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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천(3)
쐐애애액!
날카로운 가시가 늘어선 대검이 공기를 가른다.
목젖을 노리는 검끝. 톱날 같은 검신에 휘감긴 거무튀튀한 마력.
평소였다면 바로 성검을 뽑아들고 부딪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크하하하! 이제야 좀 즐겁구나!”
불현듯이 측면을 파고들어 손톱을 내지르는 용인의 권능 탓에, 성검을 꺼내드는 것만으로도 신체능력이 저하되기 때문.
“쯧.”
댈런은 혀를 한 번 차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용인의 손톱과 갑주 악마의 검끝이 집요하게도 쫓아왔지만 상관없었다.
「회명(回冥)」
공간의 틈을 파고들어 수십 미터를 이동하는 초월자의 기예는, 아무리 대악마의 검이라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노릇.
카각! 쿠과과광―!
가시투성이 대검이 가른 건 흐릿하게 뭉게진 잿빛 그림자와, 그 아래에 있던 애꿎은 폐허의 돌더미였다.
“···도망치는 기술 하나는 수준급이군. 에낙사구스의 하수인들처럼 같잖은 술식에 심취한 것도 모자라, 아예 승부에 대한 전사로서의 자존심마저 내다버린 것인가.”
검을 휘두른 대악마, 거구의 묵빛 갑주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픽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만들었다.
“새꺄, 그러면 대악마 명찰 달고 2대 1로 붙는 건 괜찮고? 니네 신이 퍽이나 좋아라 하시겠다.”
“···내 주군을 모독하다니. 죽고 싶은가 보구나.”
“안 그래도 서로 죽자고 싸우는 중이잖아.”
묵빛 갑주의 투구가 후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놈의 입장에서야 화날 만한 발언이긴 했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하자마자 참전한 저 악마는, 초월자 중 하나의 시체를 집어삼킨 대악마 ‘투르 아라둔’.
지옥 무기고의 대공이라고도 불리는 놈은, 쑴 휘하의 여섯 대공들 중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강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아무래도 이 싸움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지어야겠소, 타알마드 공.”
목소리를 가다듬은 갑주가 곁으로 다가온 용인에게 말했다. 용인은 세로로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왜 그러지? 이제 막 사냥이 즐거워지려 하던 참인데.”
“군세가 사면으로 포위된 형국이오. 동쪽은 하이 오크에게, 서쪽은 성기사단에게. 남쪽의 성벽은 아직 굳건하게 버티는 중이고, 이곳 북쪽의 퇴로는 우리로 인해 막혔소이다.”
“그거야 조무래기 악마 새끼들이 알아서 할 일···.”
“주군께서 명하신 건 사냥의 여흥이 아니라, 차리나의 왕도를 무너뜨리는 일임을 잊지 마시길 바라오.”
“···쯧, 재미없는 새끼.”
용인이 이빨을 드러냈다. 물론 갑주의 말이 맞았기에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수천 년을 산맥에 처박혀있던 하이 오크들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는 일.
허나 난데없이 산맥을 벗어난 놈들은, 어떻게 했는지 설원 늑대까지 길들여 타고 전장에 난입해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악마들을 척살하던 성기사단은 성벽 방어에 합류하려는 듯, 서쪽에서부터 아예 군세의 종심을 돌파하는 중이었고.
거기다 방어군의 마법 병력이 집중된 세 번째 성벽에는 아직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성벽 쪽에서는 웬 진룡 아성체를 탄 난쟁이가 난데없이 폭탄을 퍼붓지를 않나.
어떻게 보나 이쪽을 빨리 끝내고 도우러 가는 게 맞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용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놈은 나직하게 울음을 흘리며 손톱을 들어올렸다.
“놈은 용혈의 보유자다. 사냥용 무기를 꺼내.”
“좋소이다. 용 사냥은 오랜만이구려.”
검을 왼손으로 옮겨든 묵빛 갑주가 허공에서 길다란 장창 하나를 꺼내들었다.
창날에는 물론 창대에까지 난잡하게 가시가 박힌 형태의 장창. 그걸 본 댈런이 눈을 찌푸렸다.
[조심하거라. 용살의 저주를 품은 창이다.]
“알고 있소.”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투르 아라둔은 쑴이 다스리는 지옥, 파멸궁전의 무기고를 관리하는 대악마.
