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77화 (177/288)

왕도 에클라힘(5)

뿌옇게 시야를 가린 흙먼지. 황금빛 폭발에 벽과 천장이 무너져내리며, 수백 년간 쌓여온 퀴퀴한 악취가 훅 올라온다.

댈런은 회수한 도끼를 들고 그 먼지구름 안에 가만히 서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공간에서 연막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암살자가 역습을 노린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쉬이익―

그 예상에 호응하듯, 왼쪽 뒤 사각에서 뻗어져 목줄을 노리는 단검.

슉!

허리를 틀어 피해내자마자 마치 예측했다는 듯, 동선을 따라 길쭉한 꼬챙이가 찔러들어온다.

카각!

꼬챙이에 도끼를 걸어 저지한다. 그 순간 연막을 뚫고 암기 몇 개가 날아들었다.

피피핑―!

다리와 팔, 어깨를 노리는 얇은 암기들.

역시나 그가 움직일 걸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대처하기 어려운 부위와 방향만을 골라서 노리고 있었다.

‘···예지력인가.’

콰앙!

발로 지면을 내리찍자 돌무더기가 확 튀어오르며 암기를 쓸어버린다. 연막 너머로 흠칫 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잠시뿐이었다.

수싸움의 개념을 넘어 찰나 뒤의 미래를 예측하고 쏟아지는 공격들.

공격을 막으면 막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다음 행보를 읽어낸 뒤 암기나 단검 따위가 날아든다.

“이건 좀 의외로군. 아예 계파 전체를 통째로 끌고 올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한 초인이라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공세의 한복판.

흙먼지가 뿌옇게 휘저어지는 가운데, 댈런은 모든 공격을 흘리고 걷어내며 중얼거렸다.

“아들을 지극히 아끼는 것처럼 블러핑하더니, 아예 자식들을 모조리 갈아 넣을 심산이었나?”

“······!”

그 여유로운 발언에 연막 너머에서 초조한 기색이 느껴진다.

댈런은 독 단검 쥔 손목을 비틀어 꺾으며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암월단의 상급 간부, 픽카케 스카이마스.

여섯 계파 중 하나를 다스리는 그에 대해 댈런은 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놈이 그 자리에 올라간 건 수준급의 체술과 피에 흐르는 예지력 덕분이었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 역시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도.

물론 그 예지력이라는 게 백안의 선각자처럼 예언 수준의 능력인 건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픽카케 본인조차 기껏해야 1초를 조금 넘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허나 수백 분의 일 초에 승패가 결정되는 초인들의 싸움에서, 예지력이라는 변수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바.

어쨌거나 그 혈인능력 하나만으로 계파 중 하나를 이뤄낸 놈이다. 그런 놈이 자신의 전력을 죄다 이끌고 찾아올 줄이야.

“걱정 마라. 자식들만 보내지는 않을 테니. 대도시의 하수도만큼이나 쥐새끼들에게 어울리는 무덤은 없긴 하지. 오늘은 암월단의 한 계파가 사라지는 날이 되겠군.”

[···멍청한 놈들! 저놈이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게 내버려 둘 거냐! 겁먹지 마라. 이곳은 수십만이 사는 도시의 지하, 놈은 영역을 사용하지 못해!]

끊이지 않는 도발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걸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픽카케의 전성이 하수도의 통로를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빙고.’

그리고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유물 무기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암월단의 상급 간부나 되는 놈이 고작 폭발 하나에 당해줄 리는 없다.

따라서 폭발 이후 기척이 소실된 건 놈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폭발의 충격과 여파를 틈타 숨어든 뒤, 댈런의 감각과 고유 스킬로도 쉽게 간파할 수 없도록 철저한 은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일 뿐.

그러나 한 번 전성을 뱉은 이상 회백전도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다.

“거기 있었냐.”

머릿속 흑백의 지도 위, 픽카케의 위치가 스르르 떠오르고.

[저 새끼를 죽여―!]

직감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음을 알아차린 놈이, 발악에 가깝게 울부짖었다.

댈런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연막을 헤집고 수십 자루의 칼날이 짓쳐들어오는 건 동시였다.

쐐애애애―!

맹독 다트. 톱날 단검. 얇은 바늘 같은 암기. 소리 없이 쏘아진 뾰족한 납탄.

연막으로 눈을 가린 뒤 몰아치는 암살자들의 합공은, 공격 하나하나가 영역을 이룬 초인에게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궤적과 사선이 철저하게 동선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에서 비롯된 위협.

