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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굴(2)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
괴이한 언어가 공동을 구덩이의 밑바닥을 쩌렁쩌렁 울림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사정없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넉넉한 품의 로브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 아래에서 번뜩이는 파충류의 비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응축되었던 육신이 순식간에 크기를 되찾아간다. 물리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폭발적인 체격의 변환.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주인님의 화신체를 감히···!]
진갈색과 검은색 비늘을 가진 두 용이 포효하며 몸을 일으켰다. 둘 모두 몸길이 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크기.
날개를 활짝 펼치자 유적의 입구가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
물론 댈런의 도끼는 이미 그의 손 안에 돌아와 있었다.
쉬익─
포효 사이로 파고드는 절삭음. 큰 소음은 없었다.
[캬악···!]
쿵!
그러나 결과는 꽤나 소란스러웠다. 폭이 사 미터쯤 되는 진갈색의 피막 날개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쯧.”
댈런은 혀를 짧게 찼다. 머리를 노렸는데 날개가 대신 잘렸다.
놈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기보단, 손도끼의 무게감이 이전과는 너무 달랐던 탓.
‘묵직한 손맛이 좋기는 한데···아직 적응이 필요하겠군.’
댈런은 도끼 던진 손을 주억거렸다. 아무리 그라도 백 배쯤 무거워진 도끼를 항상 쓰던 것처럼 휘두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런 복기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전투가 얼마나 여유로운지 보여주는 증거.
[······!]
당연하게도 두 아룡의 입장에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
[─! ──!]
용언이 대기를 찢는다. 마력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구덩이 바닥이 솟구치며 신장 수 미터의 골렘들이 일어나고, 용암처럼 걸쭉한 숨결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쏟아진다.
[트타레아! 골렘으로 놈의 발을 묶고 도망치자!]
[숨결로 놈을 막고 있겠다! 못해도 열 기 이상 뽑아내!]
두 아룡의 눈에 더 이상 거만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살아남겠다는 필사적인 의지만이 깃들었을 뿐.
도끼 투척 한 번에 주인의 화신체가 본모습으로 변신할 틈도 없이 으스러졌다.
거기까지야 무슨 유물 무기의 힘인가 싶었지만, 되풀이된 가벼운 도끼질에 날개가 무슨 갈대처럼 툭 잘리기까지.
눈앞의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두 용에게 선택지란 하나뿐이었다.
가장 강력한 주문과 숨결을 쏟아붓고, 주인이 있는 용굴의 심처로 대피하는 것.
깊은 지맥에서 솟구치는 용암에 버금가는 용숨결과, 열이 넘는 바윗덩이 골렘들이라면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였다.
[열하나···열둘! 트타레아, 뒤로 빠져!]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 순간.
「빙정 : 개화(開花)」
「소류지(素流枝)」
부채꼴로 구덩이를 한가득 뒤덮었던 숨결이, 수십 갈래로 뻗어오는 냉기에 삼켜졌다.
[무슨···!]
전성을 토하는 사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주둥이. 검은 비늘 용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확히는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백향근(百向根)」
어느새 지면을 뒤덮어버린 수백 가닥의 얼음 뿌리가, 네 다리를 꽝꽝 얼려 땅에 못 박아버린 것.
[트타레아!]
날개 잘린 진갈색 아룡이 동료를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다리를 묶은 빙정의 뿌리와 용숨결을 집어삼킨 냉기의 폭풍에, 검은 용의 전신은 얼음 조각이 되어버린 뒤였기 때문.
콰장창!
댈런은 그 조각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는 날카로운 얼음덩이들.
얼다 만 용의 살점과 핏물이 온몸에 끼얹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때는 성검을 들고서도 팽팽한 접전을 벌여야 쓰러뜨릴 수 있던 아룡이다.
허나 이제는 부러진 성검을 꺼내 들지 않고서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사냥감일 뿐.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가파른 속도로 이뤄낸 성장의 결과물. 목숨을 내걸어야만 했던 싸움들을 통해 이뤄낸 이 성취가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기에 이 성취감을 거름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갈 동기를 수확해낸다.
