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03화 (203/288)

203

용굴(1)

용굴.

진룡이 기거하는 심처이자 궁전.

세간에서는 아룡이 만든 둥지 역시 용굴이라 부르지만, 진룡의 용굴과 비교했을 때 그건 그저 조금 깊은 동굴에 불과했다.

신비 그 자체인 진룡의 거처는 아룡의 둥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천수만의 마물과 용이 직접 만든 골렘이 지키는 건 물론이고, 그 내부의 환경 역시 필멸자와는 완전히 상이한 용의 생태에 맞게 조성된 바.

주인의 특성에 따라서는 필멸자의 입장에서 지옥을 방불케 하는 마경이 펼쳐진 곳도 있을 정도다.

‘청린의 용굴만 해도 그랬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얼마 안 가 동사할 극한의 냉기가 내려 앉아있던 청린의 용굴.

나무의 저주로 영락한 뒤 기사단장에게 큰 부상을 입고, 끝내 댈런의 손에 죽은 용이었음에도 그 정도였다.

살아있는 진룡이 거주중인 용굴이라면 그 혹독함은 배 이상일 터.

댈런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건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래서···이 친구가 발견한 유적지가, 사실은 유적이 아니라 진룡의 굴이라는 겐가?”

“그렇소.”

“그 용굴의 주인이 용신의 열세 권속 중 하나이고.”

“내가 알기로는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놈이오.”

펠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주름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만신창이인 상단주의 얼굴은 그 곁에서 점점 더 새파래져 갔다.

[지저룡 타테앙카트 파르지움···그 형상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댈런과 시야를 공유하는 적창이 조각상을 보고 중얼거렸다.

‘잘 아시오?’

[잘 알다마다. 놈은 용신의 오른쪽 권갑. 나를 꾀어 함정에 빠지게 만든 놈이지. 당장에라도 놈의 심장을 이빨로 찢어버리고 싶구나.]

나직하게 웃는 음색. 흉흉하게 깃든 살기에 심산 너머 설산의 절벽이 우르르 떨린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일정에 차질이 생길 듯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때마침 차르국 특무대의 집행관, 크레이그 비드로프가 물었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는 것과 반대로, 크레이그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흥미와 열의, 호기심으로 덧칠된 눈동자.

요원보다는 탐험가를 했다면 적성에 맞지 않았을까. 댈런은 조금 더 지끈거리려 하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낭만충 새끼.”

“예? 그게 무슨 뜻···.”

“고향 말이오. 칭찬이지. 아무튼 지저룡의 용굴을 한 번 건드렸으면, 그 이전으로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마리의 마물이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겠지.”

“그, 그런······.”

두 집행관의 얼굴이 파리해지는 것과 동시에, 볼크마가 넋을 잃은 듯 털썩 주저앉는다.

이곳은 차르국의 최남단 접경지대. 막 악신과의 전쟁을 끝내고 재건에 들어간 차르국에, 또 한 번 수천 마리의 마물 군세가 나타난다면 결말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용굴의 주인인 지저룡과 담판을 짓는 것뿐이오.”

“담판이라 하시면···.”

“말로 하거나, 말이 안 통하면 죽이거나.”

그리고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고룡에게 말이 통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법.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빨과 검이 대화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댈런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일정에 차질이 조금 빚어지긴 하겠지만, 적창만큼이나 그에게도 지저룡은 악연이 닿은 존재였으니까.

‘용살자 캐릭터가 놈에게 죽었었지.’

용린 갑주의 주인이자 가장 날카로운 용골검의 보유자.

용을 죽이고 죽인 용의 부산물로 무구를 만들던 초월자는, 용신에게 패퇴해 도망치던 중 지저룡의 입 안에서 숨을 거뒀었다.

사실 초월자 캐릭터들의 시신을 회수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지저룡의 용굴 역시 목적지의 후보군에 들어가 있긴 했다.

다만 지저룡의 용굴 입구는 중후반부 이후, 대륙 전역에 무작위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 바.

그 위치를 찾아내는 데만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에, 일단 보류해두고 있었을 뿐.

“댈런의 말이 맞네.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 해. 잠에서 깨어난 용굴을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아카샤처럼 인간에게 우호적인 용이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용은 악신인 용신과 뜻을 함께하죠. 용굴이 깨어났다는 건 대악마의 지옥문이 열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펠버와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자, 나머지 일행들 역시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댈런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 이 유적지이자 용굴을 발견한 상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맞잡고 흔드는 볼크마에게,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용굴에서 나온 보물.”

