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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정령(1)
쉭─
공간을 녹여버리는 검붉은 불꽃.
치지지지직···!
그 불꽃을 물어뜯는 진녹색의 벼락 줄기.
쿠과과과과······!!
화염과 뇌전이 교차하며 주변 풍경이 이지러진다.
높게 솟은 산봉오리가 낮아지고, 하늘에 가득 끼었던 먹구름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영락한 악신을 죽인 대마법사의 번개와,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던 진룡의 화염.
대자연의 위세마저 너끈히 거스를 두 존재의 격전지를, 온몸에 마력을 두른 채 주파한다.
「술식갑주 : 사중첩」
「백풍갑(伯風甲)」
팔다리를 따라 휘도는 바람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충격을 한껏 비틀어내고.
「화염갑(火焰甲)」
「청뢰갑(靑雷甲)」
붉음과 푸름이 뒤섞인 불과 전격의 향연으로, 바람을 찢고 들어오는 여파를 상쇄하며 버텨낸다.
「분하갑(噴河甲)」
가장 안쪽에서 퍼져나가는 청백색 샘물의 갑주는, 그렇게 깎여나가는 다른 갑주의 주문들을 끊임없이 재생시켰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촤르르르― 퍼벙! 꽈과광!
아공간에서 사슬을 뻗어 방어를 돕던 악마, 아르보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반응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무려 네 개에 달하는 주문의 정수를 온몸에 둘둘 감고서도, 할 수 있는 건 두 존재의 공방에서 흘러나오는 여파를 감내하는 것뿐.
허나 한 발 물러서는 대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파고드는 건, 적창 혼자서는 저 전격술사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뇌해(雷海)의 주인 댈타리온.’
모르는 사람이라면 비웃을 법한 거창한 이명.
허나 그 실체는 고작 몇 마디 말로 담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스스로가 철저한 계획과 고민 끝에 육성한 캐리터이기에, 댈런은 그 누구보다도 저 남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악신들 간의 분쟁으로 아무리 영락했다고는 하나, 쑴의 본체를 직접 처치하고 대지옥을 소멸시킨 장본인이며.
더불어 그 과정에서 오색의 뇌전 하나만으로 쑴의 모든 권능과 파멸궁전의 군세를 오롯이 받아냈다는 것까지도.
‘적창은 분명 강력하다. 전해지는 설정에 따르면 모든 대악마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전성기였다면 댈타리온과 엇비슷하게도 싸울 수 있었겠지. 하지만···.’
용신과의 불화로 인해 이름을 잃고 영락한 지금, 과연 그 전성기의 역량을 다해낼 수 있을까.
애당초 지금의 적창은 댈런의 몸에 흐르는 용혈. 그 하나만을 매개로 되살아난 일종의 화신체다.
댈타리온은 적창이 본래의 영혼과 육신을 가졌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댈런의 요청을 받아들여 놈을 막아서고 있긴 하지만, 승산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하지만 전장이 이 설산이라면···내게도 승산이 존재한다.’
이곳은 환상세계의 영역.
댈런의 의지만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다.
본디 영역의 완전개방은 6위계의 초월자만이 손에 쥘 수 있는 권능 중 하나.
허나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이상, 그의 영역은 이미 완전히 개방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댈버와 싸울 때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차리나와 댈타리온. 두 사람의 영역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목격했다.
거기다 종말에 정면으로 맞선 마법사인 댈타리온이, 어떻게 영역을 다루는지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 상황.
지금 이 순간에도 미답의 경지에 대한 깨달음이 해일처럼 몰려온다. 마치 천변만화의 얼굴과 덩굴의 마녀가 서로의 영역을 개방하며 격돌했을 때와도 비슷했다.
아직까지 스스로의 역량으로 현실에 온전한 영역을 덮어씌우는 건 쉽지 않았으나, 이 설산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다루는 정도는 가능하고도 남았다.
필요한 건 두 초월적인 존재가 싸우며 만들어지는 빈틈.
그리고 그 틈을 인지하고 파고드는 감각과 결단력뿐.
꽈릉─
부채꼴로 뻗어나가는 검붉은 화염과, 그 화염을 정면에서 가르는 녹색 번개를 바라보며.
쿠르르···.
뇌해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밀려났던 검붉은 먹구름이, 댈런의 의지에 따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츠가가가가각──
녹색 낙뢰에 능선이 세로로 쪼개진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골짜기에서 진룡의 거체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화륵!
쩍 벌린 주둥이 앞에서 맺히는 검붉은 구슬.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하나의 선.
━━━━━━━━━
어떤 소리나 충격도 퍼져나가지 않는다. 집약된 열기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인 것.
