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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상(1)
“벌써 떠나다니 아쉽다, 칭구!”
성문을 쩌렁쩌렁 울리는 요란한 성량.
“싸움 끝나고 같이 밥도 한 끼 못 먹었지 않나!”
거대한 녹색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까지 그렁거리는 큼직한 눈동자.
“그래서 준비했다! 우리 고블린들이 손수 만든 마수 육포다! 맛있는 놈들로만 골라서 준비했다! 아끼지 말고 먹어라!”
쿠웅!
하이 오크의 대족장 타룸은 그렇게 소리치며 수레 위에 큼직한 포대 하나를 얹었다. 안 그래도 짐을 한가득 실은 수레가 순간 크게 출렁거렸다.
“이거 바퀴가 내려앉은 것 같은데···.”
“수레가 없으면 등에 짊어지고 가면 된다!”
“······.”
“아직 머리가 안 좋구나! 괜찮다! 밥이랑 꼬기 많이 챙겨 먹어라!”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난쟁이의 등을 두드리는 하이 오크.
폭약 주머니로 손을 뻗는 비요른을 얼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댈런은 흐뭇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타룸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 전쟁, 도와줘서 고마웠다.”
“아니다! 하이 오크야말로 너에게 감사한다!”
타룸은 댈런의 손을 맞잡고 당겨 와락 끌어안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흉곽이 으스러졌을 우악스런 포옹 이후, 그는 그동안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수호자를 잃은 우리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니 무너진 인간 부락들이 있더군. 진한 싸움의 냄새를 맡았다.”
타룸이 말한 인간 부락은 쑴의 선발대가 무너뜨린 방어선의 요새들이었다.
하이 오크들이 세계의 이빨 산맥에서 한참 떨어진 왕도 에클라힘까지 오게 된 게, 사실은 그저 초토화된 방어선을 따라온 결과였던 것.
밥과 싸움에 미친 하이 오크의 본성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다만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점은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달려왔냐는 것이었다.
“우리 고블린들 손재주 좋다! 썰매라는 걸 만들어서 하얀 늑대들한테 끌게 만들었다.”
“···그랬군.”
“썰매가 있으니 밥도 많이 실을 수 있었다. 하얀 늑대들이 자꾸 죽긴 했지만, 죽은 늑대에게서 꼬기를 얻고 새 늑대를 잡아 오면 됐다! 하얀 늑대는 버릴 게 없다!”
중세 몽골 유목민들이 자신들이 키우는 말을 저렇게 칭송했다지.
이 세상이 앞으로도 건재하다는 가정하에, 어쩌면 먼 미래 북대륙의 패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이 오크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건 야생의 재료들로 진수성찬을 만들어내던 고블린들의 손재주 덕에, 하이 오크들은 전에 없던 기동성을 얻게 됐다.
더불어 그로 말미암은 이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번 전쟁의 승패 역시 완전히 뒤바뀌었겠지.
하이 오크들의 지원 덕분에 펠버와 루시아가 댈런을 지원할 여력이 생겼고, 두 대악마의 협공을 무사히 받아넘길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동안의 선택이···다행히 틀리지 않았군.’
댈런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더없이 아슬아슬하게 거머쥔 승리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일신의 무력만을 추구했다면, 이미 이 좁은 길 위에서 몇 번이고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쳤겠지.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앞으로 남은 여정 역시 위태롭기 그지없는 외줄타기나 다름없다는 진실이 뒷목을 서늘하게 만든다.
고개를 털어 상념을 흩어버리는 댈런 앞에서, 타룸은 착 가라앉은 음색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래 산맥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 덕분에 고향을 등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타룸의 검은 눈동자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이 오크의 족장인 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댈런과 비슷한 심정이기 때문이겠지.
다가오는 멸망 앞. 각자의 외줄 위를 걷고 있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타룸의 경우 그 곡예에 걸린 건 본인의 목숨만이 아닌, 종족의 운명까지 포함되어 있을 터.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번에 담지 마라, 타룸.”
