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85화 (185/288)

185

쌍천(1)

콰앙―!

첨탑의 벽이 무너지며 잿빛 신형이 창공으로 튀어오른다.

「회명(回冥)」

「오연답산(五聯踏散)」

그걸 시작으로 첨탑을 부수고 뛰쳐나온 사람은 모두 넷.

네 인영은 하나같이 댈런과 동일한 생김새였다. 천옷 하나만 걸친 근육질 용병들이 잿빛 첨탑들 사이를 내달렸다.

“호오.”

용인이 슬쩍 이빨을 드러냈다. 놈의 눈동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공간을 빗겨내는 재주를 극한까지 갈고닦은 건가? 기발한 발상이군.”

투웅―

허공을 박차고 치솟은 댈런의 신형. 여유만만한 표정의 용인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콰아아앙!

마주 내뻗은 용인의 주먹과 맞닿는 순간, 충격파가 터져나오며 두 사람이 딛고 선 지붕이 돌조각이 되어 바스라졌다.

“재밌는 재주로군! 허나 그렇게 만들어낸 잔상이 스스로의 실력보다 한참이나 하잘것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나!”

뒤섞이는 손발과 연달아 터지는 충격파 사이, 댈런의 모든 공세를 가볍게 막아내며 용인이 소리쳤다.

사실 놈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묘리와 영역은, 댈런의 입장에서도 전부 소화해내기 어려운 방대한 깨달음.

때문에 공간의 틈을 파고들어 만들어낸 잔상은, 회백의 투사와 달리 본체와 완벽하게 동일한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어정쩡한 감각. 조금 뒤떨어지는 근력. 마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없어 봉인된 주문.

혼신의 힘을 다해 공세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용인을 몰아붙이기는커녕 오히려 밀리는 상황인 건 그런 이유.

“이딴 잔상을 앞세우고 주문쟁이처럼 뭘 꾸미는 거냐! 좀 더 재미있는 걸 보여봐라! 쑴께서 주목하는 전사가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이군!”

용인이 포효하며 도발했지만, 댈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눈앞의 대악마는 진체가 아닌 화신체.

승부를 결정짓는 한 수를 만들어내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두두두두두!

격렬하게 오가는 주먹과 발끝에, 첨탑이 위에서부터 깎여나가듯 점점 낮아져간다.

그렇게 첨탑의 높이가 절반 이하로 낮아진 순간, 자취를 감췄던 나머지 세 인영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찌지지지직―!

공간을 찢어발기는 파공성. 먼지구름을 뚫고 사면의 사각을 노린다.

간결한 권격은 오른 어깨.

큰 호선을 그린 발끝은 옆구리를 향하고.

동시에 팔꿈치로 쇄골을 가격하는 동시에, 등 뒤에서 오금을 툭 쳐서 균형을 무너뜨린다.

“흠···!”

세로로 찢어진 용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채를 띄었다.

놈의 모습이 순간 흐릿해졌다.

그리고.

쩌저저저정!

막거나 피할 수 없도록 절묘하게 파고들어간 네 갈래 공격이, 놈의 손발에 전부 가로막혔다.

[이런 미친···!]

아공간의 악마가 경악했다. 맞았다. 미친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흘리거나 받아낸 수준이 아니라, 용인의 반격이 네 인영의 공격을 전부 받아쳐 도리어 밀어낸 상황.

이전에 회백의 투사가 비슷한 움직임으로 몰아붙였을 때, 댈런은 주문을 응용한 능력으로 여덟 갈래 공세에 대응했었다.

대악마 타알마드는 주문은커녕 마력 한 줌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그 정신 나간 기예를 선보인 것.

투과과과과과―!

네 명의 댈런과 한 명의 용인이 치고받았다.

깎여가던 첨탑은 순식간에 폭삭 주저앉고, 아예 지면에 구덩이가 움푹움푹 파이기 시작한다.

팔다리가 어긋나 부딪히고 공방이 교차하는 매 순간, 응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마력의 바람이 뒤틀린 채 휘몰아친다.

천공요새에 흘러넘치는 전격의 물결이, 그 여파에 휩쓸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콰지지지지―!!

맨손으로 주고받는 공방의 여파만으로 충격파와 전격이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박살난 첨탑 근방의 일대를 무너뜨리는 건 물론, 요새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크하하하!”

그 파괴의 중심에서 모든 공세를 받아내고 있는 용인은, 오히려 이제야 즐겁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야 주먹이 좀 매서워졌어!”

