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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천(2)
쉬이익―!
검을 내지른다. 첨단에는 신성력의 밝은 성광이 맺혀있었다.
부욱하고 길게 찢어지는 마물의 가죽.
지렁이 같은 몸통에 수십 개의 팔이 달린 마물이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웅···!
“후우, 후우.”
루시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건물 크기의 괴수를 쓰러뜨렸지만 끝난 게 아니다.
그녀가 노리는 건 마물이 아니라 그 안쪽에 숨어있는 괴물.
이윽고 마물의 시체가 꿈지럭대더니 퍽 소리와 함께 내장과 가죽을 뚫고 큼직한 팔이 튀어나왔다.
“크르르···찾아냈군. 나를.”
사체를 찢어발기며 뛰어나온 건 트롤이었다.
마물의 피에 젖어 새빨갛게 물든 피부 위,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는 거대한 트롤.
“맡았나. 냄새를. 인간. 어떻게?”
“오늘 그 질문만 내가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알아?”
붉은 트롤은 악마였다. 마물의 몸속에 숨어서 성벽으로 접근하던 악마들 중 하나.
성기사단의 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형상이지만, 이름까지 기억나지는 않았다.
물론 기록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를 자행한 악마이긴 했다.
보통의 평범한 성기사라면 수십 명이 몰려와도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크. 크. 죽을 년. 어차피. 먹어주지. 맛있―그어어억!”
부우욱!
북 찢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악마의 옆구리가 길게 잘려나간 것이었다.
단단한 뱃가죽 사이로 울컥 흘러넘치는 핏덩이들. 악마는 흘러나오는 내장을 본능적으로 쓸어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악마의 배후로 이동한 루시아가 검에 묻은 검붉은 피를 휙 털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소리도 몇 번째 들은 건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게 항상 똑같은 말만 지껄여?”
“무, 무슨···.”
악마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눈앞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시야가 휘청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그억···?”
스르르 기울다 툭 떨어지는 시야. 붉은 눈동자에 맺힌 건 목 없는 악마 자신의 몸뚱이였다.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휘청거리는 거구의 육신.
머리가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번쩍이는 섬광이 그 육신을 다시 한 번 반으로 갈랐다.
쉬익―!
악마의 육신을 반으로 가른 섬광이, 곧장 방향을 틀어 막 땅에 떨어진 머리통을 짓이긴다.
콰직!
번뜩이는 검격이 트롤의 두개골을 그대로 뭉개버리고, 남겨진 백색 화염은 무지막지한 재생력마저 연료 삼아 갉아먹으며 타올랐다.
“···후우.”
이로써 여덟 마리째.
신성 문신으로 한계까지 힘을 발휘한 육신이 극심한 탈력감에 휩싸인다.
단마의 백염이 악마의 육신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걸 내려다보며, 루시아는 신성 문신의 힘을 잠시 가라앉혔다.
“신이시여. 제게 전장의 무게를 짊어질 체력을 주소서.”
전투기도로 몸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한편, 감각을 넓게 퍼트려 빠르게 전장을 훑어내린다.
성기사단은 각 대대별로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악마를 사냥하고 있었고, 그 결과 역시 나름 성공적이었다.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게, 루시아 혼자서 처치한 악마만 해도 거의 두 자릿수.
전투 초반에 댈런이 쓰러뜨린 숫자와 성기사단이 각종 성물로 처리한 악마까지 포함하면, 참전한 악마의 절반 이상이 무력화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아의 미간은 좁아졌다.
성기사단이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악마를 붙들어 매려 했음에도, 성벽 쪽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마탑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원인은 화력의 공백이었다.
대악마의 손에 천공요새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이쪽의 대규모 화력 투사 수단 하나가 사라진 것.
수만 마리의 마물을 상대로 아군이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성벽 위를 지키던 철혈군대와 더불어 수많은 술사들의 술식 포격 덕분이었다.
천공요새의 소실은 양쪽 진영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뜨렸다. 그리고 악마들은 기회를 놓칠 놈들이 아니었다.
