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06화 (206/288)

206

배반자의 말로(1)

“···이놈이라고?”

댈런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펠버가 잡아온 난쟁이는 분명 인형은 아니었다.

다만 일만 난쟁이의 왕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볼품없었을 뿐.

“사, 살려주게. 흐윽, 제발 살려줘······.”

“일단은 맞는 것 같네. 다른 인형들과 생김새가 동일하기도 하고, 유독 호위병이 많더군.”

“내 뭐든지 하겠네. 제발···.”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비는 난쟁이. 큼직한 보석이 박힌 왕관은 저 먼발치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놈의 모습을 본뜬 인형들이 보여준 광오한 태도 때문일까.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며 오들오들 떠는 모습은 괴리감이 상당했다.

“거참···이 많은 황금의 주인이 이런 난쟁이라니.”

용굴에 들어온 이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상단주, 볼크마가 한마디 거들 정도로.

그때 적창이 입을 열었다.

[이상할 게 뭐 있느냐. 본디 난쟁이를 움직이는 본성은 탐욕이니라.]

“탐욕?”

[뛰어난 기술을 향한 탐욕이든, 산을 쌓을 정도의 황금을 향한 탐욕이든 간에. 난쟁이는 본능적으로 탐스런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족속이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무엇도 얻어낼 필요 없이, 제 주인의 밑에서 애완견처럼 자란 결과물이야 뻔하지.]

적창은 조소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목적을 잃은 인간이 방구석 폐인이 되는 결말이야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인간보다 더 탐욕스럽다는 드워프라면 이런 몰락도 이상한 일은 아닌 셈.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난쟁이가 살아온 삶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놈 머리를 부수면 지저룡이 대공동에서 뛰쳐나올 거란 얘기지.”

그렇게 말하며 도끼를 뽑아 든 순간.

[그럴 필요 없다.]

동굴 안을 메아리치는 전성과 함께, 일행이 있던 방 전체의 마력이 꿈틀거렸다.

“···물러서!”

펠버가 소리쳤다. 대마법사의 눈은 어느새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뻗은 손에서 수인이 완성되고, 주문이 발밑의 대지를 단단하게 굳힌 건 한순간.

허나 상대의 주문은 더 빠르고 강력했다.

드드드득─!

날카로운 석순들이 솟구친다.

대지계열 대마법사인 펠버의 주문을 부수고, 단번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단단한 가시밭길.

단지 자라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쐐기를 만들어내며 위협적으로 변이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방 전체를 뒤덮는 빼곡한 가시덤불로 자라날 기세였다.

“엘르― 메랄리아!”

펠버는 다급하게 수인을 연달아 맺어내며 천장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방의 천장이 무너지며 수백 개의 종유석이 아래로 뻗어내려왔다.

쿠지지직!

수백의 종유석이 수백의 석순과 맞닿으며 하나가 되어가고, 석순의 기괴한 뒤틀림이 그제야 멈춘다.

갑작스런 주문의 전개에 숨을 몰아쉬는 펠버와, 스승을 부축하며 다음 술식을 보조할 준비를 시작하는 토미.

댈런은 도끼를 뽑아든 채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그때 돌기둥으로 빼곡하게 뒤덮인 방 저편에서, 감탄한 듯한 전성이 울려퍼졌다.

[주문을 부수는 대신 하나의 마력 흐름으로 얽어서 주문의 진행을 멈추다니···흥미로운 발상의 전환이다. 생각보다 더 재능 있는 술사였군.]

저벅.

큰 방을 가득 채운 돌기둥 사이로 들려오는 발소리.

댈런은 도끼를 쥔 채 난쟁이 왕을 슬쩍 곁눈질했다.

살려달라며 벌벌 떨던 난쟁이 왕은 이미 수많은 석순에 몸이 꿰여 죽은 채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잔혹한 죽음. 부릅뜬 두 눈이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고통을 생생하게 내비친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이 있나 보군. 내 손으로 난쟁이 왕을 죽인 게 의외였느냐?]

돌기둥 저편의 목소리는, 그 눈길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어디 얼굴이나 보자꾸나.]

쿠르르르륵···!

돌기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땅과 천장에 뿌리를 박고 있음에도, 마치 얼음판 위를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수백 개의 석주.

부드럽게 좌우로 갈라지며 도열하고, 그 너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주인을 드러낸다.

저벅.

남자의 머리칼은 짙은 갈색이었다.

장대한 골격을 뒤덮은 허름한 가죽옷. 그 아래에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근육들.

[후우.]

작은 한숨 한 번에 용굴의 마력이 요동친다. 세로로 찢어진 두 눈동자가 일행을 훑어보다가, 마침내 댈런을 응시하며 멈췄다.

시선이 맑은 호박색으로 빛났다. 용이 입을 열었다.

[다시 인사하마. 용신의 오른쪽 권갑, 타테앙카트 파르지움이니라.]

