을 노리는 그림자가 이 도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
그날 밤.
수행원들의 안내에 따라 일행과 함께 궁전의 빈방에 짐을 푼 댈런은, 밤늦게 홀로 궁전을 빠져나왔다.
인적 없는 거리만을 골라 가로지르며 향한 곳은 도시의 북쪽 외곽.
정확히는 그 외곽을 넘어선, 성벽이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좁은 뒷골목이었다.
탁―
가볍게 밀어찬 발걸음.
건물의 벽과 지붕을 디디고 허공을 두어 번 걷어차자, 눈높이가 성벽 위의 총안에 맞닿는다.
여기서 더 날아다니다간 예민한 몇몇 경비들의 눈에 띌 수도 있겠지. 그렇게 판단한 댈런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회명(回冥)」
어둠 속에 흩날리는 흐릿한 잿빛.
소리는 물론 마력의 움직임마저도 극도로 희미하다.
공간의 틈을 뛰어넘어 단숨에 첨탑 위에 도달한 댈런은, 가파른 지붕 위에서 어렵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도시 밖을 내다봤다.
스으으으···.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마력광.
오감에 한계까지 불어넣어진 마력.
한밤의 어둠은 그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으나, 그가 원하는 건 단순히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이상이었다.
‘아커만의 작도법.’
실측 가능한 거리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궁 4층의 전역을 지도로 만들어버린 힘.
심상 너머 영역의 전역을 굽어보는 시야에, 작도법의 힘을 접목시켜 새로운 고유 스킬로 빚어낸다.
「몽환추적(夢桓追跡)」
몽왕의 궁전마저도 간파했다는 이능을 기반으로 구현한 능력은, 꿈과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대상을 추적해내는 것.
어떤 면에서는 탐색자의 좌완 파편과 비슷한 기능이다. 물론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탐색 면적은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육체의 기억에 없는 대상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탐색자의 좌완 파편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인 바.
회백의 투사에게서 물려받은 기억.
그 기억 속 한 대상을 특정해 발동 조건으로 삼고, 새로이 얻은 고유 스킬을 시전한다.
화아아아아―!
마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며 시계가 확장된다.
물리적으로 넘어낼 수 없는, 지평선 너머라는 한계가 가볍게 부서졌다.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 북쪽의 북쪽으로 확대되어가는 시계의 범위.
그 끝에 잡힌 건 거대한 서리폭풍이었다.
휘─────
서릿발 왕좌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광범위한 일대를 공간째로 동결해버리는 강력한 주문은, 모니터 너머에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선사했다.
악마의 대군이라도 막아설 수 있는 서릿발 왕좌의 마법.
「파영의 마안」
환상과 신비를 관통하는 시야로, 그 안쪽을 비집고 들어가 내용물을 열어본다.
꾸드득. 꾸득···.
눈앞을 가득 메운 건 꽝꽝 얼어붙은 수만 마리의 마물과, 그 배 이상은 되는 타락한 야만인들의 군세였다.
서릿발 왕좌의 힘을 조금씩 느슨하게 하고 있어서일까.
공간 자체가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그나마 힘이 강한 마물들은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려 시도하는 중이었다.
으지지직···.
그 다음으로 보인 건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건 수십 마리의 악마들.
기본적으로 악마가 가진 힘은 마물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기에, 놈들은 수 분에 한 걸음씩이나마 명확하게 내딛고 있었다.
[뭘 보려 하는 것이냐?]
오밤중에 벌이는 기행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걸까.
심상 너머의 절벽 위, 적창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도 백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곳을 내다보는 데는 상당한 집중력과 힘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
끝없는 악마와 마물의 무리를 넘어, 군세의 배후를 향해 조금 더 파고든다.
적창의 질문은 나름 합당하고, 또 어떤 맥락에서 의표를 찌르는 부분이 있었다.
마력을 쏟아부어가며 지평선 너머를 엿보는 이유가, 단순히 악마 군세를 막아서는 서릿발 왕좌의 폭풍을 보기 위함일 리 없다.
악마 수십 마리가 밀고 내려온다는 것과, 서릿발 왕좌의 힘이 이를 막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뭘 하나 했는데, 지금 설마···]
그제서야 댈런의 의도를 눈치챈 적창이, 놀란 표정으로 심상 너머에서 고개를 들고.
스으으.
마침내 시야의 끝에서 포착된 한 인영이, 댈런의 시선을 의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
놈이 웃었다.