식인을 즐기지 않는 놈의 특성상 직접 잡아먹힌 건 한 번뿐이라지만, 그와 별개로 놈과 손을 섞다가 죽은 캐릭터만 해도 대여섯 명은 됐다.
[저 두 대악마는 오래 전, 아직 용신이 지옥의 권세에 합류하기 이전에 그의 각반을 살해한 이력이 있느니라. 인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겠으나, 악마들 사이에서 용 사냥꾼 형제라고 불린 적도 있지.]
“알고 있···.”
[내 빈말을 하는 게 아니니라. 진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네게는 극도로 위험할 것이야. 조심하거라.]
거참 알고 있다니까. 심상 너머 고룡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댈런은 무심코 웃음을 픽 흘리고야 말았다.
“예전에 비해 걱정이 많이 늘었군. 설마 내가 죽을까봐 두려우시오?”
[···되었다. 신경 써서 조언해줬더니 헛소리만 늘어놓는구나.]
“고맙군. 걱정해줘서.”
[앞이나 잘 보거라.]
어딘가 뾰루퉁해진 듯한 음색. 댈런은 헛웃음을 슬슬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다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다.
각자의 동기와 속사정이야 전부 다르겠지만, 어찌됐건 그를 아끼는 이가 하나 더 많아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동시에 그에게 책임의 무게가 더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그를 지키려 하는 만큼, 그도 무언가 지킬 것이 늘어난 셈이기에.
그게 상대의 생명이건, 마음이건.
혹은 수천 년 묵은 고룡의 희망이건 간에.
“후우.”
긴 날숨. 그리고 다시 깊은 들숨.
한계까지 내몰린 근육과 장기에 뜨거운 피가 휘돌고, 사지육신으로 활력이 뻗어나가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다.
심상 너머에서 회백의 투사와 사투를 벌인 이후로, 오랜만에 목숨을 저울대에 내건 진짜 싸움이었다.
대악마가 하나도 아닌 무려 둘.
그것도 적창의 말대로 쑴 휘하에서 수천 년간 합을 맞춰온 괴물들이다.
수많은 시체를 쌓아 지옥에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는 용인.
그리고 파멸궁전의 끝없는 병기들을 제작하고 관리하는 살아있는 갑주.
상대는 진룡도 죽일 수 있는 보구를 꺼내들었는데, 이쪽은 무기는커녕 갑옷 하나 걸칠 수 없다.
아무리 댈런이라도 이대로 혼자 붙었을 때의 승산은 결코 높지 않겠지.
‘지옥에서 싸울 때와는 달리 마물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온전한 힘을 낼 수 없는 화신체라는 특성을 감안해도···아무리 잘 쳐줘봐야 3할 이하.’
머릿속의 이성이 재빠르게 승산을 분석해 내려간다.
이 세계에서 겪어온 숱한 싸움의 경험과, 머릿속에 남은 수백 회차의 기억에서 비롯된 냉정한 현실.
사실상 지는 게 당연한 싸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은 고양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육신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여지껏 걸어왔던 길의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 쉬웠던 싸움이 있었던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그의 인생은 불가능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악마와 결합한 대사도와의 일전에서부터 재의 마녀와 균열의 청린을 쓰러뜨리릴 때도 그랬다.
미궁을 주파해 칼카스를 지옥째로 소멸시킨 이후, 덩굴의 마녀가 획책한 궤계를 막아섰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고.
근래에는 하이 오크의 내전을 겪은 끝에 쑴의 여섯 대공 중 하나를 소멸시키고, 이전 회차의 흔적인 회백의 투사와 일전을 벌이기까지.
승산을 확실하게 점칠 수 없는 싸움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밖에도 숱하게 겪어온 자잘한 전투들 역시 단 하나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도박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이라도 물러섰다면 지금의 그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테였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도박의 승산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일뿐.
그러니 이번에도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쿠웅―
발걸음에서 동심원의 파문이 퍼져나간다.
잠잠하던 하늘의 먹구름이 다시금 나직하게 울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른거리는 죽음의 공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한 수준의 긴장감으로 승화시킬 뿐.
영역을 개방한다는 건 스스로의 세계를 현실의 세상에 밀어넣는 기적.
