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78화 (17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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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에클라힘(6)

이 세계가 단지 게임이라고만 생각하던 시절, 댈런은 이따금씩 악신의 세력에 합류해서 플레이하곤 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게임의 자유도가 그만큼 높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즐겨보자고 생각했던 것.

물론 백 회차를 훌쩍 넘어갔을 무렵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오기를 품고 클리어에 시간을 갈아넣기 시작한 이후, 그가 악신 측에 붙는 이유는 오직 게임 클리어를 위한 염탐의 목적이었다.

수천 수만의 삶을 악신에게 바친 끝에, 실제로 얻어낸 수확 역시 결코 적지 않았고.

‘그걸로 변명이 될까.’

그럼에도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고통 속에 내던져진 수없이 많은 생명들에게, 당신들은 마지막 한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마중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피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킬 콤보 한 차례면 어느새 마을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이 전당에서 최후를 맞이한 시체 역시 같은 일을 하던 중이었다.

에낙사구스의 군세와 함께 왕도 에클라힘을 불태우고, 지원군으로 파견된 성기사단의 생존자들을 추격해 도시의 깊은 지하까지 다다랐던 것.

‘시, 신이시여···커허억······.’

지능 수치에 따라 비약적으로 상승해버린 기억력은, 모니터에 비친 마지막 성기사의 죽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그런 그래픽에 중복된 성우로 녹음된 목소리.

단순한 폴리곤과 데이터 덩어리. 쏠쏠한 경험치와 악신의 은총으로 캐릭터를 풍족하게 만들어줄 희생물들.

주말에 속옷 바람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딸깍거리던 아저씨가, 과연 그 사람들의 목숨을 거둘 자격이 있었을까.

오래 전 영역을 이루며 끝맺었던 내적인 갈등은, 회백의 투사와 만난 이후 이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후우.

고개를 털어 떨쳐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 세상에 내둘린 그 당시의 자신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애당초 한낱 게임이 어떤 세계의 현실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건 지나가다 밟아죽인 개미 한 마리가 사실 세상을 구할 영웅이었다는 것처럼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쉬이이이이―!

눈앞까지 다가온 괴수의 꼬리를 바라보며, 댈런은 가속된 의식 속에서의 상념을 끝맺었다.

과거의 실책을 부정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찌됐건 그 실책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많은 지식들을 얻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악신의 편에 붙은 회차들을 통해 각종 악마와 마물에 대한 공략뿐 아니라, 초월자를 잡아먹었다는 눈앞의 괴수를 상대하는 방법도 익힐 수 있었으니까.

쫘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목표를 강타한 꼬리.

말채찍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 꼬리 끝부분이 굉음을 내며 공기를 찢는다.

괴수의 꼬리에 얻어맞은 댈런이 기둥을 부수고 날아갔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전당 벽에 신형이 처박히고, 관전하던 픽카케가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크히히히헤헤! 그래, 이거지! 그 육중한 몸뚱이에 우겨넣은 알량한 주문 따위로 고대의 짐승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응?”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맺혔기 때문이었다.

꽈릉―!

뇌성과 함께 괴수의 거체를 강타하는 섬광.

몸길이가 30미터에 가까운 괴수가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나고, 허공에 맺힌 회백색 기운이 흩어지며 댈런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어떻게···.”

픽카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부, 분명 맞았는데?”

“맞기는 지랄.”

터벅.

댈런은 자연스럽게 허공을 내디뎠다.

“고대 암월단의 초기 실험체 바르카부스. 무시무시한 괴수이긴 하지. 열 쌍의 눈은 일부 5위계의 초월자도 현혹시킬 정도로 강력한 환각을 만들어내고, 덩치에서 비롯된 완력은 건물 하나쯤은 손쉽게 무너뜨릴 수준이야.”

발밑에서 일렁이는 파문과, 청백색의 뇌전을 머금은 성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픽카케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놈은 방금 전 댈런이 처박혔던 전당 벽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분명 있어야 할 몸뚱이 대신, 잿빛으로 흩어져가는 그림자의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댈런이 말을 이었다.