회백의 투사가 남긴 묘리에 점차 적응하면서, 댈런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고 빨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인의 기세에는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저 가늘게 휘어진 두 눈으로 전방위에서 밀려오는 모든 공세를 읽어내고.

비늘 덮인 투박한 손발을 놀려 일 초에 수십 번 가해지는 타격을 모조리 받아칠 뿐.

[이, 이게 대악마···.]

더 놀라운 일은 그 움직임에서 어떤 묘리나 신묘한 기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본디 무술이라는 건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가다듬어지고 정제되기 마련.

반대로 대악마의 움직임은 어떤 정렬된 흐름도 없이, 순간 순간의 본능에 모든 걸 맡긴 듯한 모습이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무예가라기보다는, 도구를 쓸 줄 모르는 짐승에 가깝다는 말이 어울릴까.

수십 년간 쌓아올린 무투가의 묘리에 기반을 둔 공세는, 그 짐승 같은 움직임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효화되고 있었다.

꽈광!!

쇄골과 후두부를 동시에 노린 두 인영의 공격이 가볍게 막힌다.

터져나오는 충격파가 일대의 흙먼지를 싹 날려버리며 두 존재가 만들어낸 폐허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미 주변에 멀쩡한 구조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발밑의 지면마저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걸 넘어서서, 거대한 균열이 쩍쩍 갈라져 위태로운 모습을 보일 지경.

천공요새가 붕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언제 바닥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답보(踏步)」

쿵―

그리고 바닥 상태 따위는 아랑곳않고 진각을 밟아낸 댈런이, 무릎으로 용인의 옆구리를 노렸다.

콱!

용인은 손을 뻗어 무릎을 받아냈다.

마치 가볍게 던져진 공을 받는 것마냥 무릎을 그대로 잡아낸 것.

꾸드드득.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서 관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용인은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재밌기는 한데···이게 끝이라면 더 볼 건 없겠군.”

푸훅───

가볍게 휘두른 날카로운 손톱. 댈런의 육신이 회백색 그림자로 흩어진다.

쩌━━━━━

용인의 손톱이 허공에 남긴 궤적.

저 멀리서 가까스로 버티던 첨탑 하나가, 그 궤적에 허리를 가른 듯 뚝 하고 쪼개졌다.

쿠구구구구···!!

손짓의 여파만으로 거대한 방사형의 구덩이가 만들어진다.

맨손으로 백여 미터 안쪽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비현실적인 광경.

오래 전 균열에서 상대했던 청린의 일격에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 위력이었다.

쉬이이익!

포기하지 않고 사각을 노린다. 놈의 등뒤에서 낮은 자세로 주파해온 댈런의 신형.

콰아아아앙!

대악마는 꼬리를 슬쩍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걸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직경 수십 미터의 구덩이가 하나 더 생겨났다.

우득!

지면의 균열을 이용해 땅에서 솟구친 기습을, 한 발 물러서며 여유롭게 잡아내 목을 비틀어버리고.

쿠웅.

가벼운 진각으로 일대에 충격파를 터뜨려, 등을 노리던 댈런의 신형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콰직!

발끝에서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진다. 그대로 잿빛 그림자로 변해 흩어지는 육편들.

손을 뻗어 그 잔흔을 움켜쥔 용인이, 짜증을 한가득 담아 소리질렀다.

“이딴 잔재주 말고 본신으로 덤벼라! 얼마든지 똑같이 으스러뜨려 줄 테니!”

[오래 기다렸다.]

폐허가 된 요새에 전성이 울린다. 용인은 휙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 무너지고 몇 안 남은 첨탑의 지붕 위쪽. 목소리가 시작된 건 그곳이었다.

[평소랑은 다르게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풍영결계(風影結界)」

첨탑 지붕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치더니, 허공에서 장막을 걷어내듯 댈런의 모습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아예 싸울 생각이 없었던 건가! 비겁한 수작을 부리는 게 전사가 아니라 주문쟁이로구나!”

“인간 나라 하나 먹겠다고 마물 수만 마리를 끌고 온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쯧쯧 혀를 차면서도 집중을 놓지 않는다.

저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려고 지금까지 전장에서 물러나 있던 게 아니었다.

애당초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한 은신 술식, 풍영결계를 실전에서 사용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

평소 같으면 몸을 숨기기는커녕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다 부수는 걸 선호하는 그였다.

