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79화 (17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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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라힘 방어전(1)

쿠과가가가각!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진 단순한 검격.

그 단조로운 선분에 전당 바닥이 말린 두부처럼 부스러진다.

“크하아악!”

예지력의 경고를 받은 픽카케가 이를 가까스로 피해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왼쪽 팔이 어깨부터 통째로 잘려나갔으니까.

“왜, 왜···이럴 수는······.”

경악으로 물든 쥐인간의 얼굴. 검끝이 한 번 더 호선을 그려낸다.

이번에도 픽카케는 예지력으로 껑충 뛰어 피했다. 그 결과 허리가 잘리는 대신 두 허벅지 아래쪽이 사라졌다.

“여, 영역에 대체 몇 개의 풍경을···신도 아닌 한낱 인간이, 어떻게······.”

차가운 돌바닥에 등을 뉘인 채, 피거품을 그륵거리면서 중얼거리는 말.

댈런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걸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머리 잃은 괴수가 쿵 하고 쓰러졌다.

화륵! 까드득! 우득!

화염과 전격의 용이 괴수의 사체를 씹어 부수는 동안, 댈런은 곁에 떨어진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

- 악신 에낙사구스의 기수로서 차르국을 멸망시킨 암흑기사의 시체. 대륙을 집어삼킨 악마 군세의 선두를 이끈 기수는 수많은 살육과 약탈로 악명이 자자했으나, 에클라힘 공성전 이후 같은 편이었던 암월단의 간부가 판 함정에 빠져 죽었다.

악인의 끝은 비참한 법이라던가.

그 말대로 잿빛 시체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괴수에게 온몸이 산 채로 짓씹히고, 위장에서 녹아내리는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겠지.

“······.”

그건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불태운 흑마법사가 맞이하기에 합당한 최후였다.

그럼에도 그 결말을 보는 댈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떤 통쾌함 대신 눅진하고 흐릿한 의문이었다.

만약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았다면, 죽어 마땅한 이 악인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눈 덮인 산을 내려와 악신 에낙사구스의 기수가 되었을까?

아니면 오두막의 사냥꾼으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삶을 이어나갔을까?

“···쯧.”

답 없는 의문을 떨쳐내고는 손을 뻗는다. 어쨌든 지금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배신당한 악신의 기수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마력 +1, 영혼 착취(B)]

댈런은 시체를 회수한 뒤 용을 역소환하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픽카케는 그 사이 또 헛짓거리를 벌이는 중이었다.

“에낙사구스여, 내 직접 고문해서 죽인 삼백 명의 영혼을 바칩니다. 마지막 힘···을···크아아아아!”

품속에서 꺼내든 새까만 수정 목걸이가 불길하게 진동하더니, 이내 퍽 하고 깨지며 쥐인간의 몸에 사특한 힘이 깃들기 시작한다.

슈르륵!

잘려나간 왼팔과 두 다리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기운.

절단면에서 뻗어나온 촉수 같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팔다리의 실체를 이뤄냈다.

방금까지 바닥을 기던 쥐인간이 한순간에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일으켰다. 놈은 품속에서 낡은 스크롤 하나를 꺼내들며 소리쳤다.

“너, 오만한 전사야! 내가 지금은 물러나지만, 너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다!”

유일하게 멀쩡한 오른손과 보랏빛 그림자로 재구성한 왼손.

쥐인간은 양손으로 우악스럽게 스크롤을 움켜쥔 채, 당장에라도 찢을 듯이 팔에 힘을 잔뜩 줬다.

하는 말과 행동을 보아하니, 저건 분명 텔레포트 스크롤이겠지.

실패율이 아득하게 높기로 유명한 마법을 안정적인 스크롤로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물을 악신에게 바쳤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다 잡은 적을 놓치기 직전의 상황. 하지만 댈런의 얼굴에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두 번 딱딱 튕겼다.

“쎄― 타로스.”

빠르고 낮은 영창.

손끝을 튕기고 움켜쥐는 간단한 트리거와 함께 맺어진 술식.

용이 남긴 열기로 이글거리던 전당의 공기가 차갑게 식고, 이변을 느낀 픽카케가 스크롤을 찢으려 한 순간이었다.

“흐으?”

손이 없다.

스크롤을 잡고 있던 두 손 중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은 두 다리였다. 지지할 다리를 잃은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끄아아악!”