***

[오랜 잠이었다.]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끝이 다가오지 않는 듯 보였지. 수천 년을 지나 보내도 다가오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결말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으니······. 이런 유희라도 없다면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다. 그렇지 않으냐?]

“······.”

[내 용굴을 누군가 건드렸다 해도, 평소라면 잠에서 깨는 것마저 거부했을 것이다. 버러지들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것보다는, 그저 금쪼가리 몇 푼 주고 보내는 게 더 나은 일이니까.]

남자가 손짓했다. 그러자 돌기둥들 사이에서 금빛이 쏟아져 남자의 몸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화, 황금···!]

그건 진짜 금이었다. 방 안에 가득하던 금화와 장신구들이,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액체로 변해 주인에게 흘러든 것.

‘쉽지는 않겠군.’

금빛 갑옷으로 변해가는 황금을 본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조금 전 방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이나, 금을 압축시켜 갑옷을 만들어 입는 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줌의 저항도 없이 흘러가는 일대의 마력이 진짜 문제.

용굴의 모든 마력과 환경이, 주문 한 줄 없어도 저 남자의 의지대로 흘러간다는 게 그 핵심이었다.

[대악마를 놈의 지옥에서 상대한다고 생각하거라. 비록 환상세계의 무한한 가능성 위에 세워진 곳은 아니나, 용굴에 축적된 힘은 그 비슷한 가능성의 지평 정도야 열어낼 수 있으니까.]

적창이 경계심 묻어나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고룡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댈런의 마력 감지력으로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하나의 주인을 위해 수천 년간 쌓여온 주문의 총체.

흙먼지와 모래가 쌓이다가 굳고 지층이 되어가듯이, 오랜 기간 중첩된 주문과 마력이 하나의 세계처럼 작동해간다.

본디 영역이나 지옥은 무한한 가능성의 환상세계 위에 지어진 세계.

그 주체인 초월자나 악마의 의지와 본성에 따라, 물리적인 법칙은 물론 존재의 개념 자체까지도 구부리고 새로이 창조해낸다.

용굴은 그와 비슷한 환경이었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쌓아 올려진 끝에, 세계의 법칙을 거부할 잠재력마저 갖췄다는 점에서.

“노인장. 상단주는 맡기겠소.”

“뒤는 안심하게나. 필요하다면 언제든 지원하겠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선을 비트는 영역의 힘이라도, 그 근본은 대지의 기억을 읽는 것에서 출발한다.

같은 대지 계열 술식을 다루는 지저룡을 상대한다면, 그 뿌리부터 원리가 해체될지도 모르는 일.

반동이 강한 힘인 만큼 조심히 다룰 필요가 있다. 볼크마와 토미를 감싸며 물러나는 펠버를 보고 남자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혼자 덤비려느냐?]

“누굴 지키면서 싸우는 건 잘 못하는 편이라.”

[오만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6위계의 벽을 완전히 넘지도 못한 주제에···흡!]

사라진 댈런의 신형. 호흡을 끊고 짓쳐들어온다.

카아아앙!

남자가 만들어 낸 황금의 검과, 댈런의 유물 도끼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저, 적창!]

도끼 위에 넘실거리는 검붉은 불꽃. 그 힘의 근원을 눈치챈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네 이름과 권능은 분명 용신께서 앗아가셨을 터인데!]

“만담은 필요 없겠지.”

콰아앙!

검붉은 화염이 폭발하며 두 사람을 밀어낸다.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돌기둥이 우두두 부서져 나가며 공간이 탁 트였다.

[내가 분명히 봤다! 네의 몸뚱이가 무너지고 용골이 바스라지는 걸! 심장의 빛이 꺼져가는 최후의 순간을!]

[혀가 길구나. 파르지움.]

댈런의 입에서 새어 나온 전성. 허나 그 주인은 댈런이 아니었다.

무너진 돌기둥 사이를 메아리치는 건 이 세계에 존재할 리 없는 고룡의 목소리.

눈을 부릅뜬 남자를 바라보며, 댈런은 왼손으로 새로 장만한 창을 뽑아 들었다.

[허나 정 궁금하다면···.]

송곳니 사이로 흘러나온 전성과 함께, 검붉은 잔영을 남긴 그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사라지고.

[죽기 전에 재주껏 알아보거라.]

콰과과과과─!

화염이 장대한 기둥을 세워내는 것과 동시에, 용굴 깊은 곳의 지반이 녹아내렸다.

***

지저룡의 용굴은 깊고 넓었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수많은 통로와, 그 사이사이 펼쳐진 크고 작은 방과 공동들.

진룡의 권능과 비례하게 확장되는 용굴이기에, 지저룡의 거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세계나 다름없었다.

그 지저세계의 작은 호숫가.

「뇌격(雷擊)」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섬광이 번뜩이더니, 이내 거대한 빛의 기둥으로 변해 수면 위에 내리꽂힌다.

뻐어어엉!!

