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80화 (18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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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라힘 방어전(2)

“스스로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차리나가 말했다.

“글쎄.”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역천의 우물이고 나발이고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저 현질 좀 했다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뿐.

스스로가 어떤 주인공이라 생각하던 시절도 있긴 했다. 꿈 많던 10대와 자신감이 가득하던 20대의 그는 그랬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세상에 떨어져 좀 비범한 육신을 입은 뒤에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아주 조금의 변화가 있다면, 그건 삶의 태도였다.

태어났기에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내려고 하는 삶의 태도.

“애당초 누구 하나만 주인공이겠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일 거요. 예언이고 뭐고 그런 것 없어도. 다만 그 연극이 비극이냐 희극이냐는 본인들의 선택이겠지.”

“모두가 주인공이라···기이한 해석이군요.”

“도움이 안 될 거라 하지 않았소.”

“아뇨,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펄럭.

뒤돌아 첨탑 중앙을 향하는 차리나. 예복의 폭 넓은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첨탑의 한가운데, 서릿발 왕좌와 유사한 모양의 의자에 도달한 그녀는 팔걸이 부분에 꽂혀있던 왕홀을 뽑아들었다.

구우우웅···.

진동하는 대기. 퍼져나가는 무형의 압력.

첨탑 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는 동시에, 댈런의 입에서 뿜어지는 김이 짙어졌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회색 먹구름이 드넓은 도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차리나는 왕좌 위에 앉아 양손으로 왕홀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깨부터 뺴곡하게 자리한 룬 문자들이 제각기 번쩍이며 춤을 추고, 첨탑의 기운과 공명하면서 수백 가지 술식을 준비해나간다.

“이 싸움에 걸린 건 제 목숨만이 아니어서 그랬습니다. 이 땅, 이 나라 백성들의 목숨까지 함께 판돈으로 걸려 있죠.”

“······.”

“수백 살 먹은 타국의 노괴들과는 달리, 저는 여전히 이 자리가 버겁습니다. 제게 주어진 무력은 온전히 저의 것이지만, 어찌 남의 배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목숨까지 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힘겹게 끌어올리는 입꼬리.

이 순간에도 강맹하게 몰아치며 힘을 불려가는 권능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허나 조금 전 당신의 말을 듣고 확신이 섰습니다. 나의 인간적인 유약함과는 별개로, 당신이라면 백성들의 운명을 맡겨도 될 사람···.”

“푸흐, 걱정이 정말 많으셨나 보군.”

낮은 웃음. 나름 심각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차리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댈런은 그 찡그림을 보며 반란군의 원로들을 떠올렸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고, 필요하다면 백성의 영혼이라도 가차 없이 희생시키던 놈들.

그들의 눈에 차리나는 유약한 군주일지도 모른다.

왕홀을 허공에 띄워올리며 수인을 맺어가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댈런은 첨탑의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난 그쪽에게 고용된 일개 용병일 뿐이오. 백성의 운명이니 그들의 목숨이니 하는 건, 이 나라의 왕인 그쪽이 짊어져야 할 일이지.”

“······.”

첨탑의 높이는 까마득했다. 댈런은 저 아래 도시의 전경을 찬찬히 뜯어봤다.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는 철혈군대 병사들. 다급하게 물자들을 실어나르는 수레. 주요 골목마다 방벽과 함정들로 구축되는 방어선.

노인과 어린아이는 도심부의 주요 건물들로 대피하고 있었다. 젊은 여인들은 성벽으로 향하는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응원의 환호와 이별의 절규가 함께 메아리치는 시가지. 울음은 함성과 섞여 떠들썩했다.

“······.”

그건 그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어딘가를 아릿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백성의 통치자이자 주인으로서, 이 모든 광경의 무게를 짊어진 부담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겠지.

많지 않은 나이에 책임을 외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온갖 비틀린 심상으로 초월자의 자리에 오른 이가 수두룩한 이 세계이기에 더더욱.

스륵.

댈런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도끼날을 만지는 손끝에 자잘한 실금이 느껴졌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난간 위.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은 그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시오. 난 적어도 받은 돈을 떼먹는 용병은 아니니까.”

그리고 약속받은 보수면 악마 십수 놈 잡아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흘러가듯 덧붙인 그의 신형이 난간을 박찼다.

투웅―

순식간에 치솟는 시야.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밀어낸다.

댈런은 짧게 숨을 그러모으고 재차 허공을 박찼다. 저항 끝에 부서지는 바람의 벽.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늘어졌다.

휘이이이···!!

얼굴을 두드리는 한기를 끓어오르는 용혈이 훅 하고 증발시키고.