그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몸뚱이는 어린아이가 물감으로 대충 덧칠한 듯 어렴풋하게 검붉고.
일그러진 형상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눈동자만이 핏방울의 색채로 일렁인다.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일그러짐이었으나, 누군지 알아보기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기억.
댈런이 고유 스킬 몽환추적으로 탐색한 대상은, 그 기억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존재.
악신 쑴이었으니까.
[칼카스에 즈탄크까지 죽였다길래 어떤 놈인가 했는데, 이거 생각보다도 더 재주가 좋은 녀석이었잖아?]
놈이 말했다. 선명한 웃음기를 띈 목소리였다.
동결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수십 악마의 군세의 안위나, 그들이 주군의 의지에 따라 벌이는 침공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저 마치 자신을 즐겁게 해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나른함 위에 꿈틀거리는 희미한 흥분이 놈에게서 느껴지는 전부였다.
[역천의 우물이 널 예언했다는 소리도 있지···네가 내 시험을 통과했으면 좋겠군. 만약 싸움이 끝나고도 살아있으면, 북쪽으로 와.]
두 눈이 천천히 휘어진다.
지평선 너머에서 뻗어나간 댈런의 시선을 정확하게 응시하는 붉은 일렁임.
놈이 말했다.
[그때 보자고.]
화아아악―!
시야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마치 고무줄을 한계까지 당겼다가 놓은 듯, 빠르게 줄어드는 시계의 범위와 거리.
그 급격한 변화에 머릿속이 아득해진 댈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멀미를 할 것처럼 속이 울렁인다.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은 뒤로, 어떤 외상도 없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건 의외로군. 쑴이 직접 대륙에 강림했다니.]
그리고 댈런이 감각을 진정시키는 사이, 적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심지어 무리하게 강림하기 위해 기존의 권능과 힘 태반을 내던진 모습이었다. 다섯 악신들은 언제고 서로를 잡아먹고자 으르렁대는 사이일진대.]
“······.”
[아무리 싸움에 미친 자라지만···모든 걸 잃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저런 결단이 가능한 건가.]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거요.”
댈런이 피식 웃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직까지 시야가 조금 어지러웠다. 눈 위를 살살 문지르자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강림했으면 강림한 거고, 본인이 불리한 조건이라도 싸우고 싶다면 그런 거지. 안 그렇소?”
[······.]
“나이를 오래 먹은 양반이라 그런가, 이상한 구석에서 걱정이 많은 것 같군.”
적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벽 위에 흐르는 미묘한 정적. 댈런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태생부터 악마와 견줄 정도로 강력한 존재인 진룡. 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력을 지닌 적창이라지만, 결코 다섯 대지옥의 주인인 악신들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격차를 더 생생하게 알고 있을 테지. 당장 용신도 악신 중 하나이고, 쑴과 오랫동안 치고받아왔으니까.’
그럼에도 댈런이 가볍게 받아칠 수 있는 건, 그런 적창마저도 도달해본 적 없는 미래에 닿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
종말에 맞선 수백 회차.
모니터 너머의 축약된 시간으로만 수천 시간을 넘어서는 대장정.
수없이 반복된 플레이 속에서, 댈런이 악신의 목을 딴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기회다.’
비록 힘이 제약된 화신체겠으나, 어찌됐건 악신 중 하나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로써 놈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면, 북방 전선도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길 것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사방에서 짓쳐드는 종말. 전선들 중 하나라도 여력이 남아돈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변수가 되겠지.
불안정한 미래는 끊임없이 뒤틀리고 변화한다.
허나 그렇기에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설계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법.
물론 그걸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싸움부터 대비하는 실행력 역시 중요하겠지.
어지러움을 완전히 가라앉힌 댈런은, 첨탑의 지붕에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나이에 대한 직언은 종족을 불문하고 어느 여성체에게나 실례인 걸 아느냐?]
“······어?”
그리고 답보을 익힌 뒤 처음으로, 허공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했다.
[그 반응은 뭐냐. 무감각하고 우둔한 야만인처럼 보여도, 누구보다 현란한 혀놀림을 가진 네가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몰랐다는 핑계를 댈 셈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허, 참. 허면 설마 내가 여성체라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런 뜻이더냐?]
사실 그것도 있기는 한데.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이고.
“······.”
그보다 여기껏 침묵하던 게 그냥 저 말 때문에 꿍해있던 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라고.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