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에클라힘(3)
찰박. 찰박.
살얼음 앉은 진창이 발밑에서 부서진다. 먹잇감을 찾아나온 쥐들이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풍겨오는 도시 지하의 하수도. 댈런은 반쯤 생각에 잠긴 채 그 안쪽을 걷고 있었다.
“······.”
사흘.
차리나가 이야기한 일주일의 유예기간 중 사흘이 흘렀다.
전선 동부에서부터 지원군을 끌고 도착한 일행은, 지난 사흘간 눈코뜰 새 없이 바빠졌다.
‘먼저 루시아 카스타챌드···대대장.’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 어감의 조합이다. 물론 성기사단의 한 개 대대가 우스울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
차리나가 성기사단에게 얻어낸 지원군의 전력은 상당했다.
성기사와 성전사들로 구성된 3개 대대. 총 삼천 명 가량의 병력이 왕도에 집결한 상태.
루시아는 그중 대대 하나를 맡아 지난 사흘간 손발을 맞춰보는 중이었다.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이자 악마 살해자라 불리는 심문관은, 기사단 내에서도 그만한 능력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비요른은 철혈군대의 화약 병기를 개량해주고 있지. 차르국과 미리 거래를 터놓길 잘했어.’
댈런은 일전에 미궁의 길잡이 의뢰를 맡아준 대가로, 특무대를 통해 차르국과 거래를 주고받은 이력이 있었다.
차르국은 비요른에게 합법적인 화약 재료와 기술을 공급해주고, 대신 비요른은 외눈의 명공으로서 왕실과의 협약 연구에 참여하는 게 거래의 내용.
그리고 전쟁을 앞둔 철혈군대의 노력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비요른은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철혈군대 전체의 화약 병기들을 대대적으로 계량하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 펠버는 아예 지휘권 자체를 위임받았으니까.’
엘가이아 마탑주이자 대마법사, 동시에 댈런의 권속인 펠버 발렌티노.
그는 마법 전력의 한 축인 용병 마법사들의 지휘권을 통째로 위임받았다.
‘외부인에게 아예 지휘권 자체를 일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하긴 쑴의 침공 때 이 정도로 용병이 많이 모인 회차도 없긴 했지.’
차리나의 대대적인 지원 요청으로 인해, 대륙의 수많은 마탑에서 보내온 용병 마법사의 숫자는 무려 사백에 달했다.
평소 같았으면 왕실 마법사단의 일각으로 배치되어 활약하게 되었겠지만, 숫자가 숫자인만큼 그러기가 쉽지 않은 상황.
거기다 차르국의 마법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환경적인 여건으로 인해 주로 빙결 계열이나 풍운 계열 술식에 치중된 경향이 강했다.
적군을 향해 강력한 화력을 투사하는 데는 능숙해도, 용병으로 고용된 각양각색의 마법사들을 다루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반면 노인장은 미궁도시 출신에다 대마법사, 거기다 탑주인만큼 여러 모로 적합한 인물이니까.’
각종 마탑들의 지부가 모여들어, 마탑 연합까지 만들어가며 이권다툼을 벌이는 거대도시 팔시온.
펠버는 그런 곳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워놓고서도, 보란듯이 탑주의 자리를 꿰찬 인물이었다.
그건 대마법사라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에 애초부터 능숙하지 않고서야 해내기 힘든 위업이었다.
그런 이유로 펠버는 용병 마법단장 자리를 맡게 됐다.
지난 며칠간 그는 왕실의 마법사들과 소통하는 한편, 용병 마법사들을 소속과 능력에 따라 분류해 전장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에 파묻혀 있었다.
‘바르샤바크가 하루이틀 안으로 도착한다고 했으니···그 전에 일차적으로 교통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긴 하지.’
차르국이 받아낸 지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대륙에 여섯 개뿐인 대마탑 중 하나이자 전격술사들의 성지인 바르샤바크.
차리나가 지원 요청을 보내며 대가로 뭘 약속한 건지, 좀처럼 땅에 내려오지 않는 주문쟁이들마저 구름 위에서 움직이는 천공요새 자체를 이끌고 온다고 했다던가.
