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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정령(4)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샛노란 섬전이 날아가며 긴 궤적을 남기고, 지옥불의 파도가 그에 맞서 밀려온다.
화염과 벼락이 맞닿은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빛이 돌아왔다.
쩌━━━━
거대한 광구가 꽃을 피운다.
가려진 태양이 구름을 뚫고 드리운 것만 같은 광경.
현대의 지구인이었다면 머리 위에서 핵폭탄이 터졌다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곧이어 정말로 소형 전술핵이 폭발한 것 마냥, 광구에서 뻗어진 열기가 전방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웅────
이글거리는 열기의 폭풍이 근방 일대의 공기를 싹 밀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공이 다시금 모든 걸 빨아삼키며 두 번째 폭발을 빚어낸다.
투과과과과·········!!!
일반적인 소리의 범주를 넘어선 충격파가 몇 차례에 걸쳐 메아리치는 것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번에 실명할 수준의 빛이 일대의 음영을 지워버렸다.
파지지지직──!
수분이 날아간 공기 사이에서는 수백 갈래의 붉고 푸른 뇌전이 뒤섞였다.
내리쬐는 광채 아래에서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이색 빛깔들의 향연.
두 인영이 충돌한 건, 바로 그 한가운데였다.
[크히히히!]
쿠드드드득──!!
짧은 순간 검과 주먹이 교차한다. 공기가 이지러지며 터져나오는 기괴한 굉음.
두 색채의 번개가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는 아수라장 한가운데, 댈런의 성검은 악신의 가슴팍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캬아아악!]
단단한 흉갑이 속절없이 찢어진다. 그 아래의 속살이 울컥 피를 토했다.
물론 화신체의 육신이라도 베여나간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재생하기 시작했다.
수복된 성검에 서린 기이한 울림이 완전한 재생을 방해하기 전까지는.
츠즈즈즈···!
새하얀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닫혀가던 상흔을 억지로 잡아 벌린다.
악신의 재생력이 억지로 딱지를 얹고 굳혔지만, 백색 기운은 끝내 조그마한 상처를 남기고야 말았다.
[크힛, 빌어먹을! 신성!]
가슴팍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악신이 표효했다. 분노하는 목소리와 달리 놈의 입은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미친 새끼.”
[히히, 그거 칭찬이지? 맞지?]
모니터 너머에서 볼 땐 이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저런 광기를 단순한 폴리곤과 대사 줄글 정도로 전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히죽거리며 웃는 악신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가시투성이 갑옷은 절반 이상 떨어져나가고, 곳곳에 아물다 만 상처들이 가득한 상태.
[화신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 많은 제물을 감당했는지 알 수 없었거늘···이 땅을 딛기 위해 내 예상보다도 더 많은 제약을 스스로에게 묶은 듯하구나.]
적창의 말마따나 악신의 몸뚱이는 화신체라는 범주에서도 한참을 열화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했다. 애당초 이 침공의 기점은은 수십의 악마와 수만의 마물을 소환하는 대규모 의식.
만 단위 북부인의 영혼과 육신 모두를 제물로 바쳤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꽤나 아슬아슬한 게 사실이었다.
쑴은 그 와중에 한술 더 떠서 직접 행차한 것이니만큼, 스스로의 힘을 어마어마하게 깎아낸 채로 강림해야만 했겠지.
[조금만 더 힘을 내거라. 승산이 보이느니라.]
차리나가 시간을 끌면서 놈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제 몸조차 돌보지 않는 정신 나간 공세에 끝내 패배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쑴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있었음은 명백했다.
그 희생을 헛된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친 몸뚱이를 끌고 앞으로 나아간다.
치지지직─!!
수인을 맺고 손을 뻗어낸다. 손끝에서 녹색 벼락 줄기가 악신을 향해 번뜩이며 쏘아졌다.
「천록(穿綠)」
먼젓번에 놈의 갑옷을 관통했던 진록의 섬광.
갑옷이 찢겨나간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갑주의 등 부분을 뚫고 나온다.
[키햐악···!]
비틀거리는 악신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토해지고, 황급히 휘저은 두 손에서 쏟아지는 지옥불의 향연.
쿠르르르──!!
밀려오는 겁화의 파도가 피부를 붉게 달궜으나, 댈런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수인을 쉬지 않고 맺어내며, 다시금 벼락을 모아낼 뿐.