잘린 허벅지가 철퍽 소리를 내며 땅에 닿고, 뼈와 근육이 짓이겨지는 통증에 찍찍거리는 비명이 전당을 메아리친다.

댈런은 움켜쥐었던 오른손을 슬쩍 펴봤다. 진한 보랏빛 기운이 손아귀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삼백 명의 원혼을 바쳐 얻어낸 팔다리와 활력. 영혼을 갈아서 만들어낸 지옥의 동력이었다.

“···이런 느낌인가.”

지옥문의 열쇠 스킬을 얻은 지 꽤 되었음에도, 제대로 흑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핏빛 제례용 단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원혼을 흡수하고, 복잡한 주문의 절차를 전부 생략하며 지옥문을 비틀었던 경험뿐.

다만 악신의 기수가 가지고 있던 비기답게, 영혼 착취는 그런 얕은 수준의 재주가 아니었다.

B등급 스킬부터는 신비의 영역. 그 능력은 일반적인 흑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바.

영혼 착취 스킬은 살아있는 생명의 영혼을 포함해, 추출된 영혼이나 그 영혼으로 얻어낸 지옥 마력마저도 자유롭게 강탈할 수 있는 이능이었다.

그건 상대가 악마이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흑마법사가 아닌 한에야, 무슨 짓을 하던 댈런이 일방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후우.”

어찌됐건 마치 살아있는 듯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지옥 마력은, 굉장히 이질적이면서 불쾌한 감각이었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린 채 픽카케에게 다가갔다.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하던 일은 마무리하는 게 맞았다.

“끄으, 흐으으으······.”

다시금 바닥을 기게 된 픽카케는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댈런은 아공간에서 핏빛 단검을 꺼내, 손 안에 응집된 힘을 단검에다 불어넣었다.

“자, 잠깐! 너도 흑마법사였···!”

“쎄 글램.”

쩌저저적―!

허공에 균열이 열렸다. 불길한 마력이 일렁이는 공간의 틈.

입을 쩍 벌린 쥐인간이 뭐라 말을 이어갈 새도 없이, 댈런의 도끼가 저 혼자 날아들어 놈의 머리통을 찍어버렸다.

“컥···!”

쥐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길쭉하게 열린 균열이 놈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빨아들인다.

암월단의 상급 간부를 지옥 직행 열차에다 태워보낸 댈런은 손을 휘저어 지옥문을 닫았다.

[지옥은 광대하지. 다섯 신들의 지배력마저 닿지 않는 곳이 그리 드물지 않을 정도니라. 네가 놈을 직접 지옥으로 보내버렸으니, 에낙사구스라도 놈의 영혼을 찾을 수는 없을 게다.]

적창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말없이 단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단검이 웅웅 떨리고 있었다. 잠깐 맛본 힘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특한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는 핏빛 단검.

그 울림은 마치 더 많은 영혼과 피를 가져다달라 유혹하는 듯했다.

댈런은 무심한 눈빛으로 단검을 아공간 안에 툭 던져넣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악! 따거라!]

[놈의 영혼은 영겁에 달하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소멸해가겠지. 타인의 영혼을 희생시켜 힘을 얻는 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로구나.]

적창의 목소리는 어딘가 엄중했다. 댈런은 픽 웃었다.

“타인의 영혼을 희생시킨다···그거 나 이야기하는 거요?”

[그, 그럴 리가 없잖느냐. 애당초 너는 아무 대가 없이 놈을 벌한 것 아니었느냐. 본디 힘 자체가 악하지는 않은 법이다. 그걸 쥔 이의 의도가 악해질 수는 있어도.]

“···그런가.”

[그래. 우리 용들의 몰락 역시 그러했느니라. 용이 처음부터 악마와 같은 부류가 되었던 게 아니다. 용신이 그 길을 택하지만 않았더라도···.]

말끝을 흐릿하게 얼버무리는 적창. 댈런은 관심을 접고 발걸음을 옮겼다.

픽카케의 시체는 죽은 뒤에도 텔레포트 스크롤을 꽉 쥐고 있었다. 댈런은 조심스레 스크롤을 회수하고는, 놈의 품속을 마저 뒤져보았다.

얻어낸 건 많지 않았다. 그로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암살 도구들과 돈 조금, 그리고 암기 수십 자루가 끝.