이글거리는 마력광을 눈동자에 담은 채, 성벽 저 너머의 동토를 내려다본다.

쿠르르릉···.

북쪽 땅은 이질적인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나 눈 대신 불덩이와 재를 흩뿌리는 새까만 먹구름. 악마와 마물들의 군세를 수호하는 악신 쑴의 권능.

[호오. 쑴이 실로 작정했나보구나. 며칠 전에 비해 그 세력이 더욱 강력해졌어.]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는 적창이 중얼거렸다. 먹구름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군세가 진군해오고 있었다.

기괴하게 몸이 뒤틀린 수만 마리의 마물과, 그 배 이상은 족히 되는 오염되고 타락한 야만인들.

야만인의 숫자는 어림잡아 십만을 훌쩍 넘어섰다. 저 정도 숫자면 서리고원 북부의 야만족은 9할 이상이 끌려온 거나 다름없었다.

일부는 스스로의 의지로 제 삶을 바쳤겠지만, 대다수가 사로잡힌 채 산 제물로 몸과 영혼이 공양됐겠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눈물 흘려줄 때는 아니었다. 지금의 저들은 전신에 뿔과 가시가 돋아난 타락한 병사들일 뿐이니까.

투웅―

고도를 좀 더 높이자 군세의 후위에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오는 악마들이 보였다.

오십이 넘어서는 악마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 한 자리에 저만큼 많은 악마가 모인 건 처음 목격하는 광경이었다.

대공급의 악마가 둘이고, 나머지는 중급이나 하급.

놈들을 육안으로 확인한 순간 수많은 알림창이 우르르 쏟아졌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

열 구가 넘는 시체.

악마에게 죽어 한 입 거리 식사가 된 결말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니터 너머의 장면들을 흘려보내며,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들었다.

금강궁에서 받은 도끼는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여기저기 실금이 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유물 무기라 하더라도 내구도가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까.

“······!!”

그때 군세의 선두에서 야만인과 마물들을 이끌던 하급 악마가 그를 발견했다.

수박만 한 눈동자가 몸통 한가운데서 끔뻑거리는 사 미터짜리 거인 형상의 악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동자가 부릅떠지고, 뭔가 샛노란 마력이 그 앞에서 맺혀갔다. 놈이 뭐라 소리 질렀다. 주문인 모양이었다.

“뭘 야려, 새꺄.”

그리고 댈런은 사납게 웃었다.

쉬이―

허공을 가르고 자취를 감춘 도끼.

잿빛 음영이 번뜩이며 손쉽게 공간의 틈을 열어젖힌다.

사라진 도끼가 나타난 건 수박 눈깔의 면전이었다.

문자 그대로 눈앞에서 나타난 도끼. 대처할 틈도 없이 눈알에 틀어박힌 도끼가 황금빛으로 폭발했다.

캬아아아아···!!!

한참을 떨어진 이곳까지도 비명이 전해져온다. 놈의 눈앞에서 맺히던 샛노란 기운이 굴절된 광선처럼 비산하며, 자기 편의 마물들 수십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댈런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회백색 음영이 어른거리는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회명(回冥) : 발화(發火)」

화르르르···!

도끼에 맞은 악마의 몸뚱이가 새빨간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비검의 힘을 파고든 끝에 얻게 된 결실 중 하나였다.

회명과 발화. 두 가지 고유 스킬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품은 잠재력을 응용해 접목시킨 것.

아직 신비의 힘을 직접 뒤틀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6위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를 간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그 경지를 향해 한 걸음 정도는 더 나아갔다는 증거겠지.

신성력이 일렁이는 화염의 향연 속, 악마의 비명이 꿈틀거림으로 잦아든다.

최선두의 기수인 악마가 쓰러지자 진군을 멈춘 군세. 후위에서 이상을 느낀 대악마가 이쪽을 응시했다.

“······.”

거대한 갑주가 말없이 노려본다. 댈런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짧은 순간 시선이 교환된 뒤, 갑주가 손을 들어올렸다. 놈이 소리쳤다.

───!!!

먹구름에서 붉은 뇌광이 번쩍이고, 멈췄던 군세가 도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갑주의 머리 위에 떠오른 문자를 한 번 더 눈에 담고서, 저 아래 성벽을 향해 몸을 떨어뜨렸다.

성벽 위의 수성 병기들이 막 장전을 마쳐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

어느 공성전이나 시작은 똑같다.

긴장된 공기를 날카롭게 관통하는 외침.

“발사!!”

꽈과과광―!

지휘관의 명령에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천둥을 뿜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날아가는 포환들.