‘전부 합치면 대충 십만 대군쯤은 되겠군. 이게 무슨 삼국지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왕도 에클라힘에는 역사적으로 유래 없는 대군이 모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댈런이 전선 동부에서 모아온 지원군을 포함해, 사만 명에 가까운 철혈군대의 정예 병력이 방어군의 주력.
대륙 전역에서 모인 용병과 소집된 민병대까지 합하면 머릿수는 두 배로 불어났다. 거기에 삼천에 달하는 성기사단의 지원군은 덤이었고.
십만에 가까운 대군의 뒤를 지원하는 건 원래 차르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왕실 마법사단과, 펠버를 주축으로 하는 용병 마법사 사백 명의 화력 투사.
거기다 전쟁이 시작되면 하늘에서는 천공요새 바르샤바크가 무자비한 뇌우의 폭격을 내릴 것이고, 땅에서는 외눈의 명공이 개조한 화약 병기들이 불을 뿜을 테였다.
‘수백 회차 동안 북부 전선에 이 정도 병력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마도···종말이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겠지.’
현재 종말의 공세는 그 어느 회차보다도 빠르다.
허나 그만큼 너무 이른 침공이었던 탓에, 아직 대륙의 정세는 장기간에 걸친 대혼란에 빠지기 이전이었다.
원래라면 악마 군세가 도래하는 시점은, 제국과 왕국들의 전쟁으로 분열되고 물류와 교통이 죄다 마비될 무렵.
그때라면 마탑이건 길드건 각자의 코앞으로 들이닥친 위기에 대처하기 급급해, 지원군 따위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허나 지금의 대륙은 건재했다.
국지적인 혼란과 소요가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 전운 역시 감도는 중이라지만 그뿐이었다.
시한폭탄의 도화선이 시시각각 타들어가고 있으나, 아직까지 쾅 하고 폭탄이 터지지는 않은 상황.
때문에 전황은 단순히 희망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백히 유리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으나, 반대로 불리하다고도 결코 볼 수 없을 정도.
‘나를 포함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몇몇 변수를 제외한다고 쳐도···이 정도 전력이라면 승산은 삼 할 이상.’
그 정도면 충분한 확률이다.
일 할조차 안되던 수세를 뒤집은 경험도 숱한 바.
삼 할의 승산 정도라면 충분히 이겨내고도 남았다.
거기다 아군의 손에 쥐어진 변수들은 정량화하기 어려울 뿐, 하나같이 불리한 전황을 몇 번이고 뒤집어낼 수 있는 강력한 조커 카드였다.
“정지.”
찰박.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의 끝.
난데없이 두툼한 손바닥이 눈앞을 막아선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손의 주인은 키가 이 미터 남짓 되는 거한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철혈군대 소속의 경비대인 모양.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뭐냐.”
“거동수상자를 대상으로 불시 검문이 있겠다. 이름과 소속을 대라.”
***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름, 소속. 어려운 질문은 아니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
북부인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키는 댈런보다도 조금 더 커 보였다.
철혈군대의 문양이 새겨진 사슬 갑옷을 갖춰입고, 어깨에 경비조장의 계급표를 부착한 복장.
댈런은 남자의 투구 틈 사이를 응시하며 턱을 긁적였다. 그가 말했다.
“댈런.”
“그래, 댈런. 솔직하게 대답해서 다행이군. 거짓을 고했으면 뱃가죽에 칼침을 맞았을 거야.”
“이 씹새가 알면서 물은 거냐?”
“···뭐?”
투구 틈 사이로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찰박.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서는 남자. 그는 당황한 눈빛을 애써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사흘간 차르국의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더군. 동료들은 악마의 군세를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홀로 딴짓거리에 열중이라지.”
“그래서?”
“철혈군대가 보기에 자네의 행동은···에클라힘을 염탐하러 온 첩자로 의심이 돼.”
첩자는 개뿔. 댈런은 픽 웃었다.
지난 사흘간 그가 왕도의 뒷골목을 들쑤시고 다닌 건 사실이었다.
미궁도시 팔시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왕도 에클라힘 정도면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대도시.
이곳에서 죽은 시체도 도합 네 구나 되었다. 댈런이 며칠간 찾아다닌 건 그 시체들이었다.