파지지직···!!
녹색 번개가 거듭 쏘아지며 지옥불의 해일을 꿰뚫는다.
푸른 전격의 줄기는 배후를 노리는 핏빛 번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술식갑주를 네 겹으로 두르고 겁화를 버텨내는 사이, 머리 위에서는 뇌전의 바다와 먹구름이 끝없는 자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생사의 기로에 서는 사투.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위에서, 댈런은 뇌해를 다루는 숙련도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걸 느꼈다.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겨야만 했다.
지금의 싸움은 쑴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놈의 군세는 이미 전멸했고, 남은 건 저 영락한 화신체 하나뿐.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약화된 쑴의 세력으로는 수십 년간 이 대륙을 노리지 못할 것이었다.
‘차리나가 스스로의 목숨마저 바친 건, 그 수십 년간 자신의 백성에게 유예를 주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화르르륵···!!
술식갑주를 뚫은 지옥불이 살을 갉아먹는다. 사각을 비집고 들어온 핏빛 번개가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이를 악물고 버텨낸다. 전신에서 하얀 김이 쏟아져나오고, 용혈의 재생력마저 한계에 가까워지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이건 사실상 방어를 도외시한 채, 살을 내어주고 뼈를 꺾어버리겠다는 각오의 공세.
적의 공격에 대처할 시간에 한 줄기의 전격이라도 더 쏘아내며, 뇌해를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지기 위한 사투다.
일말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첨예한 간극 사이에서, 댈런은 광소하는 악신의 입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크히히히! 이런 필사적인 싸움! 너무 좋···크업!]
비죽 웃는 입술을 도끼로 찍어버리고, 성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놈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며 벼락을 터뜨린다.
그 와중에 악신의 손톱이 양쪽 갈비뼈를 뜯어갔지만, 목구멍을 치닫는 비릿함을 억지로 삼키며 공세를 이어간다.
[크켁헤헬!]
턱뼈가 쪼개지고 입술이 잘렸음에도 놈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댈런의 등골마저 서늘하게 할 광인의 모습.
싸움에 미친 신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은 형상이다. 댈런은 성검을 아래에서 위로 길게 그어냈다.
콰직―!
지옥불을 휘감은 손이 성검을 저지했다. 댈런은 무시하고 억지로 검로를 완성해냈다.
하늘 높이 띄워올린 놈을 마무리하기 위해, 손 안에서 빚어지는 노란색 번개의 창.
「뇌창(雷槍)」
댈타리온이 직접 쓰던 것과 비교하면 반도 안 되는 위력이지만, 영락한 악신의 화신체를 마무리하는 데는 충분한 화력이다.
그 순간.
“······!”
[피해라!]
본능적인 육감의 경고가 스쳐 지나가고, 댈런은 기껏 만들어낸 뇌창마저 팽개치고 자리를 옮겼다.
쉬익─
직후 방금까지 서있던 공간을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움켜쥐었다.
쿠드드득!
우그러지는 공간. 자리에 잔흔으로 남아있던 잿빛 그림자가 뒤틀리며 소멸한다.
악신은 그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놈이 중얼거렸다.
[아···깝군. 그래도 재밌···어···흐흐.]
“······.”
피를 줄줄 흘리면서 우물거리는 입술. 그 안쪽에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지옥불이 일렁인다.
용처럼 숨결에서 불을 뿜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스로의 지옥불에 집어삼켜진 것.
[저, 저 미친···! 화신체를 제물로 바치는 건가? 스스로의 격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줄 텐데?]
그 광경을 본 아르보르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무늬만큼은 같은 악마이기에, 본능적으로 눈앞의 상황이 무엇인지 느낀 것이겠지.
“······.”
댈런 역시 저 현상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저건 의식이었다.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바침으로, 지옥문을 열어젖히고 그 너머의 존재를 소환하는 불결한 의식.
만약 방금 전 그 자리에서 피하지 않았다면, 댈런의 몸뚱이도 그 의식에 휘말려 제물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지.’
악신이 스스로의 화신체를 제물 삼아 벌이는 이 의식.
진체의 격마저 깎아내리면서까지 벌이는 기행이, 뭘 의미하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천 년 만이야······. 이대로 끝내기에는···너무 아쉬운 싸움인걸.]
