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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라힘 방어전(4)
쿵.
갑피로 둘러싸인 몸뚱이가 넘어간다. 3미터에 가까운 덩치의 타락한 전사가 남긴 경험치는 꽤 훌륭했다.
“무, 무슨 일격에 대전사를···.”
“멀리서 봤는데 뭔가 너무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더군. 생긴 건 안 그래도 주문쟁이인가 싶었지. 주문쟁이는 머리부터 날려야 하는 법이오.”
“······.”
“아, 혹시 방심하게 유도해서 심문할 생각이었소?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그걸 말한 게 아니었던 크레이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한편 입은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이게 낭만이지. 크레이그는 생각했다. 댈런은 쿡쿡 웃는 그의 얼굴에서 묘한 광기를 느꼈다.
“······.”
내장이 뜯긴 채로 포션까지 부었으니 아마 정신이 온전하기는 힘들 것이다. 댈런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반개했다.
「몽환추적(夢桓追跡)」
「회백전도(灰白全圖)」
심상 속, 드넓은 전장이 흑백의 미니맵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성벽은 완전히 적군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곳곳이 무너져 사실상 기능을 잃은 성벽. 차르국의 깃발이 내려가고 대신 올라가는 악신 쑴의 깃발.
야만족들은 시체 더미 위에서 환호하고 있었다. 놈들의 선두는 이미 첫 번째 성벽과 두 번째 성벽 사이의 고밀도 시가지에까지 진격하는 중이었다.
‘딱 적절한 타이밍이군.’
성벽 위에 더이상 생존자가 없는 걸 확인한 댈런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쥐었다. 그가 말했다.
“비요른.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인 듯한데. 준비는 되었소?”
[글라···아니, 크레모아 작전 말인가? 거참 발음하기도 어렵네. 어느 나라 말이야?]
“내 고향 말이오. 항전하던 아군 병력은 모두 후방으로 물렸소. 근방 일대의 성벽은 모두 적들의 손에 떨어졌으니 바로 준비해주시오.”
[준비야 끝났지. 진작에 끝났는데···거참.]
통신구 너머, 외눈의 명공이 꿍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어지간히 화약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그보다도 더하구만. 성벽을 탄환으로 써 함정을 팔 생각을 하다니. 그 정도로 미쳐야 5위계의 벽을 뚫을 수 있는 겐가?]
“헛소리 마시고 불이나 붙이시오.”
[크흐흐···알았네.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이라,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지.]
수정구의 통신이 끊겼다. 곁에서 그 내용을 듣고 있던 크레이그는 자기 귀가 이상해졌나 의심했다.
무슨 성벽을 탄환으로 쓴다고?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없나 싶은 차에 통신구를 품에 넣은 댈런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힘든 건 알겠지만 일어나시오. 죽기 싫으면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하니까.”
“그게, 무슨···.”
“이번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소. 경험치를 얻으려면 전사나 주문쟁이 둘 모두 답이 아니었다는 걸.”
진중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댈런. 그의 억센 손아귀가 크레이그의 허리춤을 잡고 가볍게 어깨 위에다 얹었다.
“제작 직업군을 선택해야 했어. 화약 관련 스킬에 모든 자원을 몰빵해서. 현질로 드워프의 룬 마법 DLC도 살 수 있으면 더 좋고.”
“······?”
“조금 어지러울 거요. 피를 많이 흘렸으니 잠시 기절할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댈런의 몸이 확 치솟았다.
꽈아아앙!
순식간에 상승하는 시야. 밀어찬 지면에서 돌 박살나는 굉음이 뒤따르고.
꽈아앙―!
재차 허공을 딛기도 전에, 저 아래 어디선가 비슷한 소리가 들려온다.
“도폭선 소리 한 번 우렁차군.”
댈런이 말했다. 크레이그는 어지러운 시야를 부여잡고 성벽을 내려다봤다.
오 미터 높이의 최외곽 성벽. 그 안쪽 벽에 큼직하게 룬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저건···.”
크레이그는 난쟁이족이 아니라지만 룬어를 조금은 할 줄 알았다. 수 미터 간격으로 성벽을 따라 빼곡하게 새겨진 룬 문자의 주된 내용은 힘의 폭발.
온갖 수식어가 붙어 더 큰 폭발. 아주 큰 폭발 따위를 의미하는 문자들.
“오, 룬어도 할 줄 아시오?”
“예, 조금은······.”