결코 막을 수 없을 듯 아득하게만 보였던 종말마저도, 머지않아 두 손으로 찢어버릴 수 있다는 희망의 동기를.
[노, 놈의 발을 묶어라!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아룡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명령에 열다섯 기에 달하는 골렘들이 달려들었다.
댈런은 대답 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허리 뒷춤에 매어둔 부러진 성검이 아닌, 투박한 장식의 칼집에서 뽑혀나온 검이었다.
기이잉···.
검집에서 해방되자마자 기묘한 울음을 토하는 보검.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 같은 검신이, 구덩이 바닥에 낭자한 주문의 광채를 사방으로 난반사한다.
[쇄설검 티르빙···!]
아룡이 당황한 목소리로 전성을 중얼거린다.
차르국의 의뢰를 완수해주며 받은 보수는 금화와 보석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륙 북부를 제패한 거대한 국가의 창고에, 금화 정도야 썩어 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댈런이 요구한 보수의 핵심은 바로 왕실 보고에 잠들어 있던 유물 무기들이었다.
원래는 유물 도끼와 검집을 요구했었고, 쑴의 화신체와 담판을 지은 이후 추가 보수로 요구한 게 바로 이 보검.
구르르르륵!
바위가 굴러가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골렘이 달려든다. 댈런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마치 검의 능력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듯, 평소와는 달리 제대로 된 자세조차 잡지 않은 검격.
떠어어엉!
달리는 말의 속도로 돌진해온 수십 톤 중량의 골렘은, 그런 검격 한 번에 튕겨나가 구덩이의 벽에 처박혔다.
콰르르르르···!
어마어마한 충격에 구덩이가 요동치고, 돌덩이며 모래흙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괜찮군.”
모니터 너머에서만 보던 전설적인 장비들을, 직접 손에 쥐고 휘둘러보는 건 확실히 신기한 느낌이었다.
성검 토르타니스야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물건이기에 잘 체감되지 않았지만, 쇄설검은 게임에서도 차르국과 연이 닿을 때마다 얻고자 애썼던 장비.
최종 장비로 쓴 적도 몇 번 있는 보검인만큼, 악신과 투닥거린 보상으로도 모자람 없는 물건이었다.
‘검에 부딪히는 충격을 그대로 반사하는 사기적인 무기지.’
단점이라면 능력을 쓸 때마다 검신의 내구성이 빠르게 소모되고, 순수한 물리력에 한정된다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다.
검신에 미세하게 간 실금을 해결하기 위해, 왕실 보고에서 그에 맞는 검집을 함께 꺼내온 것이니까.
저벅.
댈런은 슬슬 손목을 풀며 남은 골렘들을 향해 걸어갔다.
골렘 열넷을 쓸어버리고 아룡의 목을 자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펠버와 토미, 그리고 볼크마가 내려온 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펠버는 잠깐 사이에 난장판이 된 구덩이 바닥을 둘러보더니, 댈런의 앞에 목이 잘린 채 쓰러진 용의 시체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이었나?”
“아룡 둘. 지저룡의 화신체 하나. 마중 나왔길래 인사해줬소.”
“인사······?”
볼크마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위쪽은 잘 마무리하셨소?”
“몇 놈 놓치긴 했는데, 대부분은 잡았네. 아래쪽에도 이만한 전력을 대기시킨 걸 보니, 앞뒤에서 협공해 몰살시킬 생각이었나 보구먼.”
“지저룡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단잠을 깨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나?”
펠버는 그렇게 말하며 주문으로 옷에 가득한 핏자국을 씻어냈다.
댈런은 그걸 멀뚱히 보다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 역시 이제는 주문에 나름 소양이 있었지만, 얼굴 닦는 데 주문씩이나 쓰는 마법사들의 사고관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아룡의 심장을 뽑아내 아공간에 넣은 뒤, 네 사람은 반쯤 무너져버린 유적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한동안 긴 통로가 이어졌다. 깊은 땅속임에도 뭉근한 열기가 유적 공기에 녹아든 채 그들을 반겼다.
“차르국에서 보수로 영약을 받으셨지. 드셔보시니 어떠시오?”
“아주 좋더군. 시간선을 다룰 때마다 몸에 가해지던 부하가 훨씬 가벼워졌네.”