히죽 웃는 입술. 반 토막 난 혀가 뭉개진 입술을 핥는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악신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대의 공간이 한 점을 중심으로 기이하게 휘어지며, 공간을 찢고 균열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옥문···전조의 규모를 보아하니 스스로의 진체를 소환할 생각인가 보구나.]
당황한 걸 넘어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중얼거림.
[아무리 투쟁에 미친 광신이라고 하나, 어떻게 스스로의 격을 깎아먹는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적창의 반응은 이해하지 못할 종류가 아니었다. 쑴의 저 기행을 처음 봤을 때는, 댈런 역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물론 그건 모니터 너머에서의 이야기.
제대로 된 공략법을 완성하기도 이전의 일이다.
오히려 지금 이 싸움에서, 댈런이 기다리고 있던 기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이군.”
후우.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쉬는 한숨.
숨결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손을 들어올린다.
악신을 감싸고 휘두르는 먹구름의 경계를 넘어서서, 손끝은 그 위쪽에서 번뜩이는 뇌전의 바다를 향한다.
쿠르르릉······.
주인의 부름에 오색 빛깔로 소용돌이치던 바다가 응답하고.
「홍색정령(紅色晶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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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에서 떨어진 수백 가닥의 붉은 뇌전이, 악신의 먹구름을 찢어발겼다.
반경 수 킬로미터 일대를 뒤덮은 붉은 뇌전의 향연.
납작하게 눌린 공 모양으로 펼쳐진 뇌전의 그물이, 마치 거대한 감옥처럼 댈런과 악신을 감싸고 외부 공간에서 단절시킨다.
찢어진 입술을 한껏 벌리고 있던 악신은 흩어진 먹구름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던 의식이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
[어, 왜, 어째서 의식이···?]
제물로 바친 화신체가 멀쩡하게 목소리를 뱉는다. 진체를 강림시켜야 할 지옥문 역시 열리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악신의 얼굴. 댈런은 가빠진 숨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포기해라. 여기에 너를 소환하려면 그 너덜너덜해진 몸뚱이 이상의 제물이 필요할 테니까.”
홍색정령(紅色晶囹).
6위계 마법사가 극에 달하는 전격술식으로 만들어낸 오의.
붉은 정광으로 번뜩이는 이 공간은, 외부와 격리된 또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댈타리온이 네게 지독히도 원한을 품었었나 보군.”
[댈타리온? 그게 누구냐!]
“너 죽인 놈.”
댈런은 피식 웃었다.
전격술사의 힘을 흡수하면서, 가장 먼저 집중한 건 그가 어떻게 쑴을 죽였느냐였다.
단서는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영역을 개방한 순간 무슨 일이 펼쳐지는지, 비록 모니터 너머에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무리가 붉은 뇌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거든.”
그리고 수십 년 분량의 깨달음을 파헤친 결과, 전격술사의 붉은 뇌전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붉은 벼락의 폭격을 쏟아내, 악마든 악신이든 재생할 틈조차 주지 않고 소멸시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벼락을 넓게 펼쳐 공간을 격리시키고, 세계 자체를 분리해내는 기예.
댈타리온은 결국 지옥에 직접 쳐들어가 쑴을 죽였기에, 그가 생전에 사용한 번개는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허나 후자를 준비한 걸 보고 댈런은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댈타리온은 너에 대해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대체 무슨 소릴!]
“너는 화신체로 강림해 싸우다가도,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서슴없이 스스로의 화신체를 제물로 바쳐 진체를 불러낸다는 걸 말이야. 스스로의 격이 얼마나 깎이든 신경도 쓰지 않고서.”
지옥문을 열고 그 너머의 존재를 소환하는 의식은, 기본적으로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여는 행위.
두 점 사이를 이어야 할 선분을 긋던 도중에, 갑자기 한 점의 위치를 바꿔버리면 그림은 완성될 수 없는 법이다.
붉은 벼락, 홍색정령의 두 번째 기능은 바로 그걸 노린 파훼 수단이었다.
혹여 이 땅에 쑴이 다시 한 번 강림했을 때, 놈이 진체를 소환하는 걸 막고 도리어 타격을 줄 수 있도록.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겠냐. 너한테 삭제된 캐릭터가 몇 명인데.”
댈런은 피식 웃으며 성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마법사가 어떻게 알았는지는···글쎄다. 나도 못 들어서 궁금한데. 먼저 뒈져서 대신 물어봐 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