비요른의 개량을 거쳐 난쟁이의 룬 마법이 접목된 포환들은, 수 킬로미터 거리를 활공해 적진의 선두에 직격했다.

두두두두···!

룬 새겨진 돌덩이가 땅을 튀며 굴러간다. 타락한 야만인들이 고깃덩이가 되어 으깨져나갔다.

전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끈덕한 핏덩이의 선분들. 흩뿌려진 뜨거운 피가 채 식기도 전에 두 번째 성벽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2열 발사―!”

꽈과과광!!

첫 번째 성벽의 대포들이 재장전에 들어간 사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성벽에서 포환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나면 다시 첫 번째 성벽이 우렛소리를 토했다. 최전방에 배치된 철혈군대의 사수들은 짧은 시간에도 장전을 끝낼 만큼 숙련되어 있었다.

쿵! 쿠궁! 쿠르르···!

한참을 떨어진 성벽 위쪽으로도 진동이 전해진다.

활시위를 걸고 대기하던 중년의 사내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악마의 하수인이니 뭐니 해도 별 것 아니군. 눈 먼 돌덩이에 갈려나가는 신세라니!”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게. 부정 탄다고!”

“악마와 싸우는데 더 탈 부정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저기 성기사님을 보게! 그런 미신 따위는 접어두란 말이야!”

사내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루시아는 말없이 잠깐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답례에 한껏 고양된 얼굴로 떠들기 시작하는 사내. 흉터가 많은 게 두 사람 모두 숙련된 용병인 모양이었다.

“······.”

적들의 전열 곳곳에 일어난 피안개를 보며, 루시아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근 일주일 중 가장 칼바람이 거친 날이었다. 그럼에도 성벽 위는 기이하게 후끈거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치고받지도 않았는데, 전장의 열기가 벌써부터 성벽을 뭉근하게 덥히고 있는 것.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저희는 언제 출격합니까?”

변성기가 온 목소리. 파른이었다.

미등록 용병으로 상단 호위를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성기사단의 갑주를 걸친 수습기사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사단장에게 직접 가르침을 하사받은 수습기사.

루시아는 소년의 외눈을 잠시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긴장되니?”

“···아닙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저 악마들의 목을 썰어버리고 싶을 뿐···.”

“나는 긴장된단다.”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루시아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를 툭툭 만져주었다.

어린아이들은 키가 빨리 컸다. 가슴께에도 못 오던 소년은 그녀와 눈높이가 엇비슷해져 있었다.

하지만 키만큼이나 정신도 빨리 자라는 건 아니다. 두려움을 인정할 줄 모른다는 점은 소년이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였다.

‘나도 두렵소.’

머릿속에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굵고 낮은 목소리.

죽고 잊혀지는 게 두렵다던,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까 걱정한다는 남자.

그럼에도 그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다고 말했다.

“···이상한 사람.”

두려움이라고는 한 점도 없을 것 같던 그가, 무덤덤하게 흘려낸 말은 그녀의 심중에 선명한 파장으로 남아있었다.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다고 했던가.

루시아는 다짐했다. 자신도 두 번이나 잃지는 않을 거라고.

“무서워해도 괜찮다, 파른. 성기사는 두려움을 모르는 광인이 아니야.”

“······.”

“모두가 두려워하며 물러서는 상황에서, 스스로도 두렵지만 신께 의지해 전장으로 달려가는 게 성기사란다. 명심해라.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어.”

작게 끄덕인 파른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게 느껴졌다.

루시아도 다시금 전장을 바라봤다. 적들은 끊임없는 화포 세례에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하는 중이었다.

벌써 수백이 넘게 죽었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타락한 야만인들의 숫자는 그만큼이나 많았다.

거적때기에 가까운 가죽과 철판으로 몸을 두르고, 피부를 뚫고 자라난 껍질과 가시로 그 빈틈을 메운 근육질의 거한들.

댈런도 성벽 어딘가에서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겠지.

그의 감각이라면 저 야만인들의 무리를 넘어, 수많은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을 악마들을 이미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파른. 내 뒤로.”

스쳐지나가는 육감의 경고.

퍼뜩 고개를 든 루시아의 눈에서 광채가 점멸했다.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신성력. 갑옷 틈 사이로 거세게 빛을 내뿜는 신성문신들.

“기사단! 방어 태세!”

성벽 위를 쩌렁쩌렁 울린 그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 하늘을 덮은 새까만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붉게 이글거리던 먹구름의 일부가 앞으로 울컥 튀어나왔다.

전조는 그게 끝이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수백 갈래의 붉은 뇌전이 성벽 곳곳을 폭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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