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94화 (194/288)

194

홍색정령(3)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7, 지능 +9, 마력 +8, 취우진청(고유) 천록(고유), 뇌창(고유), 홍색정령(고유), 백락(고유)]

시야 한쪽을 가득 채운 알림창.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글자들이 눈앞을 수놓는 것과 동시에, 손끝으로 흘러든 빛무리가 전신에 아득한 고양감을 선사한다.

“후우······!”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다시금 오색의 번쩍임으로 한가득 채워진다.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에 등골이 서늘해지다가도, 하늘을 날아오르는 상승감에 머릿속의 모든 복잡함이 싹 날아간다.

일반적인 시체를 회수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격변. 회백의 투사를 계승했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 댈런···?”

이글거리며 뻗어나가는 마력에, 곁에서 치유 기도를 읊던 루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러설 정도.

“댈런, 괜찮으십니까?”

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 댈런은 낮게 웃으며 성기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나 보군.”

고개를 들자 아직까지 격돌 중인 두 하늘이 보였다. 쑴의 새까만 먹구름과, 차리나의 얼어붙은 하늘.

온몸을 내달리는 고양감을 즐길 시간은 없다. 차리나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쑴을 막아서고 있을 테니까.

쿠르르릉······.

이 순간에도 섬광과 굉음이 하늘을 몇 번씩이나 훑어내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제멋대로 급변한 기상이 우박이며 불덩이를 쏟아내거나, 지면을 향해 벼락을 내리꽂는 건 덤이었고.

[할 수 있겠느냐?]

심상 너머에서 적창이 조용히 물었다.

다소 지친 듯한 음색. 댈타리온과 싸우느라 전력을 다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글쎄.’

댈런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두 존재의 격돌은 자연재해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만약 저 싸움이 지상의 전장에서 벌어졌다면, 도시 하나쯤 초토화되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었겠지.

차리나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쑴을 끌고 하늘 위로 올라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6위계의 싸움이 확실히 어마무시하긴 하군.’

끓어오르는 마력과는 달리 머릿속은 차갑게 식으며 전황을 분석한다.

댈타리온의 능력을 모조리 흡수했음에도, 그 방대한 깨달음을 단숨에 갈무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댈런의 상태는 6위계에 올랐다기에는 어중간한 실정. 과연 악신과의 정면충돌에서 승산을 장담할 수 있을까.

확률을 어림잡은 댈런은 문득 피식 웃었다.

‘그런데 질문이 틀렸소.’

[음?]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오. 해야 하느냐가 중요하지.’

승산이 보장된 싸움은 어느 하나 없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전투는 그 확률과 무관하게 목숨을 담보로 거는 도박.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결정한 이상, 실낱같은 승산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가볍게 숨을 가다듬은 댈런은 아공간에서 손도끼와 성검을 꺼내들었다.

파스슥―

“음?”

손에 쥐자마자 부스러지는 손도끼와 성검 반쪽.

그에 당황할 새도 없이,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와 전신에 휘돌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파지지지직!

새하얀 전격이 성검을 뒤덮으며 루시아의 중얼거림마저 묻어버린다.

성검이 온전한 검신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왼손에 자연스럽게 쥐어지는 순백의 도끼.

거듭된 전투로 넝마나 다름없어진 육체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된 순간, 눈앞에 전사의 환영이 한 번 더 비쳤다.

“······.”

도끼를 허리띠에 매어둔 채, 하늘을 가리키는 전사의 손끝.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 흐릿한 신형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온몸을 깨워내는 활력은 여전하다.

이름 모를 전사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고 느낀 건 그저 착각일까. 그때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신성? 댈런, 어떻게···.”

“나중에 이야기해주겠소.”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알아내야 할 건 산더미지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이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꾸만 보이는 그 환영 같은 남자는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허나 그 모든 건 이 전투에서 악신을 꺾은 다음에야 의미가 있는 일.

반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온몸을 가득 채운 이 힘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금방 다녀오지.”

훅―

어깨를 슬쩍 푼 댈런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직후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는 한 줄기 빛살.

꽈릉─!

전장에는 빛살의 궤적을 뒤따르는 뇌성만이 남아 맴돌았다.

싸움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휘이이이······!

차디찬 칼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하늘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은 급격하게 낮아졌다.

얼어붙은 하늘과 먹구름이 뒤섞이며 일대의 마력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그 힘의 충돌로 박리된 공간에 사방의 풍경이 난반사된다.

쿠르륵.

다가오는 댈런을 발견하고 꿀렁거리는 먹구름. 새까만 음영 속에서 핏빛 번개가 이빨을 드러낸다.

댈런은 허리춤에 도끼를 꽂아넣고 수인을 맺었다.