댈런은 그것들을 모아 스크롤과 함께 아공간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크롤은 활용할 방도가 무궁무진했다.

회백의 투사에게서 계승한 이능으로 공간 도약을 유사하게 흉내내게 된 댈런이었지만, 그 방식에도 나름의 한계들이 존재했다.

다른 이와 동행할 수 없다는 점이나,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다는 점 등등.

스크롤을 연구하면 그런 한계점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그 과정에서 스크롤에 내장된 목적지, 즉 암월단의 숨겨진 심처가 어디 있는지 특정할 수도 있을 테고.

‘할 일이 많군.’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해야 할 일은 계속 늘어만 간다.

댈런은 손끝에서 불꽃을 일으켜 괴물과 암살자의 시체를 태워버리고, 전당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로써 이 도시에 잠들어있던 시체는 전부 회수했다.

지금부터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에클라힘 궁전의 첨탑.

댈런은 난간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저 아래쪽 거리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왕도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은, 각종 결계와 은폐 술식으로 외부에서는 모습조차 감춰진 장소였다.

성벽 너머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인 이점 뿐 아니라, 첨탑 자체에 내장된 술식적인 기능 때문이기도 했다.

댈런이 이곳에 자리한 것 역시, 차리나가 그의 출입을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

“차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막 첨탑 계단을 올라온 차리나가 쟁반을 든 모습이 보였다.

“다도에 관심은 없지만, 커피에는 또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고 하던데. 싸움 직전에 마시는 음료는 각별한 법이죠. 그래서 준비해봤어요.”

“왕실 특무대가 일을 잘 하긴 하나 보군. 그런데 그거 마실 수 있는 건 맞소?”

“의외로 농담에도 능하군요. 그런 인상은 아니었는데.”

“···농담 아니었소만.”

차리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쟁반은, 사실상 얼음 조각품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까지 펄펄 끓었을 커피와 찻물마저도 표면에 살얼음이 동동 떠다닐 정도.

“어서 마셔요. 찬 기운은 찬 기운으로 이겨내는 법이죠.”

“비슷한 말이 고향에도 있긴 한데, 그렇다고 내가 얼죽아는 아니라서.”

“신기한 어감이네요. 고향이 북부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건 어디 말인가요?”

차리나의 눈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휘어졌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찻잔을 기울였다.

얼어붙은 찻물이 사르르 부스러지며 물 흐르듯 입술 안으로 넘어갔다. 댈런은 그 진기한 광경을 가만히 보다가,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는 잘 처리했나요?”

“덕분에.”

“다행이네요. 어쨌거나 내 도시의 지하에 도사린 그림자를 몰아냈으니, 의뢰비에 추가금을 얹어주도록 하겠어요.”

더 많은 황금이라. 나쁘지 않지.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황금은 쓸 데가 많았다. 도통 쓸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곧 싸움이 벌어지는 마당에 왜 따로 불러냈는지 궁금하겠죠. 별 거 아니에요. 잠시 사담을 나누고 싶었을 뿐.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니까요.”

후. 작은 한숨. 차리나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새하얀 예복의 소매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수백 년 전, 역천의 우물은 선각자를 통해 예언했어요. 머지않아 이 세계는 닫힌 결말로 다가갈 운명. 하지만 수많은 시간선들의 가능성을 모아, 그 결말을 타파할 존재를 선택할 것이라고.”

“······.”

“혹자는 그 존재가 반복되는 시간선에 예속된 회귀자일 거라 말하고, 반대로 선견의 권능으로 시간선을 미리 내다보는 선각자의 한 부류일 거라고 이야기해요.”

소매를 걷은 차리나가 댈런의 곁으로 다가왔다. 곁에 선 것만으로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살을 잘라내야 할 수준의 동상을 입혔을 냉기.

허나 그런 냉기도 댈런의 피부 밑에서 꿈틀거리는 용혈을 식혀내지 못했다.

“몇 달 전부터 당신의 행보를 지켜봤습니다. 용살자의 소문이 들렸을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누군가는 그저 난세에 나타나는 영웅 중 하나라고 여기겠지만, 그저 영웅이라기에는 당신이 품은 그릇이 너무나도 넓죠.”

“그래서 내가 그 예언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거요?”

“맞아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죠.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불러냈어요.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확신이라.”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북쪽 성벽 너머, 저 멀리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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