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유물상(2)
찌지직!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흐릿한 틈바구니를 열어낸다. 거기서 툭 튀어나온 건 검댕투성이의 사람이었다.
“흐아아악! 사람 살려···어?”
비명을 내지르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려다, 자신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눈치채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모습.
그 반가운 얼굴에 댈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그를 알아본 갈리오스 상단주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대, 댈런!”
“오랜만이오, 상단주.”
덩굴의 마녀가 일으킨 소요 이후, 필로폰네 과수원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던가.
차르국의 의뢰를 받아 북부로 떠난 뒤로부터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소식조차 듣지 못한 지 오래였다.
서부 지구에 떨어뜨린 청뢰(靑雷)의 여파로 일대의 유리창이 죄다 깨져나간 직후, 유리 공방을 대규모로 인수해 수십 궤짝어치의 금화를 쓸어 담은 게 그가 아는 볼크마의 마지막 행보.
추후 예술품 사업에도 발을 뻗으려 한다는 소식 정도를 건너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에 나타난 볼크마의 행색은 그런 쪽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당장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유물의 힘으로 공간을 도약하며 도주한 볼크마의 뒤를, 일단의 무리가 이곳까지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상단주, 내 뒤로.”
헐레벌떡 숨는 상단주를 뒤로 하고 도끼를 뽑아든다.
차르국 왕실에게 받은 보상들 중 하나인 유물 도끼는, 이전에 쓰던 것보다 배는 더 큼직했다.
거기다 그 무게는 비슷한 도끼 수십 자루를 응축한 듯, 족히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중량.
물론 댈런에게는 딱 좋은 크기와 무게였다.
두두두두······!
지면이 울리기 시작한다. 감각권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기척이 선명했다.
「몽환추적(夢桓追跡)」
「회백전도(灰白全圖)」
머릿속에 흑백으로 펼쳐지는 근방 일대의 지도는, 대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숲속을 비춰내고 있었다.
공간을 연신 넘어대는 볼크마를 붙잡아 세우기 위해, 일행을 대로변에 잠시 멈춰 세운 뒤 그와 펠버 두 사람만 왔기 때문.
안 그래도 적은 머릿수가 몇 배나 더 적어졌지만, 그 정도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먼 북쪽에서 이보다 더한 수적 열세에서 맞서 잘만 싸우지 않았나.
댈런은 가만히 눈을 반개하고 회백전도를 살피다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노인장. 발밑이오.”
“끌끌, 알고 있네. 내가 어느 마탑 출신이라 생각하는 겐가?”
가볍게 대꾸하며 수인을 맺는 펠버.
이제는 흔한 영창조차 없다. 대마법사의 주문은 순식간에 땅 아래로 퍼져나갔다.
두두두두두―!
쿠드드득!
뿌리가 꺾이고 덩굴이 끊어지며, 점점 다가오는 대규모의 기척을 향해 뻗어나가는 주문의 마력.
두 기세가 충돌하는 것과 동시에, 댈런의 발이 땅을 밀어찼다.
투웅―
스쳐가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
단숨에 숲의 암막에서 벗어나, 까마득한 창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숲 한가운데에 새겨진 거대한 상흔이었다.
마치 신이 갈퀴로 땅을 갈아엎기라도 한 것처럼, 백수십 미터 반경의 대지가 완전히 뒤집어진 모습.
땅 밑을 파고들던 마물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키에에엑!
쿠르륵! 쿠륵!
뒤집힌 땅에서 버둥거리는 각종 마물의 숫자는 어림잡아 천에 가깝다.
잘 굴러가던 상단은 어디 버려두고, 대체 어쩌다가 이 많은 숫자의 마물에게 쫓기게 된 건지 궁금할 지경.
몸길이가 십수 미터에 달하는 지네가 동체를 뒤틀고, 사람의 얼굴을 여럿 달고 있는 열두 다리 거미가 다리를 휘젓는다.
털복숭이 거대 두꺼비의 앞발은 포크레인 같은 모양이었고, 통통한 애벌레의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수백 개의 이빨이 회전하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못해도 중급 마물 이상으로 분류될 놈들.
이 정도 숫자가 모이면 성 하나 정도 집어삼키는 데 한나절로 충분할 지경이다.
[영창 없이 저 정도 규모의 주문이라···젊은 인간 마법사의 실력도 끝을 모르고 치솟는구나. 댈런, 너도 좀 더 분발해야겠느니라.]
