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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정령(5)
댈런이 악신을 마주한 회차는 생각보다 많았다.
수백에 달하는 반복과 끝없이 갈라지는 분기들 속에서, 종말의 최후반부에 닿는 방법이 하나뿐인 건 아니었으니까.
영역을 이룬 캐릭터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고, 그 정도의 성취에 닿지 못하더라도 댈런은 여러 모습으로 인류의 마지막 저항에 함께했다.
어찌 됐건 종말의 최후반부에 가까워짐에 따라, 다섯 악신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대륙을 침공하는 건 예정된 수순.
어떤 형태로든 최후까지 버티기만 하면, 악신의 도래와 싸움을 관찰하고 공략을 가다듬는 것쯤이야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다섯 악신 중에도 쑴은 전면에서 치고받는 걸 가장 좋아하는 악신이었지. 그 특성상 놈을 관찰할 기회는 다른 악신들에 비해 몇 배는 더 많았다.’
결과적으로 댈런은 다섯 악신 중 쑴의 패턴과 공략법을 가장 먼저 익히게 됐다.
비록 자신의 캐릭터로 놈과 직접 맞붙은 적은 그리 많지 않지만, 먼발치에서 바라본 건 꽤나 빈번했기 때문.
대표적인 예시로 어떤 회차에서는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가 눈에 띄게 활약한 적이 있었다.
전례 없는 각성과 함께 쑴의 화신체를 단신으로 때려눕힌 외팔의 검성. 그 모습은 한동안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될 정도였지.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연합해 단체로 놈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쟁쟁한 싸움판은 종종 벌어졌다.’
종막으로 치닫는 세상에는 은거기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평소에는 다양한 이유로 힘을 꽁꽁 숨긴 채 살아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적절한 장이 만들어져야만 힘을 내보이던 존재들.
개중에는 극히 드물지만 악신의 영락한 화신체를 상대로 승산을 점쳐볼 만한 초월자도 존재했다.
허나 그렇게 마지막 전투에서 쑴의 화신체를 꺾은 이들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바로 쑴이 자신의 죽어가는 육신을 제물로 바쳐서, 대지옥 파멸궁전에 기거하는 진체를 억지로 소환해낸 것.
“궁지에 몰린 악마도 아니고, 불멸의 상징인 신격이 스스로의 힘을 깎아내면서까지 진체를 강림시킨다···초월자의 상식으로도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지.”
[그걸 어떻게···아니, 그런 싸움은 수천 년 전이 마지막이었어. 역사에 기록도 남지 않았을 텐데?]
“뭔 역사 타령이냐. 캐릭터 여럿 뒈졌다니까.”
기본적으로 강대한 격을 지닌 악마나 악신의 경우, 그 화신체 역시 수준급의 격을 가진 건 당연한 이야기다.
때문에 화신체를 제물로 바치는 게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
다만 세계의 틈을 넘어 진체를 현실에 욱여넣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굳이 그런 대가를 치르고서까지 한 번의 싸움에 존재를 거는 악마나 악신은 없었다.
애당초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악마쯤 되면 자신의 지옥을 소유한 게 당연했고, 수십 년이든 수백 년이든 그 심처에서 힘을 회복하고 다시 침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싸움에 미친 쑴은 거기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예외였다.
놈은 싸움 하나에 꽂혀서 막대한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영락한 화신체로 대륙에 강림하는 존재.
자신의 화신체를 무릎 꿇릴 수 있는 강자와 맞닥뜨렸을 때, 놈이 진체로 강림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은 그게 너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겠지. 싸움과 승리. 그리고 승전에 이은 살륙으로 격을 높이는 것만이.”
실제로 그렇게 이긴 싸움과 이어진 학살 속에서, 쑴은 스스로 내려놓은 것 이상의 힘을 회복하곤 했고.
악마들도 이해하지 못할 그 존재 방식은, 쑴이 그 어떤 악신과 악마들보다 싸움을 탐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번에는 네 뜻대로 안 될 거다.”
치지지지직······!!
공간을 통째로 격리한 번개가 기이한 울음을 토한다.
점점 불안정해져가는 놈의 육신을 응시하며, 댈런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소환 의식의 실패는 언제나 대가가 가혹한 법. 악신이라도 그걸 완전히 피해 가는 건 불가능했다.
불완전한 화신체를 불살라 진체를 불러오려 한 의식이 취소되었으니, 존재 자체가 뒤틀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대지옥이라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장본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 세계에 몸을 들이민 이상 빈틈이 없을 수는 없다.
댈런이 모니터 너머에서 악마들과 악신을 공략해온 여정에, 단순히 힘만으로 몰아붙이는 방법만 존재한 건 아닌 셈이었다.