성기사들의 방해를 무시해가며 저돌적으로 성벽을 향해 군세를 밀어붙인 끝에, 두 번째 성벽은 거의 함락되다시피 한 상태.
마물의 군세는 더 안쪽까지 진출해, 실질적인 전선은 마지막 성벽 앞에 펼쳐진 시가지에 형성되어 있었다.
아무리 악마와 마물을 상대로 압도적인 상성을 보이는 성기사들이라고 해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이상 공세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문관님! 하급 악마 질트레드를 무력화했습니다. 다음 목표를 부탁드립니다!”
전황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 파른이 달려왔다. 소년의 얼굴과 갑옷은 온통 마물의 검붉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마녀에게 잃어버린 눈을 안대로 덮고, 하나뿐인 팔로 신성력이 이글거리는 검을 쥔 소년.
“잘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루시아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하늘로 시선을 들어올렸다.
밀리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지체할 여유는 없다.
반쯤 기울어진 채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천공요새에서, 댈런은 아예 대악마와 정면으로 치고받는 중 아니던가.
파아아앗···!
하늘을 향한 두 눈에서 성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며, 루시아의 시야를 아득한 높이로 부양시킨다.
그녀의 소영역은 악마를 추적하는 데 특화된 심상이었다.
신성력의 힘을 빌려 전장 전체를 굽어다보고, 악마의 존재를 뚜렷하게 감지해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
대악마 이상 되는 존재가 작정하고 몸을 숨기는 게 아닌 이상, 그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악은 이곳에 없었다.
전장 전체에 걸쳐서 샅샅이 드러나는 악마의 행적들.
루시아는 고개를 치켜든 채 말했다.
“성벽 바깥에 남은 악마가 얼마 없다.”
이미 상당수의 악마가 화력의 공백을 틈타 두 번째 성벽 안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바깥에서 기회를 엿보던 악마들은 대부분 성기사단과 댈런의 손에 쓰러진 상황.
슬슬 성벽의 수비 병력을 지원한 시간이었다. 성벽 밖에서 마지막 한 마리의 악마까지 척살해봐야, 성벽 자체가 무너지면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판단한 루시아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명령했다.
“다른 대대들에 신호를 보내도록. 병력을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두 번째 성벽의 병력을 구조하고, 다른 쪽은 두 성벽 사이의 시가전을 지원···.”
그 순간.
아득하게 넓어진 그녀의 감각권에 이상한 것들이 잡혔다.
***
두두두두···.
그건 거대한 물결이었다.
전장의 동북쪽에서부터 몰려오며 땅을 진동시키는 수천의 존재감.
루시아의 심상은 악마를 추적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기에, 그 물결의 정체가 무엇인지 곧바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그것들이 악마나 마물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루시아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분명 동쪽 방어선에서 가용 가능한 병력은 전부 끌고 왔는데···?’
“심문관님! 제 3 대대의 급보입니다!”
그때 성기사 하나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신성 문신의 능력으로 다른 부대와의 통신을 맡은 부관이었다.
“거대한 하이 오크 무리가 전장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대략 사천 이상!”
구와아아아아!!
우아아아아!!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우렁찬 함성이 전장을 뒤덮는다. 몇 달 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함성들.
“하이 오크는 싸운다! 하이 오크는 이긴다!”
“이거 이기면 밥 먹는다! 마물도 고기다!”
“덜격! 덜격한다!”
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뚜렷하게 들리는 하이 오크들의 고함 사이로, 루시아의 감각권에 또 다른 기척이 걸려들었다.
“아카샤···?”
균열의 청린용을 쓰러뜨린 뒤, 댈런이 그녀의 둥지에서 거둬들였던 새끼용.
동료가 되었음에도 그 혈통 자체는 악마의 한 부류인 용이었기에, 루시아의 소영역은 그 기척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성벽을 넘어 전장으로 날아드는 아성체의 진룡이 보였다.