‘카지노에서 칼빵 맞은 가짜 딜러의 시체’와 ‘마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고행자의 시체’, ‘왕도의 최후를 함께한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하고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당연하겠지만 조금 다른 이유를 댔을 뿐, 왕실에 허락도 이미 받아두었다.
안 그래도 용병이며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든 탓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뿐 뒷골목은 혼란의 도가니가 된 실정이다.
차르국의 협력자로서 ‘개인 수련’의 목적으로 자유롭게 다니며, 건달 패거리들까지 두들겨 주겠다는 걸 왕실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전시라는 상황이기에 더욱 엄정한 처벌이 내려져야 마땅하겠으나, 백금패 용병이라는 차르국에 공헌한 바를 생각해 순순히 연행에 협조한다면···.”
“야.”
“······.”
“쓸데없는 연기는 관둬라.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찰박.
남자가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억!”
대답보다는 도끼가 빨랐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돋아난 도끼자루.
두 쪽으로 갈라진 강철 투구가 첨벙 소리를 내며 하수도 진창에 처박혔다.
“사전조사 하나는 잘했군. 그건 칭찬하지.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한 변장은 손쉽게 간파당한다는 걸 알고, 선천적인 육체 변이 능력자를 데려오다니.”
남자의 얼굴은 조금 기형적이었다.
보통보다 뾰족한 이목구비 정도까지야 봐줄 만했지만, 뺨에서 한 뼘 길이로 길게 자라난 수염 가닥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얼굴을 죄다 가리는 투구를 쓴 이상, 털 몇 가닥 정도야 큰 의미는 없었다.
정교한 투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초인라도 간파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 뭔지 아나?”
[···뭐지?]
하수도 어딘가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약간 찍찍거리는 목소리. 댈런은 씩 웃었다.
“기껏 변장해서 유인할 생각이었으면 좀 덜떨어진 놈을 데려왔어야지. 내가 허리띠에 손만 얹었는데 반응할 정도로 감 좋은 놈이 고작 경비조장 수준에 머물러 있겠냐?”
[······.]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아커만의 작도법을 손에 넣은 이상, 방금 전의 한 마디만으로도 상대를 추적하는 일은 가능했으니까.
후우.
짧게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하수도의 전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걸어왔던 길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내디뎌보지 못한 통로들, 벽과 벽 사이의 숨겨진 공간들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심상 너머 영역의 일대를 굽어보는 시야와, 아커만의 작도법이 만나 이적이 발아하고.
회백의 투사가 남긴 힘, 세상을 자신의 색채로 물들이는 권능을 덧씌워 그 이적을 완성해낸다.
「몽환추적(夢桓追跡) : 회백전도(灰白全圖)」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정경.
음영의 짙음으로 표현된 근방 일대의 지도는, 일견 게임의 미니맵과도 닮아 있었다.
미니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단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인식하는 풍경이라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건 단점이라기보다 장점이었다.
“차리나가 말한 그림자가 암월단을 의미할 줄이야. 이쪽에서 굳이 먼저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먼저 손을 쓴 이상 각오는 되어있겠지.”
나직한 중얼거림이 텅 빈 하수도의 통로를 따라 메아리치고, 몸을 돌려 벽을 향한 그가 가만히 손을 들어올렸다.
머릿속에 그려진 일대의 지도에 따르면, 목소리의 주인인 암월단의 암살자는 십수 개의 벽 너머에 숨어있었다.
아무리 댈런이 빠르다고 해도 놈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단의 간부급.
통로를 따라 놈을 쫓는다면 분명 모종의 수로 달아나버리겠지.
기회를 줄 생각은 없다.
눈앞으로 다가운 싸움에서 방해가 될 만한 변수는 뿌리째 뽑아버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암월단 역시 언젠가는 결착을 지어야 할 상대였으니, 다소 이른 감이 있더라도 상관은 없겠지.
휘리―
어깨 위로 들어올린 손이 한순간 흐릿해지고.
쉬이익―
벽을 코앞에 둔 도끼의 번쩍임이 불현듯 허공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몇 초 뒤.
콰광― 쿠르르르···.
하수도 저 어딘가에서 무언가 붕괴하는 소리가, 통로를 따라 아득하게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 사이에는 찍찍거리는 희미한 비명도 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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