“네가 직접 진행한 의식이니, 실패의 반동은 화신체만이 아니라 진체에까지 닿겠지. 과연 네가 이번에 입은 타격은 얼마나 될까.”
[······.]
“못해도 앞으로 수십 년, 아니 백 년은 이 대륙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것 없다.”
저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디딘 채, 검을 곧게 세운 댈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다음에 봤을 때는, 내가 직접 파멸궁전의 왕좌 위에서 네 심장에 칼을 꽂아줄 테니까.”
***
피범벅이 된 손톱과 이빨을 앞세우고, 화신체가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아!!]
댈런의 언사에 분개했다기보다는, 그저 탐스러운 장난감을 눈앞에서 빼앗긴 아이의 분노에 가까운 괴성.
뻐어어엉!!
물론 그 손끝에서 일그러지는 힘의 규모는, 단순히 아이의 투정 따위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발끝에서 압축된 공간이 터져나가고, 한 줄기의 핏빛 섬광처럼 변해 날아드는 화신체의 육신.
“후우.”
댈런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검끝을 어깨 위로 끌어올린 채 걸음을 내디뎠다.
홍색정령으로 근방 일대의 격리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뇌해의 힘을 쓸 수 없었다. 가장 날카로운 칼을 적에게 직접 쓸 수 없다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허나 아무리 날카롭게 벼려졌다 해도, 고작 한 자루의 칼에 의존하는 건 종말에 맞서는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패착이다.
그걸 방지하고자 이제껏 수많은 가능성들을 익히고 흡수하면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날붙이의 종류를 늘려온 것 아니었나.
갓 익혀낸 뇌해의 힘으로 이만큼이나 승산을 끌어올린 것만 해도 충분했다.
남은 건 지금까지 걸어오며 쌓은 가능성들의 몫이겠지.
투웅─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쇄도하는 화신체를 향해 번뜩이는 검끝을 찔러낸다.
번뜩이는 백색 섬전과 핏빛으로 이글거리는 붉은 섬광.
붉은 뇌전이 가둔 거대한 감옥 안에서, 두 빛살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수없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투가가가각──!!
내리찍은 성검을 어렵지 않게 흘려낸 악신. 놈의 발끝이 댈런의 목줄기를 노리고 뻗어진다.
허리와 고개를 튕기듯이 젖혀 피하고, 그 회전에 몸을 실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내면서 허리춤의 도끼를 흩뿌린다.
패래래랙!
단순한 날붙이의 투척이 아니다.
지금의 도끼는 심상 너머에서 댈타리온과 싸우다 부서진 유물 도끼가 아니라,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으로 재구축된 물건.
루시아와 쑴은 그 힘을 ‘신성’이라고 했던가. 몇 번이나 눈앞에 나타났던 그 이름 모를 전사의 정체는 그 단어와도 연관이 있겠지.
상념을 흘려보내며 도끼에 의념을 집중한다. 도끼를 던진 손끝에서 회백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순간.
「회명(回冥) : 발화(發火)」
도끼의 날 부분에서 새빨갛게 피어오른 성화의 열기가, 쑴의 화신체를 둘러싼 지옥불과 맞닿으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장대하게 치솟는 폭염. 그 열기를 뚫고 잿빛 그림자들이 짓쳐든다.
「십이연답산(十二聯踏散)」
열두 개로 쪼개진 회백색의 인영은, 댈런의 능력이 마침내 회백의 투사가 품었던 잠력을 온전하게 능가했다는 증거.
하나하나가 본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육체능력을 담은 그릇이자 허상이다.
댈런의 본신이 뒤로 훌쩍 물러나는 사이, 남은 열한 개의 인영이 각자 손발을 뻗어내 악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휘둘러지는 건 맨손과 맨발뿐. 허나 권격 한 번에 담긴 위력은 건물도 너끈히 무너뜨리고 남을 수준이다.
악신의 갑주를 수백 번 두드리는 폭풍 같은 무투의 정수. 그 여파에 장대하게 펼쳐졌던 폭염마저 순식간에 휘말려 흩어진다.
잿빛 인영 중 서넛은 뒤로 물러서며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마력이 요동하며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술식을 펼쳐냈다.
잿빛 인영이 단순한 육체능력만을 모방하던 걸 벗어나, 본신의 기술까지 어느 정도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된 것.
「빙정 : 개화(開花)」
「청파랍(淸波拉)」
머리 위에서 피어난 눈꽃이, 수백 개의 꽃잎으로 흩어지며 얼음의 폭풍을 쏟아붓고.
「홍염주(紅炎柱)」
「삼력거반(三力擧反)」
발 아래에서 터져나오는 세 줄기의 불기둥이 하나로 엮인 채, 삼중의 나선을 그려내며 대기를 뒤집어 뿌리친다.
