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97화 (19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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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의 우물(1)

휘이이······.

나부끼는 눈발이 시야를 수놓는다. 평소보다 더 거친 듯한 눈보라였다.

사냥감 해체용 탁자 위에 쌓여가는 눈. 가죽 건조대 위쪽에 매달린 고드름.

뽀드득.

가죽신에 밟힌 눈밭은 기분 좋은 뽀득거림을 흘린다. 댈런은 익숙해진 집기들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꺾었다.

설산 위를 뒤덮은 검붉은 먹구름은 언제나와 같았다. 불과 번개를 간간이 내뿜고 꿈틀거리며, 나직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흘리는 모습.

다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먹구름 너머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오색의 뇌광이겠지.

그 기이한 정경을 올려다보던 댈런은 습관처럼 턱을 긁적였다.

“······꿈인가.”

분명 명상 중은 아니었고, 아마 마지막 순간에는 여관 침대에서 눈을 붙였던 것 같은데.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댈런은, 잠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봤다.

북부 전쟁은 차르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에클라힘의 삼중 성벽은 수만의 마물과 그 배나 되는 야만인의 공세에도 끝까지 견뎌냈고, 침공의 주역인 악마들은 성기사단과 초월자들의 활약으로 대륙에서 퇴출되었다.

영웅들은 사투 끝에 천공요새를 떨어뜨린 두 대악마를 쓰러뜨렸고, 전투의 말미에 직접 강림한 쑴의 화신체 역시 소멸.

비록 안타까운 희생으로 점철된 피투성이 승리이기는 했으나, 어찌 됐건 승리는 승리였다.

안타까운 희생이라는 단어 자체가, 승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임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 뒤로 나흘이 지났지.’

나흘.

전쟁의 참상을 완전히 재건하는 건 불가능한 시간이지만, 당장의 어수선함 정도를 수습하기는 충분한 여유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차르국 왕실은 도시에 구호 물자를 산더미로 풀어놓았다. 자연스레 도시 곳곳에서는 승전을 기념하는 소소한 축제가 열렸다.

사람들이 싸움에 지친 피로감을 술과 왁자함으로 잊어가는 동안, 철혈군대와 유가족들은 전장에 널린 유해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장례는 승전의 기쁨을 충분히 즐긴 뒤, 전쟁이 끝난 지 일주일째인 사흘 뒤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슬슬 방에서 나갈 때가 되긴 했군.”

댈런은 그 모든 걸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든 전투의 여파는, 용혈이 흐르는 육신에도 상당한 타격을 줬기 때문.

결과적으로 그는 침대에서 나흘을 보내며 푹 쉬었다.

창밖에서 승전의 기쁨과 가족을 잃은 슬픔, 무너진 삶의 터전을 향한 절규와 재건에 대한 희망이 뒤섞이는 걸 들으면서.

“······쯧.”

그 모든 게 내일의 햇빛을 바라볼 수 있음이 확실하기에 느낄 수 있는 사치임을 알면서도.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목구멍에 울렁이는 건 기분 탓일까.

미궁도시 하수도에서 괴인이 남긴 속죄의 무덤들을 발견한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댈런은 까끌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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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40

[근력 : 56] [기량 : 51] [체력 : 46]

[감각 : 50] [지능 : 54] [마력 : 54]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카스마의 붉은 바람(B)

*고유 스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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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40에 도달한 레벨. 스물이 넘는 스킬과 동수에 달하는 고유 스킬.

원래보다 몇 배나 길이를 더한 상태창은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온 가능성들의 증명이었고, 대부분이 50대에 접어든 능력치는 그 가능성들을 꽃피울 잠재력의 기반이었다.

단단한 근육은 성문조차 어렵지 않게 우그러뜨릴 수 있었다. 질긴 피부는 고위 마물의 가죽만큼 튼튼하다 해도 무방했다.

섬세한 감각과 무리를 인식하는 기량은 처음 보는 무의 투로마저도 전부 꿰뚫을 정도.

지능과 마력 수치가 품은 잠력 역시 어지간한 술식들의 근원을 파헤치는 것은 물론, 그 자리에서 재현하는 것까지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수도에서 괴인을 동강내고, 프로그맨 무리와 사투를 벌이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능감.

