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99화 (199/288)

199

성전(1)

북부 대륙의 심장이라 불리는 왕도 에클라힘. 그 심장을 뛰게 만드는 모든 힘의 근원지인 에클라힘 궁전.

널찍한 궁전 복도는 서늘하리만치 인적이 없었다.

궁전의 경비병들만이 최대한 기척을 지운 채, 수많은 갈림길로 이어지는 통로들 곁을 지키고 있었을 뿐.

뚜벅. 뚜벅.

댈런과 펠버, 두 사람의 발소리는 텅 빈 복도를 여과 없이 메이리쳤다. 몇 번이나 방향을 꺾고, 얼마나 많은 계단을 내려갔을까.

두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순은과 푸른 보석들로 장식된 낮은 문 앞이었다.

“···그분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문을 지키던 경비대장이 말했다. 펠버는 로브의 소맷자락을 휘휘 내저었다.

“상관 없네. 우린 그 친구를 데리러 온 것이니.”

“하지만 그분께서···.”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를 왕의 조상 때문에, 기어코 이 늙은이와 척을 지고야 말 겐가?”

가볍게 흉갑을 툭툭 건드리는 펠버의 지팡이.

투구 틈 사이로 경비대장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반대로 판금을 둘둘 두른 장대한 육신은 뻗뻗하게 굳은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며칠 전 벌어졌던 전투의 생존자인 바. 눈앞의 마법사가 이번 전투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

수백 명의 용병 마법사가 중구난방으로 쏘아대는 술식들을, 왕실 마법사단의 합동 주문에 꿇리지 않을 수준의 포격으로 전환시킨 존재다.

세간의 소문에 의하면 어느 순간 성벽에서 자취를 감췄던 게, 다른 영웅들과 함께 두 대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었지.

물론 그 역시 경비대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마법사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적어도 눈앞의 마법사는 그의 역량을 벗어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설령 이 마법사까지는 어떻게 상대한다 쳐도, 아까부터 그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전사는···.

“······.”

투구의 좁은 시야 너머, 전사의 검은 눈이 이쪽을 바라본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동공. 시선이 교차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무력감이 온몸에 끼얹어진다.

“으윽···!”

경비대장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갈 뻔했다. 입술을 짓씹고서야 충동을 참아낸 그가 몇 걸음 물러섰다.

꿀꺽.

고요한 복도에서는 유독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경비대장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열어드려라.”

“예? 하지만···.”

“차리나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특명으로 국빈의 지위를 하사하셨던 분들이다. 적어도 다음 차르께서 그 결정을 번복하시기 전까지는, 서릿발 왕좌의 전당을 지키는 왕실 수호대라도 이분들의 출입을 막을 순 없어.”

경비대장이 눈을 부릅뜨고 명령했다. 부하들은 어리둥절한 채 좌우 벽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초월자라 불리는 괴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궁전의 심처를 지키는 그들의 대장은 초인이라 칭해지고도 남을 수준의 실력자다.

그런 대장이 저토록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상대는 대체 어떤 경지에 닿아있는 존재란 말인가.

안 그래도 며칠 전 항거할 수 없는 악신의 공포를 맛본 병사들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욱 빠르게 병사들의 심중을 파고들었다.

점점 의문과 호기심 대신 두려움으로 물들어가는 시선을 뒤로 한 채, 댈런과 펠버는 병사들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짓을 한 겐가?”

“무슨 짓 안 했소. 자꾸 노인장을 째려보길래, 그냥 나도 좀 노려봤지.”

“끌끌, 반신의 위계를 코앞에 두고서도 짖궂은 버릇은 어디 안 갔구만.”

“글쎄. 남을 노려보면 자기도 노려봄 당할 각오를 한 거 아니겠소.”

펠버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문 안쪽은 서릿발 왕좌가 있던 전당과 비슷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동사할 수준의 냉기. 숨결이 새하얗게 얼다 못해 입 안까지 서리가 내려앉는 것만 같다.

서릿발 전당과의 차이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설원 대신, 벽과 천장의 경계가 뚜렷하다는 점뿐.

그 냉기의 근원은 차리나가 들고 휘두르던 왕홀이었다.

그리고 차리나의 시신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커다란 방 한가운데 꼿꼿하게 세워진 왕홀 앞에 누워있었다.

“비요른.”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은 그 곁에 주저앉아 있었다.

펠버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비요른, 내 친구여. 댈런이 일어났네.”

“······.”

“차리나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 아닌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일어나서 좀 들어보기라도 하게나.”

···무슨 이야기?

사전에 상의되지 않은 말에 댈런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난쟁이가 무겁게 고개를 돌렸다.

“···댈런.”

수염투성이 얼굴은 초췌했다.

몇 줄기로 흘러내린 눈물자국은 마르기도 전에 얼어붙어 있었고, 숨결은 얼어붙다못해 수염에 고드름을 줄줄 매달았다.

며칠 동안 꽁꽁 얼어버린 수염과 머리칼의 끝부분이, 작은 움직임에도 투둑 바스라져 떨어졌다.

드워프답지 않게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편인 그였다.

평소 같으면 이런 극한의 냉기는커녕, 대륙 북부의 흔한 눈보라에도 수염을 부르르 떨던 난쟁이.

비요른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타샤를 닮았네.”

파스슥.

수염 몇 가닥이 다시금 바스라진다. 그는 우묵한 눈으로 차리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왕홀의 힘으로 완전히 얼어붙은 탓일까. 차리나의 시신은 방금 숨을 거둔 듯 생생해 보였다.

