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84화 (18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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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혈해(2)

쿠구구구······.

수백 년 묵은 첨탑들이 비명을 지른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벽과 기둥이 해변가에 쌓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지상을 향해 우르르 쏟아지는 파편들.

비상시를 대비한 긴급 술식이 작동하며, 유성우처럼 떨어지던 잔해들을 받아냈다.

긴급 술식은 요새 자체를 다시 하늘로 밀어올렸으나, 달리 말하자면 하늘로 밀어올린 게 전부였다.

이미 시작된 붕괴 자체를 막기에는 역부족.

천공요새는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면서도 실시간으로 무너져갔다.

“맙소사, 신이시여······.”

이름 모를 성기사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댈런은 그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피 섞인 침을 모아 뱉었다. 자신의 피는 아니고, 방금 죽인 악마의 피였다.

화륵. 손가락을 튕기자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성화의 불꽃.

댈런은 반으로 잘린 악마의 몸뚱이를 그대로 불살라버리며 말했다.

“대악마가 어디 숨었나 했더니 저기를 노리고 있었군. 금방 다녀오겠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 된다는 거 알지 않소.”

루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댈런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악마놈들 다섯 밖에 쳐죽이지 못했소. 성기사단이 죽인 숫자와 성벽을 넘으려다 죽은 놈들까지 합쳐도 고작 열 남짓이지.”

“······.”

“성벽 위의 철혈군대가 지금까지는 잘 막아주고 있지만,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성벽 위로 올라가게 된다면 그 균형도 끝이오.”

성벽 위에도 악마를 상대할 실력자야 여럿 있었다.

전력으로 영역을 개방하고 있는 펠버를 제외하더라도,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단장이나 철혈군대의 냉혈기사단장처럼 5위계에 닿은 초월자들도 존재했고.

다만 전투와 전쟁은 엄연히 다른 영역.

이런 대규모 공성전에서는 더욱 그랬다.

초인들이 힘을 모아 순식간에 악마 셋의 목을 잘라버리더라도, 그 사이에 다른 악마들이 반대쪽 성벽을 공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방어 주술이 깃든 성벽이라 해도 악마의 공격 앞에서 오래 버틸 순 없을 것이고, 한쪽 성벽이 붕괴하는 순간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게 당연한 일.

영역을 이룬 초인들이야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겠으나, 성벽 뒤에서 화살과 투창을 퍼붓던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러지 못할 테였다.

악마들도 그걸 알기에 마물들 사이에서 최대한 몸을 숨긴 채, 성벽의 빈 틈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적진을 헤집으며 그런 악마들을 추적하는 성기사단이 아니었다면, 성벽은 진작에 무너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성기사단에는 그쪽이 필요하오, 루시아. 악마에게 칼질을 할 수 있는 성기사는 많아도, 숨어있는 악마를 추적해서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성기사는 하나뿐이니까.”

수만 마리의 마물들 사이에서, 작정하고 몸을 감춘 악마들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회백전도의 힘이 아니었으면 댈런이라도 지금처럼 악마들을 찾아내서 때려잡지 못했을 테였다.

더군다나 대마탑 바르샤바크에 침투한 대악마의 경우, 천공요새가 붕괴하기 전까지는 댈런의 능력으로도 기척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였고.

성기사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루시아의 영역에 내제된 이능 중 하나는, 악마를 탐지하고 추적하는 능력.

그 능력이 없었다면 기사단은 눈 먼 장님이 휘두르는 칼과 다름없었겠지.

루시아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몸 성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아. 댈런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투웅―

가볍게 땅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시야가 훅 치솟는다.

몇 번 더 발을 구르자 무너져가는 천공요새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걸리적거릴 요소가 없는 창공. 거침없이 허공을 짓밟아가며 가속을 거듭한다.

콰과과광!

발밑에서 공기가 한계까지 응축되었다 터지며 굉음을 빚어낸다.

드넓은 전장을 가로질러 천공요새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콰지직!

성검을 내리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천공요새의 결계를 찢어버린 뒤, 첨탑 중 하나에 내려앉은 댈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길 잃은 마력이 사방에 휘몰아치는구나.]

전투가 시작된 이후,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적창이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천공요새라 하여 고대 용인들의 비원에 닿았나 싶었는데, 그 신비와는 정 반대의 방법을 썼을 줄이야. 그저 끝없는 술식의 순환으로 막대한 마력을 응집시켜, 그 힘만으로 거대한 요새를 떠받들고 있던 거라니.]

“···주문쟁이 같이 말하지 마시오.”

[특별한 술법이 아니라, 그냥 마력의 총량으로 이 요새를 띄워올렸다는 이야기니라. 그리고 그 마력이 슬슬 폭주하기 시작하고 있고.]