“다행이군.”
“자네는? 검이랑 검집이랑···뭐 이것저것 많이 받지 않았나?”
“도끼는 좀 적응이 필요할 것 같고, 검과 검집은 확실히 쓸만하군. 둘의 조합이 좋소.”
스릉···.
댈런은 검을 반쯤 뽑아봤다. 골렘과 아룡을 상대하며 이가 나갔던 부분이 전부 수복되어 있었다.
따로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이 검집은, 무구의 내구도를 회복시켜주는 기능을 가진 유물.
아쉽게도 성검은 크기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반토막 난 그대로 허리 뒷춤에 달아둔 상태였고.
일행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계속 나아갔다. 갈림길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댈런은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 통로는 그 자체로 복잡한 미로였다. 원래라면 한참을 헤매다가 함정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
갈림길에서 한 번만 잘못 선택해도 바로 창칼 돋아난 구덩이며 불붙은 바윗돌 따위가 반겨주기 마련이었다.
펠버 역시 그걸 느꼈는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자네 혹시 여기 와본 적 있나?”
“몇 번 정도는.”
“다행이구만. 용굴이라 마력 감지가 거의 먹히지 않는다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고생할 뻔했어.”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의 감각 역시 용굴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꽤나 제약된 상태였다.
요긴하게 써오던 회백전도 역시 통하지 않았고.
지금 내딛는 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한 발걸음이었다.
“긴장은 놓지 마시오. 그 몇 번 중에 지저룡의 화신체가 친절하게 마중 나온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보물 털러 온 거라, 그리 깊이 들어간 적도 없소.”
댈런이 모니터 너머에서 지저룡의 용굴을 공략했던 건, 하나같이 놈이 용굴 초입부에 쌓여있는 보물을 노리는 경우였다.
애당초 진룡을 정면에서 상대할 정도로 강해진 회차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용신의 오른쪽 권갑이라 불리는 지저룡을 쓰러뜨릴 수준의 캐릭터는 정말로 한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해진 캐릭터라면, 대륙 곳곳에서 터지는 온갖 사건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기 마련이었다.
이번에야 신기하게도 운이 좋아서, 코앞에서 용굴의 입구를 발견한 것뿐.
“저기 끝이 보이는군.”
댈런이 말했다.
비좁던 통로는 어느새 도성의 대로처럼 넓어져 있었다. 그 끝을 막아선 건 어지간한 도시의 성문쯤 되어 보이는 관문이었다.
일행이 가까이 다가서자 저절로 열리기 시작하는 관문.
그 안쪽은 지나온 통로보다도 더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댈런의 기억에 따르면 거긴 아무도 없는 큰 공동이었다.
‘게임에서는 일종의 쉼터 역할로 존재하던 장소였지.’
드넓은 공터 뒤로는 마물들의 보금자리와 보물 가득한 방이 복잡하게 이어졌다.
댈런의 기억이 닿는 건 그곳까지였다.
일행은 천천히 공동 안으로 들어갔다.
쿠웅―.
그리고 곧바로 문이 닫혔다.
“···음?”
뭐지? 게임에서는 문이 닫힌 적 없었는데.
의문을 품은 순간 무언가 공기를 찢고 날아왔다.
타아앙―!
이어지는 총성.
댈런은 본능적으로 휘둘렀던 손을 슬쩍 펴봤다.
용굴의 주문으로 내려앉은 어둠 속. 댈런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광에, 손바닥 안의 물체가 희미하게 빛을 반사했다.
“탄환인가? 그런데 모양이···.”
펠버가 말했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총알은 총알인데, 모습이 꽤나 낯익었다.
이 대륙에 떨어진 뒤로는 본 적 없는 형상. 둥근 공 모양의 납탄이 아닌, 끝이 날카로운 유선형의 구릿빛 탄환.
기억 저편에 묻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군 복무 시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조준선 정렬! 일제사격 준비!]
난쟁이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가 공동을 쩌렁쩌렁 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저편에서 수천 쌍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마력광을 뿜어냈다.
“···이런 썩을.”
난쟁이가 소리쳤다.
[전군 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