이제는 새끼용이라기에 너무 크기가 커져버린 아카샤의 등에는, 거의 자기 몸만 한 짐이 올려져 있었다.
“으하하하하!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날씨라니까!”
그 짐더미의 정체는 폭약이었다.
정확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폭발물들과, 그 폭발물을 안장처럼 깔고 앉은 땅딸막한 난쟁이.
[잡담할 시간에 어서 떨어뜨리기나 하세요! 아버지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맹세코 이딴 작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크흐흐, 역시 댈런 그 친구도 어지간히 미쳤다니까! 하늘을 날면서 폭탄을 떨어뜨린다니, 어떻게 그런 발상을···.”
[빨리 무게를 덜어내지 않으면 폭탄 대신 당신을 떨어뜨리겠습니다!]
반쯤 광기에 물든 외침과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의 전성.
신나게 성벽 근처의 마물들을 폭격하는 난쟁이와 짜증을 숨결로 토해내는 진룡을 바라보며,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쿠구구구구···.
그때 등 뒤에서 또 다른 진동이 울려퍼졌다.
반쯤 기운 채 하늘 높이 치솟았던 천공요새가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곁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부관이 입이 떡 벌어진 채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건 난데없이 등장한 하이 오크 군대나, 적을 폭격하는 용과 난쟁이의 조합보다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쿠르릉···.
꽈르르릉―!
하늘의 틈을 비집고 내려온 검붉은 먹구름이 천공요새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폭우처럼 끊임없이 쏟아붓는 수십 다발의 벼락들과, 그에 화답하듯 잿빛으로 물든 천공요새 하부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불기둥들.
위아래에서 터져나오는 벼락과 화염기둥의 향연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날카로운 수백 개의 이빨로 천공요새를 으적거리며 씹어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화력을 비상 술식으로 간신히 부양 중이던 요새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파편으로 붕괴한 천공요새는, 그대로 마물의 군대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
질량 그 자체가 폭격이 되어 군세의 북쪽 측면을 우그러뜨린다.
대악마와 댈런의 싸움에서 비롯된 후폭풍은 근방의 남은 마물마저 싸그리 집어삼켰다.
루시아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작전을 변경합니다.”
“···심문관님?”
“성벽으로 돌아가 방어를 지원하는 건 그대로입니다. 다만 저는 지금부터 단독으로 행동하겠습니다.”
이유 없는 기행은 결코 아니다.
무너졌던 전장의 균형이 다시 팽팽해졌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역전되고 있었다.
이제 이 전투에 남은 변수는 단 하나.
단 하나의 싸움이, 승리의 향방을 결정지을 터였다.
“···설마 저 괴물들의 싸움에 끼어드시려는 겁니까?”
기사단에서 십수 년을 봉사했다는 부관이, 그 전황과 의중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중년의 성기사는 자신보다 어린 상관의 명령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악마 살해자라는 이명까지 가진 성기사라 하지만, 저긴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끼어들기 어려운 싸움 아닌가.
“제 1 대대의 지휘를 부탁합니다.”
루시아는 그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북쪽. 붕괴된 천공요새가 떨어진 곳.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일대의 흙먼지 안쪽에서는 이 순간에도 격전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루시아는 갈무리했던 감각을 다시 넓혔다. 악마를 추적하는 그녀의 능력은 흙먼지 너머의 싸움을 선명하게 잡아냈다.
요새가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한 댈런이 압도하는 형국이었으나, 대악마 하나가 더 모습을 드러낸 시점부터 판도가 뒤집혔다.
두 대악마의 맹공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는 기세.
아무리 댈런이라도 대악마 둘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도 두 번 잃지는 않을 겁니다.’
한 달 전 꺼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물론 루시아의 체력과 신성력 역시, 이미 한참을 전장에서 싸우며 바닥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허나 어째서일까.
심상 너머에서 퍼져오는 기이한 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그녀의 내면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우우웅···.
북쪽을 향하는 그녀의 등 뒤로, 은빛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