파지지지지직!

적창의 말에 동조하듯, 사방에서 전격의 소용돌이가 제멋대로 휘몰아친다.

그물처럼 뻗어나가다가도 한 데 모여 구체나 입방체를 형성하고, 각종 짐승의 형상을 빚어내는 찰나 폭발하며 첨탑 하나를 날려버리는 전격의 줄기들.

제어되지 않은 수천 갈래 번개의 향연 사이에서는, 수많은 돌덩이들이 저만의 속도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서로 공명과 상쇄를 거듭하면서도 계속해서 커져가는 힘의 총량.

그건 마치 보이지 않는 화로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서, 그 안에서 연료와 불길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대악마가 다짜고짜 마탑의 수장을 죽인 게 이것 때문이었나.’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회차를 겪어온 댈런마저도, 천공요새 바르샤바크에 발을 들인 적은 많지 않다.

허나 이 세계에서 쌓아올린 주문의 지식과 감각에 적창의 첨언이 더해진다면,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도는 깨닫기 어렵지 않았다.

적창의 말대로라면 마탑 바르샤바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원리는, 그저 막대한 마력을 때려넣은 술식에서 기인한 것.

하늘에 요새를 띄울 정도의 마력량이니, 그 술식을 제어하는 인원은 반드시 고위 마법사여야만 했다.

‘못해도 5위계 이상의 초월자가 중심을 잡고···최소 수십 명의 영역을 이룬 마법사들이 보조해줘야겠군.’

여섯 대마탑 중 천공요새 바르샤바크만큼 폐쇄적인 곳도 없다던가.

하늘에 부유한다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선조들이 남긴 술식을 연구하고 재능있는 후학을 양성해야 할 인력들 대부분이, 마탑을 하늘에 띄우는 단순한 업무에만 몰두하고 있었을 줄이야.

현재의 위상과 명성을 대가로 미래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그러고보면 대마탑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짧았지. 천공요새의 존재 하나만으로 대마탑의 자리를 얻어낸 거니까.’

상념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감각을 곤두세우고 여기저기 무너져가는 첨탑들 사이를 훑는다.

분명 천공요새가 기울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대악마의 기척이, 어느 순간부터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요새를 아예 떠난 건 아니다. 댈런의 육감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사방으로 튀는 전격 줄기와 날아다니는 돌덩이들 사이, 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대적자가 숨을 죽이고 있다고.

“······.”

문득 시선이 저 멀리 떨어진 첨탑 중 하나에 닿는다.

지붕에 보란 듯이 꽂혀있는 황금빛 도끼.

그건 수 킬로미터 밖에서 대악마를 향해 던져냈던 견제였다.

[핏방울 하나 묻어있지 않구나.]

적창이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유의미한 결과를 위해 던진 게 아니다. 그저 대악마의 시선을 그에게도 돌리기 위함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가 아는 그 대악마라면, 아마 손도끼는 물론 어떤 종류의 무기라도···.

“도끼 던진 놈이군.”

불현듯 들려오는 스산한 속삭임.

바로 등 뒤였다.

────꽝!

머리 위에서 터져나오는 파공음을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성검을 들어 막아낸다.

쿠과과과과―!!

완벽하게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힘에서 밀린 육신이 첨탑 지붕을 뚫고 내려간다.

천장과 바닥을 몇 번이나 부수고 내려간 끝에 멈춘 하강. 댈런은 고개를 들어 뻥 뚫린 구멍 위쪽을 올려다봤다.

천공요새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정광을 배후에 둔 채, 음영이 뒤집힌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지직. 쩝쩝.

비늘 덮인 파충류의 머리.

세로로 죽 찢어진 붉은 눈동자.

온몸이 시뻘건 피로 뒤덮이고, 군데군데 검게 탄 흔적이 남은 용인은 뭔가를 들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용인에게 씹어먹힌 궁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한입거리 용병이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시산혈해에 파묻힌 성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붉은 주문의 계승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네 개나 되는 알림창이 주르르 나열된다.

네 번의 결말을 뜻하는 글자들 아래, 용인은 입을 쩍 벌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둥근 뭔가를 입안에 던져넣고 씹었다.

콰직!

이빨 사이로 쫙 튀는 핏물과 뇌수.

흘러내리는 붉고 흰 조각들에서 그 둥근 것의 정체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천공요새의 붕괴를 어떻게든 늦추기 위해, 망가진 술식의 구멍을 메꾸려 동분서주하던 고위 마법사 중 하나였으리라.

“···타알마드.”

“오. 나를 아는군. 인간들 사이에 내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이름에 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흑마법사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악마인 타알마드는, 오히려 악마들 사이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용혈의 배반자.