허나 바꿔 말하자면 이건 정교하게 짜 맞춰진 수싸움이 아닌, 예지력에 의존해 즉흥적으로 드러난 틈을 파고드는 방식의 공격이라는 소리다.

초월자들과의 싸움으로 예지에 가까운 육감과 수백 갈래 수싸움에 이골이 난 댈런의 입장에서는, 당해줄 이유가 전혀 없는 공세였다.

스으―

숨을 들이쉰 찰나의 순간.

극한으로 가속된 의식 속에서, 몇 번의 공방만으로 상대방의 공세를 분석해낸다.

각 공격의 위력과 방향, 속도, 목표점에 따라 대처할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슈르르륵!

모든 궤적을 머릿속에 담아낸 순간, 회오리바람이 팔과 다리를 휘어감는다.

「술식갑주 : 백풍갑(伯風甲)」

「열풍(裂風)」

콰자자자자작─!

그건 마치 정교한 춤사위와도 같았다.

수십 가닥의 회오리바람이 공격과 공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막아내는 걸 넘어서서 가로채 자기 것처럼 이용하는 광경.

푸욱!

찌이이익!

깊게 내지른 단창은 물 흐르듯 동료의 가슴팍을 꿰뚫고.

퍼버버벅!

찍! 캬아악!

사방에서 날아든 비수와 암기들은 목표물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가 쥐인간들의 가죽 위에 빼곡하게 꽂힌다.

단검의 검면을 손등으로 쳐낸다. 독니를 드러낸 아가리에 가볍게 발끝을 꽂아 넣는다.

고개를 슬쩍 틀어 관자놀이로 쏘아진 납탄을 피해냄과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이자 납탄의 방향이 휘어지며 다른 쥐인간의 면전에 꽂혀들었다.

가벼운 손동작 하나에 바람 줄기가 몇 갈래씩 움직이고, 짓쳐드는 공격을 모조리 낚아채며 반대로 되돌려주는 기예.

다른 이가 보기에는 그 자체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회백의 대지에서 여덟 개의 분신으로 공격해오던 초월자를 상대해본 댈런의 입장에서는 하품 나오는 공세일 뿐이었다.

“캬아아아악!”

“찌이익! 켁!”

“물러나! 물러나!”

한순간에 수십이나 되던 암살자들의 삼분의 일이 쓰러지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놈들이 혼비백산하며 거리를 벌렸다.

뿌옇게 피어올랐던 먼지 구름은 죄다 흩어지고, 대신 쓰러진 쥐인간들에게서 올라오는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해진 하수도.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고는 말했다.

“이제 내 차롄가?”

그리고 다음 순간.

「뇌조(雷條)」

파지지직!

푸른 전격의 줄기가 하수도의 통로를 한가득 뒤덮었다.

***

낡은 하수도에 쥐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대도시의 하수도가 시궁쥐의 온상인 건 하루이틀이 아니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그 쥐들의 울음소리가 조금은 사람의 목소리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벽이며 천장이 부서지는 굉음이 뒤섞여 들린다는 것이었다.

콰광! 꽈르릉―

하수도 천장이 우르르 무너져내리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뻗어나온다.

뇌성과 함께 통로를 번쩍하고 밝힌 섬광은, 쥐인간 셋을 찢어발기고 네 번째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풍덩! 풍덩!

콸콸 흘러가는 오수의 강에 잠겨드는 시체들.

하수도 중에서도 깊은 곳인 터라, 그만큼 많은 오수가 모여들어 수심도 깊었다.

타다다다―

댈런은 수면 위를 땅처럼 디디며 내달렸다.

뇌조로 암월단원들을 궤멸에 가깝게 몰아넣은 뒤, 그는 도주하는 픽카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머릿속 지도에 선명히 그려진 픽카케의 도주로를 보아하니, 통로를 두어 번만 꺾으면 놈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막아! 막으라고!]

모퉁이 하나를 돌아선 순간, 픽카케의 전성이 통로를 메아리쳤다.

방금까지 달아나던 쥐인간들이 그 한 마디에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찌이이이!

찍찍! 찌익!

뇌리를 지배하던 공포가 날아가고, 새까만 눈동자를 광기와 살의로 번들거리며 달려드는 쥐인간들.

암월단원의 양성 과정에서 자행되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과 훈련의 효과였다.

“쯧.”

그래봤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지만, 사냥꾼의 입장에서는 살짝 짜증이 올라오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시체 회수를 마치고 악마들의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 괜히 암살자 하나 잡겠다고 자꾸 시간이 끌려봐야 좋을 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의 도주 방향이 댈런이 마지막 시체를 회수하러 가던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수도 저 깊은 곳. 암월단이 에클라힘에 만들어놓은 지부이자 은신처.