“응?”

“팔 대 이로 하지. 당연히 그쪽이 이고. 갈리오스 상회가 판매하는 과정을 마진 없이 책임져주는 조건으로.”

“응? 아, 뭐라···.”

“아니, 구 대 일이 맞겠군. 따지고 보면 결국 발굴 실패한 유적 아니오?”

“어···어어억?”

단단하게 맞잡은 손에서 힘줄이 살짝 올라왔지만, 어찌 됐건 두 사람은 여전히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거래가 성립되었다.

***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두 집행관은 차르국의 답례품을 건넬 사절이기에, 일정에 따라 팔시온으로 가야만 했다.

낭만충 크레이그가 사절은 한 명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의견을 제시했지만, 요원 양성소 동기인 로만이 뒤통수를 후려갈기면서 정리.

비요른은 악마를 죽일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공방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고, 아카샤 역시 급격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버번을 다시 한 번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화약에 미친 난쟁이와 새끼용을 따로 보내기 불안했던 루시아가 파른과 함께 동행하기로 하면서, 미궁도시로 가는 인원은 여섯 명으로 정해졌다.

자연스럽게 용굴에는 댈런과 펠버, 토미, 그리고 볼크마 네 사람이 가게 되었다.

까악―

‘아, 까마귀도 함께.’

그러면 넷이 아니라 다섯인가.

시에나가 보낸 까마귀를 사람 숫자에 넣어야 할지 말지는 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전 대륙에 걸쳐 정보망을 뻗게 된 마녀가, 까마귀 하나에 하루종일 의식을 연결해둘 수도 없는 노릇.

의식의 연결이 끊긴 상태에서 까마귀는 잘 훈련된 새이자, 깃털의 마녀가 부리는 정보 수급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까악―크흠, 흠. 대충 상황은 이해했어. 용굴을 털 생각인 거지?”

“···언제부터 의식을 연결했소?”

“얼마 안 됐어. 그나저나 지저룡의 용굴이라니, 갈리오스 상단주가 돈 냄새 하나는 기막히게 잘 맡는다니까.”

앞장서서 길을 이끌던 볼크마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댈런은 픽 웃으며 말했다.

“지저룡의 용굴에 보물이 가득하다는 사실, 당신도 알고 있었소?”

“내 정보망으로 알아낸 건 아니야. 지저룡의 용굴 입구가 나온 건 천 년도 더 전 일이라···대신 버번이 말해줬지.”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줄여서 버번.

수천 년도 더 전에 초대 깃털의 마녀와 계약을 맺은 진룡은, 먼 후손인 시에나를 지키기 위해 까마귀 둥지에 바텐더로 잠입해 있었다.

서부 지구에서의 싸움 이후 시에나에게 정체를 드러낸 이후, 바텐더에 정보원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건가.

수천 년을 살아온 노룡인 만큼 현시대에는 알 수 없는 고대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시에나 입장에서는 굴러 들어온 복덩이나 다름없었다.

[보, 보물이 가득···? 청린의 둥지는 금화 한 톨 없지 않았습니까? 분명 인간과 교류가 없는 용은 보물을 쌓아두지 않는다고······.]

[그건 오랜 옛날 지저룡이 모래바람 왕조와 교류했기 때문이지. 기억 잃은 나무여, 그대가 잘려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용신은 아직 타락하지 않았고, 용들은 지상의 종족과 활발하게 교류했었으니.]

[허업···!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금화와 보석이 가득한 용굴을···그아와압!! 주잉니므압!]

조막만 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뻐하는 악마. 댈런은 말없이 품속 아공간에 손을 넣어 녀석을 주물러줬다.

지구에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팔던 작고 말랑거리는 공 모양 장난감이 떠오르는 감촉.

만성적인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이 스르르 가라앉는다.

‘···그러고 보니 댈타리온이 그런 말을 했었지. 당신이 용신의 타락을 막으려 했다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그 말을 또 들었느냐?]

‘용신은 원래 악신이 아니었던 거요?’

게임 설정상 악신은 다섯.

따라서 악신이 다스리는 대지옥 역시 다섯이었다.

하지만 만약 용신이 타락해 악신이 된 거라면, 그 전까지 대지옥의 악신은 넷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종말의 주역인 악신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 근원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쩌면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약점을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맞느니라. 우리 용족은 본디 중립적인 존재였고, 용신 역시 그랬느니라.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용에게 신은 없었지. 하나하나가 반신들인 존재. 누가 그 위에 군림하겠느냐.]