“진룡만큼이나 두껍고 단단한 비늘에, 독과 냉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능력. 일년의 반 이상 눈이 내리는 북부에서 이런 괴수를 상대할 마법사는 많지 않지. 전사는 말할 것도 없고.”

“······.”

“유일하게 열기에 취약한 편이긴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미궁도시에서 내가 개방한 영역의 주축은 뇌전. 거기다 기상의 변화를 트리거로 삼는 방식이었으니, 이런 지하에서는 사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턱을 슬슬 쓰다듬으며 쏟아내는 말. 암월단에서 여섯 번째로 강한 암살자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쩍 벌어진 길쭉한 주둥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혹은 어째서 따위의 현실부정들.

왠지 웃겨 보이는 얼굴이었다. 새삼 변화가 실감나기도 했다.

저 괴수의 뱃속에 들어있는 시체는, 성기사단을 말살한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픽카케가 뒤통수를 때린 결과물.

모니터 너머의 폴리곤 덩어리로는 몇 번을 복수해도 저런 생생 표정까지는 볼 수 없었지. 댈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성검을 툭 놓았다.

그리고 뇌격의 여파를 수습하고 몸을 일으키는 괴수를 향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몸을 기울였다.

투웅―

길쭉하게 늘어지듯 쏘아진 신형.

「회명(回冥)」

그 희끗해진 음영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

「이연답산(二聯踏散)」

찰나의 시간 뒤, 그의 몸은 둘로 늘어나 있었다.

괴수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도약하며, 각자 손에서 주문을 끌어올린다.

「뇌조(雷條)」

파지지지직―!

손아귀를 뒤덮은 전격의 그물이 거대한 발톱으로 변한 뒤, 수십 가닥의 전격으로 쪼개지며 괴수의 몸뚱이를 지져대고.

「염사(炎巳)」

화르르륵!

가볍게 뽑아든 단창을 툭 던지자, 십여 미터 길이의 불뱀이 괴수의 몸뚱이를 휘감고 태워낸다.

캬아아아아아!!

두터운 비늘도 그 사이를 파고드는 열기와 전류의 고통마저 막아줄 순 없었다.

쏟아지는 주문의 폭격에 몸부림치던 괴수가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그 안쪽에서 어떤 전조도 없이 녹색 광선이 쏟아졌다.

콰아아아―!

용의 숨결을 흉내내어 만든 포격에, 댈런의 두 신형 중 하나가 휩쓸려 회백색 연기로 변해 사라진다.

“벌써 브레스 패턴이라. 빠르군.”

손끝에 푸른 정광을 번뜩이는 댈런은, 슬쩍 웃으며 다시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고작 10초.

2페이즈 시작이었다.

***

콰아아아― 콰르르르!!

사방으로 뻗어지는 포격의 향연. 현대의 지구인이라면 어느 축제의 레이저 쇼라고 생각할 법한 광경.

허나 그 첨단에서 실시간으로 으깨지는 기둥과 천장의 석재들은, 평범한 레이저 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콰과과과! 파지지직―

포격과 전격이 엇갈려 교차하고, 발밑에서 화염 기둥이 솟아오르며 얼음폭풍이 휘몰아친다.

숨쉴 틈 없이 몰아치는 술식과 그에 맞서는 괴수의 몸부림에, 수백 년간 보존되온 전당이 폐허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없이 번뜩이는 주문의 광채. 어둠 속에 감춰졌던 괴수의 형체는 이제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우와 미친, 저건 대체 무슨 누더기 괴물이래···.]

그리고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아르보르의 중얼거림처럼, 놈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쯧, 역겨운 쥐룡 새끼.”

지네처럼 수십 개의 팔다리가 붙은 길쭉한 몸뚱이에, 전체 몸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차지하는 꼬리.

등에는 용의 피막 날개 같은 것이 큼직하게 붙어있고, 비늘 덮인 몸뚱이에는 나무뿌리 같은 촉수들이 수없이 삐져나와 덜렁거린다.

거기다 눈 열 개 달린 쥐대가리 같은 머리통까지 붙여놓으니, 그야말로 악마마저 경악할 법한 괴이한 생명체이긴 했다.

모니터 너머에서도 경악할 수준의 몹 디자인에, 첫 조우 때는 어떻게 대처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을 정도로.