아무래도 놈은 그곳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어올 생각인 듯했다.

찌이이익!

천장에 매달려있던 쥐인간 하나가 머리 위를 덮쳐든다. 평균을 아득히 웃도는 체격은 하이 오크에 비견될 정도였다.

댈런은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저 뒤쪽 통로에서 손도끼가 날아와 쥐인간의 미간에 처박혔다.

첨벙!

캬아아악!

머리에 도끼를 꽂은 채 물에 빠지고서도, 근육질의 팔다리를 놀려가며 댈런의 등을 덮치려 하는 쥐인간.

손을 한 번 더 까딱이자, 놈의 미간에서부터 터져나온 황금빛 폭발이 육중한 거체를 산산조각내버렸다.

콰아아아앙―!

매 투척 때마다 축적되는 거리를 계산하고, 적재적소에서 유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시체를 회수하며 가진 바 능력이 다변화될수록, 매 전투의 양상은 판을 설계하고 수싸움을 이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왔으니까.

초월자들은 영역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현실에 강요할 수 있는 레벨의 강자들이다.

단순한 힘자랑만으로 이길 수 없는 이들.

아니, 그런 힘자랑마저도 심리전과 수싸움의 일환으로 써먹어야 승리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찌이이이―!

콰직!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쥐인간들을 하나씩 처리해가며, 픽카케의 뒤를 쫓아 하수도의 더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내려간다.

추적은 오수가 넘치는 구간을 지나치고, 이제는 관리는커녕 이용조차 하지 않는 하수도의 폐쇄 구간까지 이어졌다.

수백 년도 더 전에 지어진 채 방치되어, 오수마저도 말라붙은 버려진 통로들.

그 끝에 댈런의 눈앞을 가로막은 건 거대한 철문이었다.

콰아앙!

도끼질 한 번으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눈앞에 펼쳐진 건 거대한 전당이었다.

은은한 빛을 뿜는 마력석들 사이, 난해한 형상의 그림들이 양각된 천장. 그 천장을 떠받치는 굵은 석재 기둥들.

낡았으나 빛이 바래지 않은 금속 조각상들이 기둥마다 곁에 도열해 있고, 그 끝에서 이어지는 계단 위에는 넓은 육각형의 탁자가 놓여있었다.

“흐흐···잘 따라와줬다, 전사. 이곳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암월단의 비처···너 같은 전사에게 어울리는 무덤이지.”

픽카케 스카이마스는 그 육각탁자 위에 있었다.

지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음에도, 얼굴에는 오히려 승리의 미소가 만연한 모습.

놈은 의미심장한 찍찍거림을 흘리며, 쥐발바닥으로 탁자 가운데의 보석을 지그시 밟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전당의 천장에서 빛나던 마력석이 한순간 전부 빛을 잃었다.

팟―

한순간에 암흑천지가 되어버린 지하의 전당.

기기기긱··· 쿠웅―!

천장에서 무언가 기관장치가 작동하더니, 이내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전당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물체가 살아있음은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깊은 숨소리. 오래된 털가죽의 악취.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그르렁거림과, 차디찬 공기를 밀어내는 짐승의 온기가 피부에 닿았으니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암월단의 수호자들 중 하나지. 암월단의 초대 첫 번째 손가락이 키우던 애완 짐승이자, 그 시대의 초월자를 잡아먹은 괴물. 흐흐···너 정도면 수백 년의 굶주림을 달래주기에 충분할 거다.”

전당의 저편, 짐승의 배후에서 픽카케가 비열하게 웃었다.

동시에 호박만 한 열 쌍의 붉은 눈이 번뜩이며, 어둠을 뛰어넘어 자신의 앞에 놓인 먹잇감을 노려봤다.

댈런은 그 시선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위, 어둠 속에서 떠오른 글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고작 몇 글자의 알림창에 불현듯 모니터 너머의 기억들이 밀려온다. 악신 에낙사구스의 깃발을 앞세워 온 세상을 불태우던 장면들.

하지만 지금은 사색할 때가 아니다. 상념에 잠기는 걸 조금 뒤로 미루며, 댈런은 도끼를 허리띠에 꽂아 넣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리려다, 잠시 멈칫하곤 말했다.

“아, 인사를 깜빡할 뻔했군. 고맙다.”

“···뭐?”

어둠 속, 픽카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안 그래도 저거 어떻게 회수해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했거든. 봉인을 내가 풀 수 없으니 천장을 통째로 부숴야 하나 싶었는데,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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