그 와중에 중얼거리는 적창의 말을 피식 웃어넘긴 댈런은, 손에 든 유물 도끼를 가볍게 내리그었다.
패랙―
손끝을 떠난 날붙이가 허공에서 푸른 정광을 토하고.
스팟!
푸른 빛이 스쳐 지나간 직후에, 도끼의 개수는 정확히 일흔여덟 자루였다.
두두두두두두─!!
수십 자루의 도끼가 일제히 지면을 두들긴다.
상공에서 낙하하는 쇠붙이들에 실린 힘은, 거인조차도 찢어발길 전사의 근력.
하나하나가 포탄이나 다름없는 충격량을 가진 채, 이미 한 번 뒤집어진 지면 위로 폭격이 가해졌다.
댈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몸을 거꾸로 뒤집은 뒤 허공을 박찼다.
꽈릉―!
벼락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뇌성이 울려 퍼진다.
소리보다 앞서 나가는 육체가 두 번이나 뒤집어진 지면 위에 폭탄처럼 내려앉았다.
재빠르게 도끼를 회수하고, 살아남은 마물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내젓는다.
차르국 왕실의 보고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 유물 무기의 능력은 바로 ‘자체 분열’.
분열된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평범한 투척만으로도 탄막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스팟!
다시 한 번 번뜩이는 푸른 정광.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한 댈런의 손끝을 따라, 수십 개로 쪼개진 도끼가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마치 빠르게 돌아가던 믹서기가 부서져, 칼날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나가는 듯한 모습.
「회명(回冥)」
「발화(發火)」
그 수십 개의 날붙이에서 신성한 불꽃까지 피어오르자, 주변에 멀쩡한 마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끄에···켁!
다 죽어가는 마물들을 마무리한 댈런은 도끼를 허리춤에 돌려두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가 마물을 처리하는 사이, 펠버는 볼크마를 안전한 대로변으로 피신시킨 상태.
지금쯤 정신을 어느 정도 추슬렀을 테니, 대체 무슨 일에 휘말린 건지 알아볼 시간이었다.
***
“······.”
오랜만에 만난 볼크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흙과 오물, 검댕을 덕지덕지 묻힌 채, 자랑스럽게 기르던 수염마저 헝클어져 너저분해져 있는 모습.
평소에 입고 다니던 질 좋은 비단옷과 장신구들은 어디에 갖다버리고, 상인은 여기저기 헤진 천옷 위에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심지어 허리춤에는 짧은 칼집까지 찬 상태였다. 칼은 도망치면서 떨어뜨렸는지 칼집뿐이긴 했지만, 어쨌든.
댈런은 턱을 긁적이다가 툭 물었다.
“상단주.”
“으, 응?”
“장사 접었소?”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지금 그쪽 꼴은 영락없는 동패 용병이잖소.”
“······.”
뭐라 항변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 고개를 푹 떨구는 볼크마.
물론 일개 동패 용병 나부랭이와 다르게, 십수 가지의 마도구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기는 했다.
단지 그 마도구들 중 대부분을 알고 있는 댈런의 눈에, 상단주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한두 개 정도밖에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자자, 내 친구여.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펠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볼크마는 그제야 하나씩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거의 두 시간에 걸친 고해성사가 끝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린 말.
볼크마의 어깨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펠버는 잠시 생각하다가 상인의 넋두리를 짧게 요약했다.
“그러니까 예술품 장사에서도 대박을 터뜨린 이후, 상단을 상회로 확장하고는 그동안 모은 자본금을 바탕으로 청동 경비대와 순은 기사단에도 직접 납품을 시작했다는 거로군.”
“맞습니다.”
“미스릴 제련소를 중심으로 여러 대장간들을 연합해, 납품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건데···문제는 거기서 조금 더 욕심이 생겼다는 건가?”
“거듭 변명하자면 사업 확장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황금 수호단과 백금 구역 안쪽의 귀족들에게 평범한 병장기는 경쟁력이 없으니까요.”
볼크마는 만신창이가 된 수염을 문질거리며 말했다.
기름을 잘 발라 멋들어지게 다듬어뒀던 그의 수염은,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고양이 수염마냥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물론 르베론 씨가 직접 만든 병장기는 귀족가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만,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마도구 쪽에도 손을 뻗은 거고.”
“···그렇네, 댈런.”