“알겠다.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대족장의 여정은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다. 댈런이 보기에 앞으로의 미래 역시 그리 어둡지 않았고.
두 배쯤 덩치가 큰 이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리로 도시 주민들 사이에는 하이 오크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듣기로 하이 오크와 고블린들은 한동안 에클라힘과 요새들의 재건을 도와주며 자리를 잡을 예정이라지.
북부에서 가장 큰 나라의 문명 속에 섞여든 이상, 가죽을 벗겨다 파는 제국 상인들의 마수에서도 한동안은 자유로웠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타룸은, 이내 커다란 주먹을 꽉 말아쥐고서 몸을 돌렸다.
“···하이 오크는 자유롭게 싸운다. 이제야 대선조가 남긴 말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말을 끝으로 흰 문신투성이의 녹색 거인은 천천히 멀어져갔다. 댈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말에 올라탔다.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북부의 전선은 반쯤 초토화됐지만, 후방에 있던 도로 등의 기반시설은 여전히 멀쩡했다.
전쟁이 끝난 뒤 철혈군대는 빠르게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지키고 보수하기 시작했다.
에클라힘에서 빠져나온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마물의 위협을 피해 빠르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댈런과 일행은 한 시간에도 몇 번씩 피난민 행렬과 마주쳤다.
그 숫자는 원래 에클라힘에 살았던 주민들보다도 많을 정도.
‘일자리를 바라고 떠난 사람들이겠지.’
반파된 도시를 재건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한 법이고, 필연적으로 다량의 금화와 은화가 유통되기 마련.
악신의 침공을 격퇴한 도시는 빠르게 재건될 듯했다. 만약 대륙이 앞으로도 멀쩡하다면, 이전보다도 더 밝게 빛나게 되리라.
다그닥. 다그닥.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판석 대로 위.
군마 여덟 마리와 조랑말 두 마리는 각기 사람과 난쟁이, 용을 태우고 적당한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짐수레 두 대에는, 일행의 보급품과 더불어 미궁도시의 금강궁에 건넬 차르국의 답례품이 실려있었다.
펠버는 그 수레를 슬쩍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에잉, 쯧. 마지막이 다가오는 와중에 정치적 답례품이나 주고받고 있다니. 왕도가 박살나기 직전까지 몰려놓고 팔자도 좋지.”
“그래도 스승님의 대외적인 신분은 엘가이아의 마탑주시잖습니까. 탑주라는 최중요 전력을 아끼지 않고 내어줬는데 입 싹 닫아버리면, 마탑과 팔시온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거라 생각합니다.”
“토미. 내가 마탑에 아직 적을 둔 건 말이다. 지난 삼십 년간 연구실에 틀어박힌 골방 늙은이들이, 그동안 함께한 정이네 뭐네 하면서 지겹도록 빌미로 들러붙기에 수락한 것뿐이다.”
“아하하,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골방 늙은이들이 직접 뛴 것도 아닌데 무슨 보답이란 말이냐! 그럴 돈 있으면 우리들이나 용병 마법사 양반들 보수나 올려주던가.”
외부에서는 한없이 진중한 대마법사라도, 제자에게는 여지없이 골치 아픈 스승이 되곤 하는 건가.
대화가 많은 돈독한 사제지간을 보며 댈런은 낮게 웃었다.
‘금강궁의 초월자 양반들도 애가 타긴 했던 모양이지.’
금강궁의 심처에 기거하는 초월자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존재들.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번 전쟁을 두고 도시 연합은 차르국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했다고 한다.
무기와 식량, 자재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물자 지원. 용병 마법사들을 포함한 대규모 용병 거래 주선, 등등.
그밖에도 상당한 규모의 유무형적 지원이 있었기에, 차르국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 체면이 서는 상황이었다.
일행에 차르국의 사절 두 명이 동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고.
“겉으로는 평범한 행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금은보화를 싣고 가는 초인들의 집단이라···흐흐흐, 이게 낭만이지.”