쿠과과과과······!
두 색채가 악신을 중심으로 충돌한다. 열기와 냉기가 화신체를 휘어잡은 채 터져나오는 어마어마한 폭발.
강대한 두 고유술식의 충돌에 대기가 회오리치며 붕괴하고.
회백색 음영과 함께 그 사이를 넘나드는 잿빛 인영들이, 화신체의 빈틈을 노리며 끝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쑴의 화신체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의식의 실패로 존재 자체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손을 뻗어 그림자를 하나씩 붙잡기 시작한 것.
[크르르르!]
우드득!
붙잡힌 그림자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만신창이가 된 화신체는 붉은 눈을 부릅뜬 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가히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종말의 짐승이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모습. 그 시선이 본능적으로 다음 사냥감을 쫓았다.
콰직!
또 하나의 그림자가 가슴팍이 꿰뚫린다. 화신체의 이빨이 그림자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몸통에서 찢겨나가 잿빛 연기로 흩어지는 머리통. 댈런은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영락하고 넝마가 된 악신의 화신체라고 하나, 그럼에도 그 위격은 필멸을 아득히 넘어선다.
때문에 원래 놈을 찌르려던 칼인 뇌해의 힘이 묶인 지금, 댈런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주문으로 화신체를 몰아세우고 있지만, 놈의 목숨을 끊을 결정적인 타격은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단순히 술식의 위력이나 무투술의 기예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악신이라는 존재는 그 화신체마저도 신비 그 자체이기에 벌어지는 일.
오직 신비만이 신비를 소멸할 수 있다. 오래 전 영락한 청린의 목을 떨어뜨린 일격 역시 검붉은 용의 피에서 비롯된 검격이었다.
쑴의 화신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영역의 힘을 하나 더 끌어내야겠지.
다만 뇌해의 힘을 잔뜩 끌어다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영역을 개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
머리가 울렁거리고 속이 뒤틀린다.
소모된 체력과 깎여나간 심력, 그 악조건 속에서도 의지를 그러모아 세상에 덧씌운다.
후우.
심상 너머의 영역에 흩어진 수많은 풍경들.
그중에서 어떤 걸 불러낼 것인지는 이미 한참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후···으으······.
숨소리가 이지러진다.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는다기보다, 거친 숨을 여과 없이 내뱉는 짐승의 숨결에 가깝다.
새긴 적 없는 백색의 문신이 피투성이가 된 전신에서 서서히 빛을 드러내고.
오색으로 천연하던 검은 눈동자 위에, 회백색 음영이 짙게 드리워졌다.
[주, 주인님?]
[댈런···괜찮느냐?]
여지껏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모습에 아르보르와 적창이 걱정의 말을 건넸지만, 귓등으로 흘리며 걸음을 내디딘다.
지금 댈런의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하나뿐.
‘산봉우리를 날려버린 내 마지막 일격마저도, 쑴의 갑옷에 고작 흠집을 내는 데 그쳤거늘!’
오래 전, 종말을 막는 데 실패한 남자의 회한 가득한 외침을 되새기며.
‘하물며 나 하나도 손쉽게 쓰러뜨리지 못하는 네가 다섯 악신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달성해보이기 위해, 말아쥔 주먹을 한껏 끌어당긴다.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발밑에서 흘러나오는 회백색의 파문.
수십 가지 술식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창공 너머로, 배경을 갈아 끼우듯 회백색의 음영이 퍼져나간다.
이건 증명이며, 동시에 속죄였다.
‘너에게···맡겨 보겠다.’
손에 쥔 마지막 의지를 넘긴 투사를 향한 예우이자, 어쩌면 스스로가 빚은 비극일지도 모르는 그 인생에 바치는 뒤늦은 헌화이기도 했다.
공간을 짓씹고 으스러뜨리던 무투가의 가슴에 서린 회한. 위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스러진 초월자의 의지를 계승한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을 뒤로.
자세는 동일하게. 당긴 주먹에서 공간이 비틀리며 주변 정경이 휘어진다.
[크아아아아!]
콰직!
마지막 그림자를 처치한 악신의 화신체가 포효했다. 놈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붉은 눈에 비친 새하얀 전사의 모습.
그 상 위로 어떠한 감정이 덧씌워지기도 전에, 당긴 주먹을 내뻗는다.
「회력파주(灰力破柱)」
창공을 덧칠한 잿빛이 파도가 된다.
붉은 뇌전으로 격리된 세계를 찢는 해일.
산봉오리를 날린 전사의 일격은, 계승자의 손에서 세계 자체를 날린 권격이 되었고.
[이······!]
━━━━━━━━!
마침내 악신의 모습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