에클라힘의 첫 번째 성벽을 단숨에 무력화시킨 핏빛 번개 앞에서도 속도를 줄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수인을 마무리하고 다시 한 번 허공을 박찼을 뿐.

구우웅―

그러자 발자취가 남긴 허공의 파문에서부터 푸른 빛이 흘러나오며, 수백 가닥의 얇은 전광이 댈런을 앞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취우진청(驟雨振靑)」

콰지지지지직!

핏빛 번개와 뒤엉키며 불꽃을 튀기는 청광.

댈런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걸 넘어서서, 아예 핏빛 번개의 근원지인 먹구름 안쪽까지 침투한다.

새까만 먹구름이 꿀렁이며 저항해봤지만 잠시뿐이었다.

마치 갈퀴로 짚더미를 흩어내듯, 수십 가닥의 푸른 전격이 먹구름을 찢어발기고 그 너머의 광경을 열어보인다.

쩌저저저정―!!

먹구름 뒤에서 나타난 건 꽝꽝 얼어붙은 하늘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얼어붙은 하늘이, 문자 그대로 얼음처럼 조각조각 깨져나가는 광경.

하늘이 깨진 자리에는 새까만 먹구름이 파고들며 불과 번개의 세계를 덧칠해간다.

이미 에클라힘 상공의 하늘은 절반 이상이 지옥 그 자체로 변해있었다.

꽈르르릉!!

불현듯 들려오는 불길한 뇌성.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힘없이 떨어지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썩을.”

이곳에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존재야 둘 중 하나다. 짧게 혀를 찬 댈런은 허공을 박차고 날아가 그 인영을 붙잡았다.

“쿨럭······.”

신음조차 희미했다. 차리나는 큼직한 망치에 얻어맞은 듯, 군데군데 부서진 얼음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다.

입가에는 피 대신 부스러진 얼음 파편이 흘러내린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청백색 눈동자가 가까스로 댈런을 향했다.

“···댈, 런.”

“고생하셨소. 이제는 내가 맡지.”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옅어져가던 숨소리마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차가운 심장은 가쁜 박동을 멈췄고, 얼음덩이가 된 주검은 식어갈 체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미안하오.”

댈런이 말했다.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아니었군.”

댈런은 허공을 응시하는 눈을 조심스레 감겨주었다. 얼어붙은 눈꺼풀은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검붉은 화염으로 살살 녹여내니 감길 수 있었다.

눈가에 보석처럼 맺혀 있다가, 열기에 녹아내려 스르르 떨어져내린 물방울.

6위계 초월자의 마지막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개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였을까. 아니면 남겨진 백성을 향한 염려였을까.

“수고 많으셨소. 그리고 늦어서 미안하오.”

닿지 않을 사과를 한 번 더 건네고, 아공간에 차리나의 얼어붙은 몸을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이번만큼은 아르보르도 군말 없이 아공간에 자리를 내어줬다. 칼카스의 정수만큼이나 차가울 텐데도 그랬다.

‘···댈, 런.’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맴도는 유언.

마지막으로 쥐어짠 목소리는 문장으로 이어지기 전에 끊어졌지만, 건네고자 했던 의지는 온전히 전달됐다.

댈런은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하늘에서는 두 번째 신형이 떨어지고 있었다.

쿵.

허공에 내려앉은 것 치고는 상당히 이질적인 착지음.

놈이 말했다.

[어, 뭐야. 벌써 뒈졌어?]

가벼운 목소리. 마찬가지로 가볍기 그지없는 표정과 몸짓.

이제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노이즈가 걷힌 악신의 모습은, 댈런과 키가 비슷한 청년이었다.

이리저리 산발로 흩어놓은 검붉은 머리칼. 성별을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얼굴.

핏빛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광기로 번뜩였다. 쑴은 조금 전 아공간의 입구가 닫힌 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헤헤···그래도 잠시 놀기에는 나쁘지 않았어. 잘 가.]

놈의 가시투성이 갑옷은 곳곳이 뜯기고 일그러져 있었다.

갑옷 안쪽에 비치는 상처도 적지 않았다. 6위계의 마법사가 목숨을 바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러면 드디어 메인 코스인가? 히히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새빨간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시는 악신. 댈런은 말없이 왼손을 휘저었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손도끼가 날아간다. 쑴은 여유롭게 왼손을 뻗어 도끼의 날 부분을 잡았다.

[캬아아악!]

정확히는 잡아내려 했다. 새하얀 도끼가 놈의 손가락을 무 자르듯 잘라내기 전까지.

[신성? 너 설마 그 역겨운 놈이랑···.]

“말 존나 많네. 주문쟁이냐?”

황급히 도끼를 쳐낸 악신의 머리 위. 잿빛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댈런의 신형을 뱉어낸다.