“생각보다 재주가 더 좋구나! 하지만 바르카부스는 용에 필적하는 괴수···그 정도 화력으로는 쓰러지지 않는다!”

넋을 잃고 전투를 쳐다보던 픽카케가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타까울 정도로 악에 받힌 목소리. 허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푸른 전격이 비늘 사이를 파고들고, 화염이 비늘 겉면을 그을리고는 있으나 그뿐.

숙련된 대장장이가 주조한 합금 이상으로 단단한 비늘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고, 가까스로 안쪽 속살까지 미친 피해는 괴수가 미친 듯한 재생력으로 실시간으로 회복하고 있었으니까.

[···극악한 혼종이로다. 에낙사구스의 솥구덩이를 따라한 결과물인 것인가.]

심상 너머 적창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룡의 추측대로 암월단은 에낙사구스의 안배로 만들어진 조직.

다만 원채 꽁꽁 숨겨진 정보이기에, 댈런도 백 회차가 훌쩍 넘어갈 때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이기도 했다.

대륙에는 흑마법사를 제외하고서도, 암월단과 같이 악신의 끄나풀 역할을 하는 조직이 꽤 많았다.

암월단처럼 음지의 조직뿐만 아니라,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단체들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고.

‘암월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놈들도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내겠지.’

그렇게 되면 곧 대륙은 전란에 휩쓸리게 될 테였다.

양지에서 활동하는 악신의 안배들 중에는, 국가를 움직일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단체도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당장으로서는 눈앞의 괴수를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처치하기 불가능해 보이는구나···저 서인(鼠人) 암살자는 그걸 노린 듯 하고.]

‘그럴 거요. 설령 억지로 개방한다 해도 차르국과 척을 지게 될 거라 생각한 것이겠지. 구름 위의 낙뢰가 이곳까지 닿으려면 도시의 한 구역을 통째로 박살내야 할 테니까 말이오.’

[과연 암살자다운 발상이로구나. 과할 정도로 목표의 능력을 제약하는 쪽에만 치중한 모습이야.]

적창이 말했다. 그녀는 낮게 웃고 있었다.

[그럼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용을 본뜬 저 가짜 혼종에게, 진룡의 모습을 본 네가 만들어낸 영역 속 작품을 말이다.]

약간 신난 듯한 울림.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염사가 소멸하며 단창이 되어 돌아오고, 세 개로 나뉘었던 신형이 그림자처럼 녹아 흩어졌다.

캬악?

갑작스레 멎은 공격에 괴수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열 쌍의 눈동자에 잡힌 건, 단창을 어깨 위로 들어올린 채 눈을 반개한 댈런의 모습.

쿠르릉···.

반개한 눈동자 너머.

한없이 늘어난 시간 속에서, 영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설산의 어떤 정경을 비춘다.

높게 뻗은 산봉우리들 사이에, 유독 깊게 꺼진 분지에 웅크린 짐승.

몸통은 길다란 불뱀의 형상에, 날개와 두 발은 시퍼런 전격의 그물로 번쩍인다.

‘화염 화살과 쏘아지는 번개.’

이 심상이 완성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두막의 뒷마당에서 꼬리 물기를 하던 주문들은, 고유 스킬인 염사와 뇌조로 바뀐 뒤 한동안 산맥 사이를 배회했으니까.

일반적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하나.

허나 시간이 흐르며 두 주문에서 뻗어나온 가능성은 댈런의 심상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댈런이 적창의 힘에 익숙해져갔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청린 아카샤의 성장을 끊임없이 옆에서 지켜본 영향이기도 했다.

캬아아───!

그리고 그 끝에 만들어진 건, 산맥에 둥지를 튼 두 번째 용.

「영역 개방 : 이색의 비룡」

적창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낸 전격과 화염의 용이, 세계의 경계를 찢고 그 날개를 현실에 드리웠다.

그리고.

으직!!

새빨간 화염으로 넘실거리는 주둥이가 콱 닫히자, 거대 괴수의 머리통이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뜯겨나갔다.

“···어?”

“어는 무슨.”

댈런은 검을 뽑아 내리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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