대륙 각지에서 마물이며 사교도들이 날뛰는 지금, 마도구 장사는 그 무엇보다도 큰 돈이 되는 시장이었다.
갑부들이 꿍쳐뒀던 유물들이 시장에 풀리고, 그에 질세라 여러 마탑에서도 각종 마도구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시점.
돈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는 상인답게, 볼크마는 상단을 상회 규모로 넓히자마자 그 시장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마탑과 마도구 유통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아예 직접 유물을 발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하다니.’
약초 장사에 유리창 장사, 거기에 이어서 유물까지 팔아치우려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볼크마의 상인정신 스킬은 S등급일 게 분명했다.
사실 그의 판단은 댈런도 감탄할 만큼 날카로웠다.
중후반부에 접어들며 마물들이 활개 치는 시점에, 실제로 수많은 지하 유적들이 땅속 깊이 묻혀있던 입구를 드러내곤 했으니까.
게임에서는 숨겨진 던전이 열리는 식으로 표현되었던 현상. 개중에는 정말로 고대 마도 문명의 유적처럼, 각종 금은보화와 유물을 발굴할 수 있는 곳도 존재했다.
‘문제는 막대한 보상이 있는 유적일수록 발굴이 어렵고, 까딱하면 발굴단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다는 거지.’
성기사단 본단의 지하에 있던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처럼, 오래된 유적은 그만큼 강력한 방어장치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기술로 만든 수많은 함정과 유적을 지키는 수호자, 때로는 유적 그 자체가 침입자를 삼키려 드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방어장치만 힘을 다하는 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보상은 난이도에 비례하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그런 유적을 손수 발굴해내는 건, 장사에 빠삭한 볼크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잘한 유적을 몇 번쯤 성공적으로 발굴해내던 중, 이번에 판을 크게 키워 뛰어들자마자 대차게 말아먹었다는 게 상단주가 늘어놓은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발굴단은 사실상 전멸. 그나마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유물이며 마도구를 죄다 사용해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라고.
“친구여, 유물을 발굴하는 건 단순히 탁자에 앉아 숫자를 셈하거나, 거래처와 담판을 짓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랑 함께 가세나. 안 그래도 미궁도시로 가는 길이었다네.”
“······.”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볼크마. 댈런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양반인데. 그렇다고 투자금이 아깝다거나 하는 이유도 아닐 테였다.
지금까지 볼크마가 상인으로서 쌓아온 신화적인 거래들을 생각하면, 그의 은행 계좌에는 금덩이로 집을 짓고도 남을 금화가 들어있을 테니까.
“이번에 발굴하려 했다는 그 유적. 이름이 뭐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유적이었네. 굉장히 최근에 발견되었거든.”
“뭐 특징이나 그런 거라도 말해 보시오. 모래왕조의 유적이라던가, 고대 엘프의 거주지였다던가.”
볼크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품속에서 작은 돌덩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어느 문명의 요람이었는지는 모르겠네만···유적에서 이걸 발견했다네.”
돌덩이는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상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흙을 펠버의 주문으로 털어내고 나니, 조각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며 녹슬고 부식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형태가 용이라는 걸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둥이 위에서 번뜩이는 네 쌍의 눈. 위협적으로 펼쳐진 네 쌍의 날개.
조각상의 모습을 확인한 댈런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가는 동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상단주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겠네. 우리가 유적 깊은 곳에 있는 문을 열었을 때···거대한 공동에 있던 마물들이 죄다 깨어나기 시작했네. 댈런 자네가 처리한 마물들은 곧바로 깨어난 일부에 불과해.”
“······.”
“이대로 도망치면 목숨이야 건질 수 있겠지만···그 마물들이 지상으로 뛰쳐나올 게 두렵네.”
깊게 내쉬는 한숨. 가만히 듣던 펠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되물었다.
“수백 마리의 중급 마물이 고작 일부라니. 자네 혹시 유적에서 환각 물질을 마신 건 아닌가?”
“저, 절대 아닙니다! 마탑주님, 제 계좌 비밀번호를 걸고 맹세하건대···.”
“상단주 말이 맞소, 노인장.”
“댈런! 역시 자네는 날 믿어주는구만···!”
감동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상인.
댈런은 진지하게 그 얼굴을 한 대 후려칠까 고민했다.
말끔해진 용 조각상을 루시아에게 건네고서,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시발, 왜 하고많은 유적 중에 용굴을 건드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