“화약 기술의 부족한 점은 대부분 룬 마법으로 때울 수 있더군. 방향성을 조절하는 부분에서 좀 애를 먹는 것 같긴 했지만, 명공이 괜히 명공이 아니지.”
댈런이 씩 웃었다. 현대 지구의 잡지식을 이곳에서 써먹게 될 줄이야.
“기본적인 원리만 알려줘도 척척 구현해내더군. 말세에 손재주 하나만으로 영웅이라 불릴 정도면, 이 정도 천재성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겠지.”
아무리 자유도가 높다 해도, 여러 요소들이 제약된 게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응용.
허공을 짓밟고 순식간에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서자, 그 장대한 풍경이 댈런의 시야에도 한눈에 들어왔다.
쿵···.
하수도에 걸쳐 땅 깊이 묻어둔 도폭선. 그 연속된 폭발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쩌저적···!
룬이 새겨진 성벽이 불길하게 갈라지며, 통째로 뒤틀려 도시 바깥쪽을 향해 부풀어오른다.
이변을 느낀 야만인들 사이에서 당혹스런 함성이 터져 나오지만, 이미 늦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결과를 물리는 건 외눈의 명공이라 해도 불가능했으니.
쿠르르릉···!
화약의 폭발이라기보다 뇌성에 가까운 소리가, 부풀어오른 성벽의 한 구역에서 가장 먼저 울려퍼지고.
쿠지직──!
성벽을 따라 커다랗게 새겨진 룬 문자가 미친 듯이 점멸하며, 마지막 수 초의 카운트다운을 알린다.
그리고 폭발은 한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오 미터 높이의 외성벽이 한순간에 바스라진다.
십수 년간 쌓아 올린 수천 톤의 돌덩이가, 거대한 석재의 폭풍이 되어 도시의 바깥으로 몰아쳤다.
악신의 힘을 한가득 받아들여 인간의 몸을 반쯤 벗어던진 야만인들이라도, 그 무자비한 힘의 파도 앞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찢겨나간 채, 폭풍과 하나가 되어 휩쓸려가는 것뿐.
콰과과과과과!!
동시에 바깥으로 수천 톤의 파도를 쏟아낸 후폭풍이, 거대한 화염의 물결로 안쪽 방향을 휩쓸었다.
최외곽 성벽과 중간 성벽 사이 백여 미터에 달하는 시가지.
그곳으로 진격해 들어오던 야만인들은 느닷없이 화염의 폭풍에 휘말려 뼛조각까지 바스라져버렸다.
[투람.]
[발케르.]
[스타티아.]
시가지를 휩쓴 것도 모자라 두 번째 성벽에까지 밀려오는 화염의 파도. 그걸 막는 건 왕실 마법사단의 합동 주문이었다.
휘이이이···!!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극한의 서리바람이 거대한 화염의 파도와 만나는 순간, 냉기와 열기가 만나 이차 폭발을 빚어내고.
콰과과과···!
“끄아아아아!”
“흐으, 흐으으으!”
열기에 반쯤 녹아버리고서도 살아남은 타락한 야만인 생존자들이, 재차 덮쳐오는 폭발의 향연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쿠르르르르···.
팔 미터 높이의 중간 성벽. 그 앞에 남아있는 건 녹아내린 폐허뿐이었다.
외곽 성벽은 그 자체로 파편 폭탄이 되어 날아가버리고, 안쪽의 시가지는 불바다가 된 채 죽음의 연기를 피워올린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차르국이 전쟁에서 패망하는 듯한 모습.
허나 성벽 하나를 대가로 십만을 넘는 타락한 야만인들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으니, 사실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어차피 술식적인 방어책이 없는 외곽 성벽은, 마물 군세와의 본격적인 전투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으니까.’
창공 위에 서서 불타는 대지를 내려다보던 댈런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후방 성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쑴의 먹구름과 차리나의 영역이 치고받는 중이었고, 가까스로 생존한 야만인들이 도망치는 북쪽에는 악마 군세의 본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쑴 휘하의 직속 대공 둘과, 그 휘하의 수십 악마가 이끄는 마물의 군대.
첫 공세인 타락한 야만족을 쓸어버렸으니, 머지않아 놈들이 직접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전쟁의 마지막 대전투가 될 터였다.
***
어깨 위에 얹혀진 크레이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집행관 양반, 일어나시오.”
“······.”
아니, 잠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댈런은 근처 의무대에 크레이그를 맡겨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삼중성벽의 가장 안쪽이었다.
최후방인 만큼 가장 거대한 규모이기에, 사실상 그 자체로 일종의 요새나 다름없는 후방 성벽.