과거를 수용하고 현재를 직시한 초월자에게만 허락된, 세계의 법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자신의 마음 하나 오롯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서야, 애당초 여기까지 걸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그는 지나간 과거와 이 순간의 현재를 넘어서서, 6위계 초월자들이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단초를 쥐고자 하는 입장.
스팟―!
하늘을 향해 가볍게 전격 줄기를 던져올린다.
이미 오래 전에 완성해낸 ‘쏘아지는 번개’의 술식.
검붉은 먹구름 사이로 전격의 줄기가 파고드는 걸 올려다보며, 동시에 발밑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을 잿빛 대지 안쪽으로 흘려보낸다.
「홍류섭(紅流燮)」
쿠구구구구······.
다시금 울음을 토하기 시작하는 두 개의 하늘.
대영역을 빚어낸 5위계 초월자인 그로서도, 영역을 개방한 채로 장기간 싸우는 건 힘의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전투의 초반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체력을 소비하고, 처음으로 영역을 이중으로 개방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황.
“내가 전위를 맡지. 알아서 잘 마무리해라.”
“알겠소. 인간형으로 변신한 진룡을 상대한다 생각하면 되겠구려.”
강대한 대악마답지 않게 익숙하게 역할을 분담하는 용인과 갑주를 바라보며, 댈런은 심상 너머의 힘을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시간이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본신에서 비롯된 전격과 화염을 트리거 삼아, 개방된 영역의 힘을 다시금 최고조로 끌어올린 지금이야말로 두 대악마를 상대할 마지막 기회.
「영역 공명」
「닫힌 설산의 하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쌍천(雙天)」
이번에 물러서면 다음 기회는 없다.
세 가지 색체로 두 눈을 물들인 댈런이 전신에 화염의 갑주를 둘러낸 순간.
두 대악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돌격했다.
콰광―!
용인과 갑주가 서있던 땅이 폭발하듯 꺼지며 잔해를 흩날린다.
화신체의 육체 능력만으로 음속을 넘어선 주파.
벌어졌던 수십 미터의 거리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 0으로 수렴하고.
치솟는 잔해의 파도를 뒤로 한 채, 눈앞으로 날카로운 창끝이 파고들었다.
「뇌람(雷濫) : 공명」
그 순간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수십 갈래의 빛기둥을 떨어뜨리며, 그 첨단으로 창끝을 강타해 저지한다.
도끼나 성검이 없다고 해서 상대의 무구를 막을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런 무구에 필적하는 강력한 힘을 끌어내려, 마치 검을 휘두르듯 정밀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그게 곧 손에 쥔 무기나 다름없는 법이니까.
꽈르르르릉─!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같은 위치에 떨어지며 대악마의 기세를 막아서는 빛줄기.
무기고의 관리자인만큼 유려하게 휘어지며 사각을 파고드는 창끝에, 일일이 전격의 줄기를 그 위로 내리꽂으며 찍어누른다.
투가가가가가강!
술식과 무구가 만났다기보다,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듯한 격철음이 울려퍼진다.
그건 소리의 범주를 상회하는 충격파 그 자체.
한 번의 격검에 주변의 석재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땅이 움푹움푹 패이며 전장의 지형을 바꿔놓는다.
“흐아아아!”
갑주 위로 불길한 상형문자들이 그려지며 갑주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놈의 손이 마치 수십 개로 늘어난 듯 잔상을 내보였다.
낙뢰의 저항을 뚫여내려는 필살의 의지.
그러나 다시 한 번 내려친 벼락의 다발이, 그 마지막 공세마저 틀어막았다.
「뇌령신수(雷零神樹)」
꽈르르릉──!!
그건 드넓은 먹구름 전체에서 뻗어나온 뇌우의 비가, 지상의 단 한 점으로 모여드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회백색으로 물든 땅에 뿌리 내린 뇌전의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은 벼락의 가지 끝에서 먹구름의 이파리를 맺은 듯한 모양새.
대악마의 일격마저 그 거대한 동체를 뚫지 못하고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회명(回冥)」
그리고 그 틈에 일렁이는 잿빛 그림자.
다음 순간 아득하게 높이 뻗은 신목의 가지들 사이에서, 회백색 음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댈런이 말했다.
“이제 내 차례군.”
구우우우······!!
벼락의 나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