진룡을 사냥하는 용인.

악마들 사이에서 떠도는 수많은 이명이 있지만, 그중에도 놈을 가리키는 가장 대표적인 명칭은 한 가지였다.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공.”

수십의 악마들을 찢어발기고, 필멸자와 마물을 가리지 않고 셀 수 없는 시체들로 자신만의 지옥을 만들어낸 대악마.

쑴 휘하의 여섯 대공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존재에게 걸맞은 이명이었다.

쿠르륵.

무너진 돌더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댈런은 성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외견이지만, 손끝의 감각은 내부에 퍼진 미세한 균열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 단 한 번의 흠집조차 난 적 없는 성검이, 단 한 번의 공격에 처음으로 손상된 것.

“쯧.”

혀를 차며 성검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허리띠의 환상 살해자나 품속의 강철 단검도 아공간에 밀어넣는다.

차르국의 왕실 전용 대장간에서 새로 맞춘 갑옷까지 벗어버리자, 남은 건 적당한 두께의 솜이 들어간 천옷뿐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모든 무구를 집어던지는 기행.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타알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군. 이름만이 아니라 내 권능까지도 알고 있는 건가?”

“글쎄.”

“그렇지 않고서야 네 행동이 말이 안 되는군.”

댈런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살짝 풀고, 발끝을 가볍게 퉁퉁 튕겨볼 뿐이었다.

예상대로 몸의 무게가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갑옷이나 무구의 무게에 구애받지 않게 된 지 오래임에도, 어깨의 짐을 덜어낸 듯한 선명한 해방감.

갸웃거리던 용인의 고개가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바로잡혔다. 놈이 붉게 찢어진 눈을 빛냈다.

“아니, 너는 알고 있다. 내가 무기도 갑옷도 없이 싸운다는 것을. 주먹과 이빨이 내 무기이고, 비늘과 뼈가 내 갑옷이라는 사실을.”

성검이 상한 건 단순히 놈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이미 오래 전 청린과 싸웠을 때부터 성검은 손상되기 시작했을 테니까.

성검이 상한 진짜 이유는 놈의 권능 때문이었다.

자신과 싸우는 이의 무구를 약화시키고, 오히려 그 무구가 속박이 되게 만드는 권능.

그건 타알마드를 여섯 대공의 첫 자리에 올려놓은 가장 큰 요인이자, 놈에게 네 구에 달하는 캐릭터가 죽어나간 이유이기도 했다.

대악마의 권능을 무효화하는 건 악신마저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니터 너머에서도 놈의 존재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왔기에, 내 주군을 제외한 모든 대공들을 꺾을 수 있었다는 결말까지도.”

허나 댈런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지만, 아예 공략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 몇 안 되는 공략법 중 하나를 붙잡기 위해, 차리나의 의뢰를 받고서도 굳이 한참을 돌아 세계의 이빨 산맥을 타고 올랐던 게 아닌가.

하이 오크들의 내전에 참전하고, 악마에게 홀린 대족장은 물론 악마의 진체까지 쓰러뜨리는 수고를 감내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고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건, 나를 상대할 무기를 준비해왔다는 이야기겠지.”

“그래.”

“어디 보여봐라.”

용인이 이빨을 드러냈다. 즐겁다는 듯 그르렁대는 울음소리가 그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댈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대는 대악마. 간을 보거나 할 상황은 아니다.

스으.

주먹을 쥐고, 발걸음을 내디딘다.

머릿속에 그리는 전경은, 회백의 투사와 치고받았던 하늘과 대지.

쿵──

내디딘 첫걸음에서 동심원의 파동이 시작되고.

동시에 새긴 적 없는 백색 문신이 전신에서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반개한 눈 이면에서 영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설산에서 유일하게 그가 직접 만들어내지 않은 지형을 응시했다.

휘이이······.

산봉오리에서 시작된 바람이 쓸어가는 대지에는, 수십 년간 갈고닦은 투사의 묘리가 녹아나고.

쿠르르르···.

심상 너머의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이 유일하게 침노하지 못하는 하늘은, 최후까지 악신에게 일권을 날리던 영웅의 투지가 서린다.

‘너에게···맡겨 보겠다.’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린다.

모니터 너머에서 클릭 몇 번으로 움직이던 캐릭터이자.

한 세계의 마지막을 목도하며 저항했던 용사의 음성을.

쿠웅━━━━

아득한 시간선을 건너 남긴 유언이 심중에 파문을 남김과 동시에, 발밑에서 퍼져나가던 무색의 파동에 무채색의 음영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반개했던 눈을 뜬 순간.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반파된 천공요새는 완연한 잿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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