6위계라는 아득한 경지는 그런 전능감을 품고서야 닿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마저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조차 아닌, 그 문턱에 막 발끝을 올린 정도.

‘영역의 전면을 완전하게 개방할 수 있고, 신비를 자신만의 것으로 뒤틀 수 있는 존재가 닿는 곳.’

5위계 초월자의 경계가 그러하듯, 6위계 역시 단순한 무력으로 판가름되는 경지가 아니다.

쌈박질 잘하는 순서로 따지는 거라면, 댈런은 이미 6위계의 반열에 반쯤 끼었다 해도 무방했으니까.

애당초 댈런이 가진 영역이라는 그릇의 넓이와 그 안에 품은 정경의 풍성함은, 6위계의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정경이 품은 가능성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품은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편린을 움켜쥐고, 이 모든 정경으로 하여금 그곳을 바라보게 만들어야지.”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생각을 예리하게 끊고 들어온 첨언.

“역사 이래로 전지의 조각에 닿은 5위계 초월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걸 움켜쥘 용기를 가진 이들은 한 줌뿐이었어.”

댈런은 턱을 쓰다듬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전사는 눈이 한가득 쌓인 해체용 탁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허리춤에 달린 도끼. 등에 멘 커다란 검.

털가죽 외투는 여러 번 헤지고 기운 티가 역력했지만, 그 안쪽에 비치는 근육질의 몸은 그 어떤 갑옷도 따라올 수 없는 단단함을 내보인다.

서리고원 너머의 북부 출신들이 으레 그렇듯, 전사의 얼굴 역시 선이 굵고 거친 인상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가끔은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둘 필요도 있는 법이다.”

어떤 위압감 때문일까. 댈런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었다.

손끝에서 으레 만져지던 금속의 감촉은 없었다.

금강궁으로부터 받은 유물 손도끼는 댈타리온과의 싸움에서 부서졌고, 전격으로 빚어진 백색 도끼 역시 악신과의 전투가 끝난 뒤 스르르 흩어졌기 때문.

“······.”

자연스레 손가락을 허리띠에 꽂아넣으며, 댈런은 전사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눈앞의 전사를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하이 오크 대선조의 무덤 앞에서 한 번, 댈타리온의 힘을 흡수하고 쑴의 화신체와 싸울 때 한 번.

그리고 모든 싸움이 끝난 지금. 댈런은 저 전사가 지금껏 품어온 수많은 질문들에 대답해줄 수 있는 존재임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하이 오크들의 대선조시오?”

***

쿠궁― 쿠르르릉······.

하늘이 나직하게 울었다.

검붉은 먹구름의 포효에 그 너머 뇌해의 메아리가 아스라이 뒤섞였다.

사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미동도 없는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질 즈음,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의 격은 처음에 비해 많이 높아졌다. 이제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지.”

선 굵은 얼굴에 만들어지는 부드러운 미소. 댈런은 그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치 유흥가 뒷골목의 깍두기가 사람 좋은 웃음 지어보이는 듯한 모습. 무심코 피식 웃는 그 앞에서 사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이다.”

“그게 뭔 소리요?”

“무지는 때로 축복인 법이다. 광증에 시달리는 선각자들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니야. 내가 오늘 찾아온 건 네 궁금증을 해갈해주기 위함이 아니니,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뤄두도록 하지.”

말 한 번 어렵게 하네. 그러면 또 남의 꿈속에 멋대로 들어오겠다는 건가?

“단잠을 방해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였느니라.”

시발, 생각도 읽어? 댈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이나 해 보시오.”

“그녀와는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 그녀가 너를 보고 싶어한단다.”

“그녀? 누구?”

“직접 보거라.”

끼익.

사내가 탁자에서 일어섰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키가 더 컸다.

이 미터쯤 되어 보이던 키는 자신보다 머리 반 개 정도가 더 커 보였다. 떡 벌어진 어깨도 조금 더 넓고, 팔뚝의 굵기 역시 마찬가지.