그럼에도 한 발 물러선 건, 이번만큼은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이만큼이나 손을 섞은 게 부끄러울 지경이군! 쑴께서 지켜보신다기에 나도 기대했건만,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웃기는군.”

쿠르르르······.

픽 웃는 댈런의 목소리에, 하늘이 울었다.

“너 혼자였으면 진작에 뒈졌다. 화신체로 쳐들어온 주제에.”

회백의 투사는 생전 마지막 일격으로 쑴의 갑옷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대악마라지만 화신체에다 상성마저 극복한 이상, 그 유산을 흡수한 댈런이 상대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건 쑴의 첫 침공이면 항상 선두에 서는 타알마드 하나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

지금 전장에 나선 대악마는 무려 둘이었고, 타알마드를 제외한 나머지 한 놈은 전장 어딘가에 숨어있는 상황이었다.

‘놈이 언제 어디서 개입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냥 대악마 둘을 상대한다고 가정하고 싸워야 해.’

회백의 투사에게서 흡수한 영역,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은 타알마드를 대비해서 안배해둔 한 수.

그렇다면 다른 대악마를 상대할 수 역시 준비하는 게 옳다.

댈런이 분신체들로 시간을 끌면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건, 그 다른 한 수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몇 번이고 영역을 개방했음에도,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시도를.

쿠르르르릉!

하늘의 울림이 더욱 거세진다. 타알마드는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땅에 손을 꽂았다.

쿠드득!

단단한 손톱이 지면을 파고들고, 무너진 건물 밑바닥의 골조 자체를 들어올린 놈이 그걸 그대로 던졌다.

후우우우웅―

첨탑 지붕을 향해 날아오는 수십 톤짜리 돌덩이.

마치 거대한 유성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듯, 중력의 법칙을 위배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총알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초인이라도 저런 무지막지한 질량의 폭격을 견디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댈런은 몸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며 눈을 살짝 감았고.

쿠릉···.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올린 순간, 그가 바라보던 하늘 위에서 섬광이 떨어졌다.

━━━━━!!

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땅에 내리꽂힌 빛기둥.

날아오던 돌덩이가 그 낙뢰에 꿰뚫린 채 공중에서 파편으로 산산히 부서진다.

댈런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타알마드는 불현듯 스치는 육감의 경고에 하늘을 쳐다봤다.

쿠르륵. 꾸드드드······.

얼어붙은 하늘과 새까만 먹구름으로 양분되었던 창공.

그 틈 사이를 다른 무언가가 파고든다.

이글거리는 열기. 아득하게 울려퍼지는 뇌성.

두 하늘의 틈을 비집고 나온 검붉은 먹구름이, 수십 줄기의 번개와 불기둥으로 허공을 훑어댄다.

그건 마치 거대한 균열을 비집고 고개를 들이밀며, 붉고 푸른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괴수와도 같았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검붉은 먹구름이 붕괴되어가는 천공요새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요새 위. 영역의 두 일면 사이에서 마력이 기묘하게 공명했다.

“······!”

그 순간 육감의 경종을 느낀 타알마드가 황급히 몸을 굴렸다. 대악마답게 그 간단한 동작으로 백 미터 가까운 거리를 넘어선다.

쿠과과과과―!!

놈이 몸을 피한 직후 곧바로 터져나오는 불기둥.

직경 십수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력에, 이미 자리에서 멀리 대피한 타알마드의 비늘까지 열기가 미친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꽈르르르릉──!!

「뇌람(雷濫)」

검붉은 하늘이 땅을 향해 수십 갈래 뇌전의 비를 내리꽂고.

「대하주염(垈煆柱炎)」

잿빛 땅은 하늘을 향해 붉은 불기둥의 향연을 토했다.

하늘과 땅에서 쏟아지는 힘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져내리는 천공요새.

떨어지기 시작하는 요새의 지면 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타알마드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된다. 6위계의 문턱을 두드리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어떻게 이토록 다른 두 심상이 한 인간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지?”

“글쎄.”

댈런은 하늘을 향해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그가 서있던 탑 역시 무너지고 있었다.

지붕에서 발을 떼고 허공을 딛는다. 댈런은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 떨어지는 요새를 내려다봤다.

그 눈동자 안에는 붉고 푸른 기운과 잿빛의 색체가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꼬우면 너도 현질하던가.”

「영역 공명」

「닫힌 설산의 하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과 지면에 깔린 회백색 그림자.

「쌍천(雙天)」

천공요새를 사이에 두고, 두 하늘의 이빨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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