「회명(回冥)」

「술식갑주(術式甲冑)」

「화염갑 : 홍류섭(紅流燮)」

새빨간 불꽃으로 온몸을 감싸고, 튕기듯이 떨군 다리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화염.

콰르르르···!

악신을 집어삼킨 불꽃 세례가 흩어지기도 전에, 빈 왼손으로 수인을 맺고 그대로 흩뿌린다.

「취우진청(驟雨振靑)」

콰지지지직!!

불현듯 사방에서 죄어오는 핏빛 번개의 향연과, 그에 맞서 발밑에서 터져나온 청광의 갈래.

두 뇌전의 다발이 얽히고설키는 사이, 화염의 폭포에서 악신의 신형이 뛰쳐나왔다.

[드디어 싸울 수 있어! 드디어 죽일 수 있···!]

“지랄을 해라.”

쿵―

허공을 내리찍는 발걸음. 그 반동을 그러모아 검에 실어 휘두른다.

새하얀 검신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쑴의 갑옷에서 불길이 솟기 시작하고, 다음 순간 두 존재의 신형이 얽혀들었다.

두두두두두두───

터져나오는 폭음. 일그러지는 일대의 마력.

성검이 남기는 백색 궤적과, 지옥불이 맺는 붉은 일렁임이 수없이 교차하며 충돌한다.

수천 가닥의 붉고 푸른 뇌우가 서로를 얽어매고 견제하는 사이, 천옷 입은 전사와 가시갑주의 악신이 끝없는 공방을 주고받는다.

그럼에도 시간에 쫓기는 건 인간의 몸뚱이를 입은 쪽.

이제는 수인조차 생략한 의지의 발현에, 균형을 깨보고자 수십 가지 변수들이 빚어진다.

「뇌조(雷條)」

「염사(炎巳)」

「홍염주(紅炎柱)」

「합투권 : 철격(徹擊)」

전격의 뿌리와 화염의 뱀이 가시투성이 갑주를 물어뜯는다.

허공에서 불기둥이 터져나오며 악신을 집어삼키려 들고, 사각을 노린 권격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낸다.

투가가가가각!!

아주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는 악신의 갑옷. 허나 이대로라면 힘이 다하는 게 먼저다.

쑴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오히려 불기둥 안쪽으로 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

[크히히히, 그 도끼랑 검 말고 다른 것도 보여달라고!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신성을 받았으면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소리잖아! 더 보여내란 말이야!]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손끝에 전격을 머금는다.

의미 없는 주문과 기술의 난사처럼 보인 과정은, 사실 시간을 벌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댈타리온의 깨달음을 다 흡수하지 못한 이상, 이쪽은 시간에 쫓기는 동시에 도리어 시간이 필요한 모순적인 입장.

허나 핏빛 번개와 격돌하는 푸른 번개를 제어하며, 전격술사의 깨달음을 마침내 일부나마 소화해낼 수 있었다.

치지지직···!

[그런 자잘한 번개 말고 큰 걸 던져봐! 죽어버린 얼음덩이처럼 큰 거!]

불기둥을 흩어버리며 외치는 악신. 내뻗은 손은 수인을 끝맺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복잡하게 꼬이며 뒤틀리는 뇌전의 마력.

손아귀에서 번뜩이며 쏘아진 건,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색채의 벼락이었다.

「천록(穿綠)」

진녹색 전격 줄기가 악신의 왼쪽 어깨를 파고든다.

콰득!

우그러지는 갑옷. 쫙 하고 튀는 핏방울.

악신이 처음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놈이 기쁨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힛, 아프다! 좋아! 사랑해! 죽···!]

입가에 튄 핏방울을 핥던 악신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정지 화면을 누른 듯 멈췄다.

쿠르르릉······.

하늘 전체를 뒤덮었던 쑴의 먹구름이 갈라진다.

꿀렁이며 저항하는 새까만 색채를 으스러뜨리고, 그 틈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거대한 전격의 바다.

「영역 개방 :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영역의 완전한 개방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힘의 파동은 하늘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 차리나의 영역보다도 강대했다.

한 마법사가 일생을 바쳐서 만들어낸 벼락의 세계가, 누군가의 영역 일부가 된다는 상식을 벗어난 일.

어느 시간선에서 악신의 목숨마저 앗아간 오색의 번개가, 이 시간선의 사냥감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크힛······.]

본능적인 두려움일까. 한가득 올라간 쑴의 입꼬리는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댈런은 하늘 저편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는 돌아온 손도끼에서 피를 쫙 털어내고 말했다.

“자, 큰 거다. 네가 원했던 대로.”

검은 눈동자 안에 소용돌이치는 오색의 번개.

허리춤에 도끼를 꽂아넣은 왼손에서, 샛노란 전격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언제까지 그 입꼬리가 올라가 있나 확인해볼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