“원래라면 그녀를 보러 가기 위해 꽤 먼 길을 여행해야 하지. 하지만 집 나간 친구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구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은 느릿하면서도 호흡을 끊고 들어오는지라, 댈런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한 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댈런의 어깨 위쪽, 허공을 찢고 들어가 무언가를 끌고 나오는 손길.

[끄엑! 켁!]

사내의 손에 들린 건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였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악마를 잡은 채 휘휘 돌려보며 말했다.

“쯧쯧···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는지. 꺼진 아궁이에 집어넣은 떡덩이 같구나.”

[그쪽은 뉘신데 남의 외모를 가지고···.]

“이 친구가 잠에서 깨기 전에 함께 우물로 가야 하니, 네 힘을 조금만 일깨우겠다.”

[그게게게겍!]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선 아르보르를 두 손으로 잡고 한껏 당겼다. 비명을 지르면서 죽죽 늘어나는 악마의 모습.

댈런은 약간 당황한 동시에, 그렇게 늘어나는 악마에게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저거 저렇게까지도 늘어나는 거였군. 좀 더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겠는데.

[쿠엑!]

사내는 악마를 적당한 길이로 늘인 뒤, 떡덩이를 매치듯 바닥에 반복해서 내리쳤다.

[켁!]

그리고 곧이어 악마를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기 시작했다.

쿠궁― 콰르르르르!!

화염이 들끓는 화산지대.

후우우웅······!

황무지에 한가득 불어오는 모래폭풍.

깊은 바닷속의 신전을 지나 구름 위를 표류하는 범선의 갑판 위를 밟고, 고대 드워프의 유적지처럼 보이는 지하 세계를 건너 거대한 벌레들이 도사리는 정글을 통과한다.

처음의 설산은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정경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거쳐가고 있는 이 정경들이, 누군가의 심상 너머에 맺힌 풍경이라는 것 역시도.

“별나무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지.”

[꾸웩!]

악마를 쉬지 않고 내려치면서, 사내가 말했다.

“한때 그 가지는 모든 시간선과 세계에 닿아있었다. 이제는 그 밑동만 남아 우물 곁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지만···.”

[끄악!]

“잘려나간 줄기가 네 덕분에 권세를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니, 이 시간선에 자리잡은 우물을 찾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끽!]

“생긴 것과 달리 굉장히 주문쟁이스러우시군. 손에서 불덩이나 벼락은 안 나가시오?”

“이제 와서 스스로를 소개하는 건가? 걱정 말도록. 난 처음부터 네가 주문에 능통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

썩을. 한 마디를 안 지네. 댈런은 괜히 부서진 도끼가 아쉬웠다.

그는 허리띠에 걸린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리고 그즈음 휙휙 지나가던 풍경이 딱 멈췄다.

“도착이다.”

사내는 반쯤 실신한 악마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는 원래의 작은 떡덩이 형태를 되찾은 악마를 툭 던져주었다.

댈런은 불사의 악마가 살아있는지 확인한 뒤, 의식을 잃은 놈을 아공간에 넣어두고 사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장소는 숲속의 작은 유적지였다.

오래된 돌담은 이끼로 뒤덮여 있고, 발 아래의 판석은 깨지고 닳아 매끈함으로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낮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난 숲속. 담벼락을 내리쬐는 햇살은 따스했다.

돌담을 끼고 사내를 따라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느 순간 발밑의 판석이 촘촘해지더니, 담벼락이 좌우로 뻗어나가며 탁 트인 공간을 선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담벼락에 둘러싸인 작은 정원. 그 안쪽에서 순백의 예복을 입은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아니, 당신 입장에서는 오랜만은 아닐 수도 있겠군요. 이곳의 시간은 조금 다르게 흘러서···몇 달 만에 보는 것 같네요.”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오똑한 콧날이 눈에 띄는 얼굴과 반짝이는 청백색의 눈동자.

빨려들어갈 것 같은 마력을 품었던 눈은, 이제 시골 소녀의 눈처럼 순수한 빛깔이었다.

댈런은 그 눈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가까스로 시선을 마주치다가, 먼 허공을 바라보며 흩어지던 초점.

“···차리나.”

이제는 멀쩡한 두 눈이 싱긋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 선택이 옳았는지 보고 싶었어요, 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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