진동을 전달할 매개마저 소멸시키고, 선 위의 공간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용신의 창끝이다.
[주인에게 버려진 도마뱀 따위가!]
날카로운 전성이 하늘을 울린다. 용숨결의 목적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가 휙 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용의 창은 가만히 빗나가주지 않았다. 뻗어진 그대로 비틀어진 검붉은 직선이, 하늘을 갈지자로 가르며 마법사의 신형을 뒤쫓는다.
[응축된 숨결 따위로 날 태울 수 있을 것 같은가!]
회피기동을 멈추고 수인을 맺는 손. 그 끝에서 황색의 섬광이 뿜어졌다.
쩌━━━━
검붉은 선과 황색 낙뢰가 충돌하며, 마치 허공에서 핵폭발이 일어난 듯 거대한 불꽃의 구체가 태양처럼 빛을 토했다.
[후우···!]
한 점의 그림자도 허용하지 않는 빛의 폭격. 그 아래에서 적창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불멸의 격을 거머쥐고, 스스로의 힘을 완전하게 손에 넣은 존재.
용혈을 매개로 탄생한 화신체의 신세였지만, 일반적인 악마들과 달리 낼 수 있는 힘이 깎이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다만 누군가의 영역에 예속된 화신체인 이상, 낼 수 있는 힘의 총량이 제한되는 것까지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 가공할 위력의 황색 뇌전을 받아낼 수 있는 건 앞으로 기껏해야 두어 번.
[댈런. 오래 끌 수 없느니라.]
영역의 주인에게 은밀하게 전성을 전달한 진룡이, 순간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쯔팟!
스파크와 함께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법사.
허공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건 물론이고, 공간을 찢고 나오는 것조차 한 치의 부자연스러움도 없다.
하나의 세계. 독립된 시공간을 온전히 다룬다는 게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
마법사의 손에는 샛노란 뇌전의 창이 들려있었다.
“검붉은 화염의 용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지.”
[···그랬느냐.]
“수천 년 전, 스스로 다섯 번째 악신으로 거듭나려는 용신의 결정에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던 진룡. 주인에게 버림받은 충신의 말로를 걸었지. 흔한 이야기야.”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입꼬리 한 쪽만 올리는 미소. 적창은 그 웃음이 어쩐지 익숙했다.
“이제와서 스스로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보려 하는가? 알량한 예언의 신봉자로 저런 반푼이에게 네 모든 걸 바쳐가면서?”
[반푼이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가진 역량을 모조리 집약했다면 이미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루고도 남았을 터이니.]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마법사가 버럭 소리쳤다.
“역천의 우물 속에서 보낸 영겁의 시간 동안 내가 뭘 봤는지 아나? 세계를 수십 번도 구하고 남을 수백의 가능성들이었다!”
이마에 올올이 일어선 핏발. 잔뜩 충혈된 눈과 잘게 떨리는 손끝.
침 튀기는 외침 한 마디마다 창공의 뇌해가 울고 지면에서 전격의 줄기가 터져나온다. 마법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 가능성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 영락한 악신 하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머저리가 세상을 구한다고? 수천 년 산 진룡이여! 너는 그런 헛소리를 믿는···”
[그래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룬 대마법사여, 너는 운명의 예속을 벗어났느냐?]
차분한 용의 속삭임.
마법사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내 결정의 연유는 운명을 이겨내지도 못한 필멸자 따위가 알 바 아니니라. 닫힌 결말 앞에서 무릎 꿇은 건 피차 마찬가지지.]
용이 입을 쩍 벌렸다. 목구멍 안에서 검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수천 년 전 용신이 창끝에서 피워냈던 불꽃. 파멸궁전의 지옥불에 능히 맞설 수 있는 화염.
[그러나 단서를 하나 주자면···]
제어를 넘어섰던 감정을 추스리고 뇌전의 창을 들어올린 마법사에게, 적창이 나직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는 운명이라는 말장난에 굴복하지 않느니라.]
“말빨로 빈틈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찌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는 소음. 잿빛 일렁임과 함께 댈런이 마법사의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온몸에 주문의 갑주를 둘둘 두른 채임에도, 입고 있는 천옷이 찢기고 타버려 너덜너덜해진 모양새.
허나 마력광이 번뜩이는 눈은 빛을 잃지 않았다. 형형하게 흘러나오는 안광을 본 적창이 이빨을 드러냈다.
[수천 년 동안 헛산 게 아니니라. 무시하지 말거라.]
웃음기 어린 전성과 함께 진룡의 입 앞에 검붉은 구슬이 뭉클 맺히고.
“이···!”