그 두터운 석벽 안쪽에는 보급고나 의무대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펠버가 이끄는 용병 마법사단이 위치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사백 명의 용병 마법사들이 각자 조를 짜서 대기하는 거대한 전당.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명상 중인 마법사들을 지나쳐, 댈런은 창가에 서서 외성벽을 주시하고 있는 펠버에게 다가갔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요, 노인장?”
“그렇지. 자네와 비요른의 주장을 신뢰하지 못한 건 아니네만···나이가 들면 모든 일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펠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바라보던 창밖으로는 중간 성벽 너머, 용암이 휩쓸고 지나간 듯 녹아내린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만한 대군을 마법 전력 없이 상대하겠다니, 어쩌면 급하게라도 지원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지. 허나 내 생각이 이번에도 짧았군.”
“그쪽 입장에서는 당연히 했어야 할 준비였소. 어찌 됐건···그래서 지켜보니 어떠시오?”
“인상적이군.”
펠버가 말했다.
“화약이라는 신문물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앞으로 전쟁의 판도가 달라지겠어.”
“그래도 아직 마법사단이나 초월자를 직접 투입하는 것보다 효율적이진 못하오. 비요른 그 양반쯤 되니까 차르국의 무지막지한 지원을 업고 저만큼 해낼 수 있었던 거요.”
“그건 그렇지. 거기다 성벽 하나를 통째로 날려먹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펠버가 끄덕였다. 그는 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래도 자네 생각대로 흘러갔네. 덕분에 마법 전력은 온전하게 보존되었지.”
고개를 돌려 전당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단을 훑는 갈색 눈.
지난 일주일간 펠버는 눈 뜨고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이들을 훈련시키고 합을 맞추는 데 사용했다.
용병 마법사단은 대륙 각지의 마탑에서, 혹은 아예 소속도 없이 찾아온 마법사들이었다.
허나 이들의 실력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동급의 전사보다 허약한 육체를 이끌고, 모든 전쟁의 혼란을 뚫어가며 이 머나먼 북부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실력을 증거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원래라면 끝이 보이지 않는 타락한 야만족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투입되었어야 할 병력.
그 병력을 최후방에서 끝까지 아껴뒀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싸움의 핵심은 타락한 야만족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오. 악마들을 중심으로 놈들의 본대를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관건이지.”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계속 쏘아낼 수 있는 화약 병기와는 달리, 마법사들은 정신력이 한계에 달하면 곧장 전투력을 잃는 소모성 전력이다.
그러나 단순히 위력에만 치중된 화약 병기와는 달리, 끝없는 다양성으로 응용될 수 있는 특기전력이기도 했다.
댈런은 그 전력을 아끼기 위해 외곽 성벽에는 최소한의 전력만 배치하고, 적들의 살을 적당히 깎아먹은 시점에 퇴각시켜 성벽 자체를 함정으로 만들었다.
암월단의 마수를 완전히 뿌리치고 남은 며칠.
차리나의 승인 아래 댈런과 비요른이 몰두했던 건, 바로 그 함정인 크레모아 작전을 실현에 옮기는 작업.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하며 아껴왔던 전력을 사용할 시점이 다가왔다.
바로 다가오는 적들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흙먼지가 가라앉는군.”
펠버가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광범위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석재의 파도.
그 여파로 수백 미터 일대에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이제서야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그리고 푸른 마력의 정광으로 번뜩이는 두 쌍의 눈동자는 그 너머를 어렵잖게 꿰뚫어 봤다. 펠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몰려오는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지만, 물러날 기미는 보이지 않네.”
“그럼 이만 가봐야겠소.”
“정말 그 작전대로 할 생각인가?”
“악마와 치고받다가 성벽이며 도시가 죄다 박살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등 뒤를 부탁하겠소. 가볍게 덧붙인 댈런이, 빠르게 무기와 갑옷을 점검한 뒤 창턱에 발을 올렸다.
망설임 없이 훌쩍 뛰어내리는 발걸음. 전사의 신형은 십수 미터 높이의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라 멀어지기 시작한다.
대마법사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벽에 기대놓은 지팡이를 잡아들었다.
황금빛 마력으로 작게 공명하는 지팡이의 수정구. 그 울림에 명상에 잠겨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중간 성벽을 넘어 박살난 첫 번째 성벽을 향해 나아가는 댈런의 뒷모습을 보며, 펠버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네가 믿고 날뛸 수 있는 전장을 만들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