‘용신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래. 다른 네 악신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선의에서 출발한 필멸이 악으로 수렴되는 걸 보고 비웃던 우리 용족이었으나, 그토록 자랑하던 불멸성 역시 기나긴 세월 앞에서는 똑같이 덧없었을 뿐이지.]

‘······.’

약간의 회한이 서린 채 늘어놓는 이야기.

누가 신비의 존재 아니랄까, 여느 주문쟁이 못지않게 배배 꼬아놓은 이야기였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창의 말대로라면 용신은 가장 마지막에 탄생한 악신. 거기다 흔히들 신 하면 떠올리는 영속성과 달리, 시작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신격이었다.

놈이 태초부터 대지옥의 지배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악신들 역시도···.

“여기입니다.”

상념을 끊는 한마디.

고개를 들어보니 볼크마가 말을 천천히 멈춰 세우는 중이었다.

말에서 내린 상인은 싱크홀처럼 푹 내려앉은 구덩이를 가리켰다.

기이한 기운이 상승기류를 타고 솟구치는 구덩이. 대로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대로에서 고작 세 시간 거리라니.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구먼.”

뒤따라 내린 펠버가 고개를 내저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차르국 최남단의 접경지.

마물의 군세가 기어나오는 순간, 동맹국 사이의 국경을 느슨하게 지키던 수비대와 활발하게 오가는 상행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게 자명했다.

거기다 북부 전선이 반파된 직후이기에, 철혈군대는 이 머나먼 변방까지 손을 쓰기 힘든 상황.

아무리 못해도 남부 일대에 대규모 소요가 일어날 것이고, 잘못 꼬이면 도시 연합과 차르국 사이의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오. 보물 찾겠답시고 아무 곳이나 들쑤시고 다니는 상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국가적인 위기도 닥치지 않았겠지.”

“······.”

“그걸 해결해주는 대가로 구 대 일이면 너무 싼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소, 노인장?”

“아, 아니! 우리 계약했잖나!”

볼크마가 황급히 손을 내저어대고, 마법사가 껄껄 웃어젖혔다.

물론 이 정도로 대로와 가까운 곳에 용굴 입구가 나타났다면, 볼크마가 아니었어도 머지않아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랬다면 상황은 정말로 심각해졌겠지.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댈런은 구덩이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 댈런! 사다리 없이는···!”

휘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쿠웅!

수 초가 지난 뒤에야 발 아래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

구덩이는 상당히 깊었다. 대충 백 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그 깊이 때문에 저 위쪽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마치 작은 점처럼 보였다. 어지간해서는 맨눈으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물론 댈런의 시력은 어지간하다기에 한참 비범했고, 널찍한 구덩이 바닥과 저 앞에 보이는 으리으리한 유적 입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 입구를 막아선 세 사람의 모습까지도.

[···네가 내 안식을 방해한 침입자인가.]

가운데 선 남자가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벨튀한 건 나 아닌데.”

[···벨, 뭐라?]

“벨튀 말이다 벨튀. 벨 누르고 튀는 거.”

[······.]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두건을 걷어 올렸다. 어둠 속, 세로로 찢어진 호박색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안광을 빛냈다.

놈은 치렁치렁한 로브를 넓게 펼치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나는 지저에 거하는 탐식자. 심연의 용암을 왕좌로 삼은 존재. 고대 사막왕조의 유지를 삼킨 포식자이자, 일만 난쟁이를 복속시킨 만금의 주인이다. 모든 용들은 날 칭송하며, 신의 오른손이라···어억!]

남자의 고개가 뒤로 팍 꺾였다. 쉬익 하고 공간 빗겨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댈런은 앞으로 뻗은 오른손을 주억거렸다. 새로 얻은 도끼의 무게감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고개가 꺾이다 못해 부러진 듯한 남자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바들거리며 멈춰 섰다.

[이, 이···! 감히 저급한 필멸의 태생이, 수행 좀 했다고 기어오르는···!]

오, 저 무게를 머리에 달고 말까지 하네? 댈런은 내심 감탄하면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콰지지지지직!

그러자 두개골에 꽂힌 유물 도끼가 수십 개로 분열되며, 남자의 육신을 한 줌의 핏물로 갈아버렸다.

한순간에 만들어진 참혹한 살해 현장. 남자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당혹스런 고갯짓으로 그 현장과 댈런을 번갈아 쳐다봤다.

“뭘 꼬라보고만 있냐.”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네 주인 뒈졌는데 안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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