“크레이그, 적당히 좀 하게. 그렇게 낭만 외치다가 이번에도 골로 갈 뻔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 일행은 겉보기에도 절대 평범한 행인이 아닐세.”
“지금 내 낭만에 훼방을 놓는 건가? 동기인 자네만큼은 나를 알아주리라 믿었는데···!”
별 것도 아닌 이유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남자는, 특무대의 집행관인 크레이그와 로만.
차르국의 변방 마을에서 만난 요원이었던 크레이그와, 미궁의 의뢰에 함께했던 로만은 모두 북부 전선에서 일행과 안면을 텄었다.
어찌 됐건 도시 연합의 지원에 대한 차르국의 답례품 운송은, 전쟁 이후 일행이 맡게 된 첫 의뢰였다.
어차피 일행의 목적지 역시 시에나가 있는 까마귀 둥지.
원래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뿐인데, 운송 의뢰 명목으로 기존의 보수를 반 배 가까이 올려받았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금화다, 금화. 산더미 같은 금화다. 흐흐흐.]
“······.”
[이 세상은 절대로 지켜져야 해. 이 많은 금화를 다 쓰기 위해서라도······흐헤헤.]
덕분에 아공간의 악마는 왕도를 떠난 이후 내내 저렇게 히죽거리고 있었고.
‘미궁도시를 거쳐 가는 김에 경매장도 한 번 이용해야겠군. 슬슬 템빨을 갖출 때도 됐으니까.’
대륙 각지에서 마물이 날뛰는 와중에도 팔시온의 물가는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수백만이 사는 거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기술과 마법으로 완벽한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마도구의 병장기들의 가격은 조금이나마 하락했다고 하던가.
시에나의 까마귀에게 듣기로는, 혼란이 가중되면서 그동안 꿍쳐놨던 보구를 팔아치우는 갑부들이 많아진 게 그 이유였다.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뒤로 한 채, 댈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후우······.”
뜨거운 숨결이 찬 공기와 만나 얼어붙는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 코끝에 내려앉는 축축한 공기.
어제는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도시 연합의 국경에 거의 근접했다는 증거였다.
지난 보름간 끝도 없이 지나쳤던 에클라힘의 피난민들 역시, 이제는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제국의 성전이라.’
제국이 주변 국가들 전체에 선포하는 남부의 대전쟁.
성전은 원래라면 후반부 시나리오들 중 하나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쑴이 서리고원을 넘어서 차르국을 침공하는 마당에, 제국이 성전을 선포하는 것도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댈런이 미심쩍어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만한 전력을 움직였는데, 시체술사인 제국 동부의 뱀파이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음?’
그 순간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온 소음. 댈런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수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숲속.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음이 비명과 함성 사이에서 뒤섞인다.
물론 멸망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마물이나 도적은 어디에나 차고 넘쳤다.
허나 댈런의 시선을 끈 건 전투 자체가 아니었다.
‘분명 공간의 틈을 비집는 기척이었다.’
회백의 투사가 남긴 깨달음을 완전하게 흡수하면서, 공간에 대한 댈런의 이해도는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높아졌다.
킬로미터 단위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공간 왜곡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정도.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려보니, 감각권에 점점이 걸리는 기척은 점차 뚜렷해졌다.
공간을 비집고 한 번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그것도 연속해서 건너뛰고 있다는 소리.
6위계에 도달한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가 상대는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전투 준비.”
댈런이 말했다. 빠르게 무기를 뽑아드는 일행들 사이에서, 댈런은 새로 장만한 도끼에 손을 올렸다.
공간을 비집는 기척은 이제 수백 미터 안쪽이었다.
속도로 봐서 아마 잠시 후면 들이닥칠 터.
나타나는 지점을 예상해서 미리 도끼를 던지는 것도···.
“흐아아아아악!”
도끼를 뽑아들려던 손이 움찔했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수준급의 공간술사이거나 초월자라 생각했던 상대인데, 어째서인지 비명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같은 생각을 했는지 펠버가 들어올렸던 지팡이를 내렸다. 노인이 말했다.
“···저거 갈리오스 상단주 목소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