마법사의 고개가 휙 돌아간 순간, 하늘을 가르던 열선이 다시 한 번 내뻗어졌다.
━━━━━━━━━
허공을 검붉게 긋는다.
선을 따라 일그러지는 빛과 그림자.
“이 간격에서! 미친 건가···!”
마법사가 소리쳤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일대의 공간과 마력풍을 죄다 일그러뜨리며 내달리는 열선 앞에서 선택지는 하나뿐.
대마법사의 육신마저도 단숨에 증발시킬 열기를 향해, 마법사가 뇌창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쩌━━━━
밝은 빛의 구가 지면을 휩쓸었다.
쿠과과과과──!!!
숲이 송두리째 날아간다. 영구동토의 얼음이 한순가에 기화해 사라졌다.
암반이 달궈지기도 전에 부스러져 흩어지고, 계곡이 일그러지며 녹아내린 카라멜 같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댈런은 그 파괴의 한가운데, 빛의 구 안에 있었다.
파지지지지―!
마법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낸 전격의 역장 안쪽은, 거대한 광구 안에서의 사실상 유일한 안전지대.
촤라라라락―
[으갸갸갸갹!]
아르보르의 혹한의 사슬이 이글거리는 열기를 상쇄하는 사이, 반경 오 미터의 안전지대 안쪽에서 댈런의 발끝이 허공을 밀어찼다.
투웅―
내디딘 순간 마법사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경악에 물든 눈동자.
“이 저주받을 것들이 쌍으로 자살 공격을···!”
“극찬이군.”
마법사의 비난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도끼를 내리찍는다. 그 순간 도끼를 든 인영은 여덟이었다.
「회명(回冥)」
「팔연답산(八聯踏散)」
새파란 전격을 휘감은 여덟 자루의 도끼. 손가락을 까딱이는 마법사.
거대한 뇌전의 고리가 퍼져나가며 도끼 든 그림자를 죄다 깨뜨리고, 댈런의 입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말원(抹原)」
포기하지 않는다.
성검을 휘둘러 전격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한 걸음 더 다가선다.
「합투권 : 철격(徹擊)」
「이팔지순(二八至瞬)」
날개뼈에서부터 마력이 공명을 시작하고, 그대로 주먹까지 내달린 예기가 스물여덟 갈래로 뻗어 마법사를 노린다.
“이 버러지 같은···!”
이번에도 전부 찢겼다. 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너덜너덜해진 왼팔.
「뇌격(雷擊)」
허나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번뜩이는 섬광. 터져나오는 뇌전.
투가가가각!!
팔다리가 찢겨 하얀 김이 터져나오고, 도끼가 바스라지고 성검에 금이 쩍쩍 갔지만 멈추지 않는다.
공간째로 증발시키는 광구의 감옥 안, 마법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역장을 유지하는 지금이 기회.
물론 마법사는 그 찰나를 파고드는 수십 차례의 맹공을 전부 받아쳤고, 신적인 경지의 술식 운용에 상처가 누적되어가는 건 오히려 댈런 쪽이다.
“푸흐―”
그럼에도 웃었다.
한가득 끌어올려진 입꼬리. 그건 댈런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이 순간에도 내디딜 수 있는 한 걸음에 대한 감사일까. 아니면 압도적인 힘의 격차 앞에서 포기하지 않은 자신을 향한 자랑스러움일까.
알지 못할 감정의 소용돌이 속.
야만전사에 가까운 육신의 투지 어린 함성과, 일평생 억눌려있던 삼십 대 아저씨가 소리치는 고함이 하나로 융화된다.
오래도록 앓아온 육체와 정신의 괴리감은 이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오롯한 나 자신이라는 해방감이 온몸을 고양시킨다.
그 속에서 댈런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싸움의 끝에 후회는 없으리라는 걸.
두두두두두두─!!
으스러지는 육신을 용혈로 재생시키고, 지금껏 아공간에 모아온 마도구며 무구들을 전부 쏟아붓는다.
룬 보석이 빛을 뿜고 이름 없는 악마의 정수가 폭발한다.
은빛 전신갑주가 일회성 방패로 쓰인 뒤 찢겨나가고, 4위계 엘프에게서 빼앗았던 팔찌가 와장창 깨져나갔다.
허공에서 자라난 덩굴 줄기들은 마법사를 두른 전격에 닿자마자 바스라졌다.
번개와 불화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지옥문이 부패의 기운을 토했지만 수인 한 번에 죄다 소멸했다.
“내가 쓰러지면 너도 죽는다! 대체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마법사의 외침에 붉은 전격의 파도가 밀려오고, 댈런은 대답 대신 성검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쨍──!
성검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