넝마가 되었던 몸의 혈흔을 닦아내고, 악신에게 상한 부분들이 흉해 보이지 않도록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로 가린 모습.

얼굴 절반을 뒤덮은 은빛 가면은 생전의 얼굴을 본따 만들었기에, 나머지 절반의 얼굴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졌다.

며칠 전 벌어진 격렬한 사투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차분한 모습.

댈런은 한동안 그 얼굴을 함께 지켜보다가 말했다.

“차리나는 그쪽을 증조부라 불렀었지.”

“맞네. 타샤는 이 아이의 어미의 조모였어. 차리나라는 드높은 신분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산골짜기 동굴에서 원석이나 캐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말로 아름다운······.”

뚝. 뚝.

다시금 흘러내리는 눈물.

얼어붙은 자국 위로 흘러내린 슬픔이, 딱딱하게 굳은 수염에 맺혀 고드름을 덧씌운다.

댈런은 말없이 그 슬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릿발 왕좌의 전당에서 나눴던 짧은 담소와, 차리나의 두 팔에 새겨진 룬 문자는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게임에서도 베일에 싸여있었던 비요른 칼라드라쿰의 정체는, 설정상으로만 등장하던 이름 모를 난쟁이 왕조의 후손이자 현 차리나의 조상이기도 했던 것.

드넓은 대륙에서도 단 두 국가만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화약 기술을,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빼왔나 했더니 이런 배경이 있었던 건가.

비탄에 잠긴 난쟁이는 그동안 숨겨왔던 모든 비밀을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나와 타샤는 한때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었다네. 그녀는 내 연구를 열렬히 지지해주었지. 왕위를 내려놓으며 동족을 한 번 버린 내가, 나를 받아준 가족을 또다시 떠날 때에도···그녀는 내 선택을 응원해줬어.”

“······.”

“언젠가 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려나. 연구라는 핑계로 외면을 거듭하는 사이, 한 세기가 넘도록 세월이 흘러가버렸다네. 그녀와 꼭 닮은 이 아이에게···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축축하게 떨리는 말끝.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한동안 어깨를 잘게 떨던 난쟁이는, 문득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댈런.”

그가 말했다.

“악신 놈들을 죽일 건가?”

“그렇소.”

대답은 망설임 없었다.

“만일 놈들이 자네를 이기지 못해 지옥에 숨어든다면?”

“그럼 그 지옥을 무너뜨려서라도 죽여야지. 마지막 하나까지.”

“그래, 마지막 하나까지···그렇단 말이지······.”

후우.

천천히 내쉬는 깊은 숨결.

얼어붙은 수염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매캐한 탄내가 방 안에 퍼져나간다.

비요른은 무릎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리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두 손은 자네의 것이네.”

난쟁이의 어깨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발밑에서 시작된 흑색의 파동이, 잔잔하게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을 뿐.

***

왕도 에클라힘에 승전의 나팔소리가 울린 지 열흘.

축제의 열기를 뒤로 하고, 도시의 거리마다 애곡하는 소리를 넘치게 한 장례식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일행은 성기사단 북대륙 지부의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빌려 모였다.

전쟁이 끝난 뒤로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 그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처리할 업무들이 산더미였던 탓이다.

“괜찮으시오?”

“···예, 댈런. 저는 멀쩡합니다.”

댈런의 물음에 루시아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눈 아래 가득 드리워진 그림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는 감출 수 없는 피로에 절어있고, 좀처럼 윤기를 잃지 않던 금발마저 살짝 푸석해진 듯했으니까.

지난 열흘간 모두가 나름의 이유로 바쁜 시간을 보냈겠지만, 루시아는 그중 누구보다도 정신없는 나날을 겪어온 탓이다.

“심문관께서 수고가 많았지. 이번 전쟁으로 파멸궁전의 세력 판도 자체를 다시 그려내야 했을 테니, 직접 써올릴 보고서만 해도 수백 장은 넘어갔을 걸세.”

차향을 음미하던 펠버가 말했다.

“서거한 차리나와의 약속대로 북대륙 지부 확장의 초안도 잡아야 했고, 거기에다 마물 사체를 처리하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일까지. 파견되어 올라온 고위 기사들이 전부 전투에서 신의 곁으로 돌아갔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을 게야.”

“···탑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정말 과로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끌끌끌, 이 늙은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시나.”

펠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테이블의 분위기가 푸근하게 누그러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흘간 해온 일들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북부에 세워질 성기사단의 두 번째 본부. 용병 마법사들의 독자적인 마탑 창설 진행도. 차르국 왕실과 하이 오크 대족장이 맺은 협약. 차르국의 최첨단 화약병단 전력화 계획까지.

고급 정보들이 마치 잡담처럼 오가는 사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위로 역시 빠지지 않는다.

지난 열흘간 쌓아둔 회포를 뒤늦게나마 어느 정도 풀어냈을 즈음, 펠버가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래서···댈런, 앞으로 우리의 여정은 어떻게 되나?”

“솔직하게 말하지.”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 댈런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

“역천의 우물이 한 예언이고 나발이고, 운명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

“나는 다섯 악신을 모조리 죽일 거요.”

짤막한 선언을 기점으로 테이블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결코 가볍다고는 할 수 없는 무게였다.

찻물을 단숨에 들이킨 댈런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가 말했다.

“아주 위험할 거요. 강요하지 않겠소. 따라올지 말지는 각자 판단하시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