단번에 깊은 호수 바닥까지 꿰뚫은 낙뢰. 그 반동에 높이 수 미터의 파도가 울컥 치솟는다.

황금빛 갑주를 입은 남자는 파도 사이를 질주했다. 방금 낙뢰가 떨어진 지점, 그 위에 서 있는 전사를 향해서.

[황금이여!]

콰르르르륵!

가벼운 손짓에 공동의 천장이 무너지며 금덩이들이 쏟아진다.

반짝이는 목걸이와 팔찌, 왕관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새로운 형체로 빚어졌다.

까마득한 천장 위를 금빛으로 번쩍이는 수백 정의 창칼이 수놓은 순간.

쐐애애애액―!

한계까지 압축된 황금의 무구들이, 진룡의 마력을 머금고 비처럼 쏟아진다.

“그 주인에 그 개라더니. 난쟁이들처럼 총알이고 무기고 쏴대는 걸 좋아하는군.”

황금의 비가 떨어지는 호수 한가운데에서,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가 발을 굴렀다.

쿠웅─

묵직한 걸음에 수면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호숫가를 관통하고도 남은 뇌격의 잔류가 드러난다.

잔재하는 전류를 모조리 그러모아 새로운 술식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게 빚어낸 건 술사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전부 동원해 만든 캐릭터, 희대의 전격술사인 댈타리온이 남긴 다섯 가지 비기들 중 하나.

「취우진청(驟雨振靑)」

발밑에서 일어난 파문을 기점으로, 수백 가닥의 푸른 전광이 줄줄이 일어난다.

콰지지지지직!

호수의 물을 싹 날려버린 벼락의 파도가, 황금이 빗발치는 하늘을 향해 내달렸다.

─────!!

황금과 청광이 뒤섞이며 장대한 폭발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화려한 폭발을 배경 삼은 채,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는 두 신형이 뒤얽히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에 빌붙어 사는 거냐! 용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지저룡은 노호성을 지르며 권격을 내질렀다.

단단한 권갑을 두른 주먹이 뻗어질 때마다, 공간의 일그러짐과 함께 황금빛 마력이 폭발한다.

「술식갑주(術式甲冑)」

「화염갑(火焰甲)」

댈런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온몸을 갑주처럼 휘감은 채, 팔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아룡의 숨결에 버금가는 화염을 쏟아낸다.

「회명(回冥)」

「팔연답산(八聯踏散)」

영역의 개방 없이도 여덟으로 늘어난 인영이, 동일한 불꽃을 뒤집어쓴 채 손발을 놀리고.

「홍염주(紅炎柱)」

「삼력거반(三力擧反)」

개중 셋은 뒤로 빠지더니 수인과 함께 불기둥을 소환해, 호수가 있던 구덩이 전체를 지옥의 불구덩이나 다름없게 만들어버린다.

[――――!]

용언을 담은 포효가 공동을 울렸다. 그러자 호수 바닥의 대지가 통째로 엎어지며 지옥불처럼 타오르던 불길이 일거에 꺼졌다.

오히려 뒤엎어진 토사가 형태를 갖춰내며, 공동을 가득 뒤덮는 기괴한 골렘의 군대로 일어나기 시작.

캬아아악!

쿠르르륵!

그야말로 용굴에 서린 마력이 진룡에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쥐여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허나 댈런은 무덤덤한 얼굴로 다음 술식을 뽑아낼 뿐이었다.

‘아르보르. 창.’

[옙!]

아공간에서 쏟아진 창들이 수십 마리의 불뱀이 되어 골렘의 군세를 휩쓸기 시작하고.

「발화(發火)」

「성류옥(聖蘲獄)」

새빨간 성화의 줄기가 커다란 감옥처럼 펼쳐져, 댈런과 지저룡이 선 자리를 전장에서 완벽하게 격리한다.

어차피 서로가 한 수씩 숨긴 채 이어가는 싸움이다.

치고받은 지 벌써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쪽은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본연의 진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황.

승패는 누가 마지막 패를 먼저 까보이느냐가 결정하게 될 터. 혹은 누가 그 이전에 힘이 다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

다만 수천 년 먹은 진룡과 체력전으로 들어가기에는, 용굴이라는 환경이 그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바.

그렇기에 댈런은 일부러 염열계 술식마다 검은 화염을 섞어가며 상대방을 도발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구나, 버러지 같은 놈! 적창의 힘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당장 고해라!]

지저룡의 호박색 눈이 점점 더 광기로 물들어간다.

배신의 순간은 배신당한 이보다 배신한 이가 더 잘 기억한다던가.

비록 일말의 죄책감마저 존재하지 않더라도, 언뜻언뜻 그 순간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물며 뒤통수를 친 동료가 부활했다는 사실만큼은, 아무리 수천 년을 살아온 용이라도 인내할 수 없을 게 분명한 일.

“지랄.”

[이 난쟁이만도 못한 놈이!]

지저룡의 호박색 눈은 언제부턴가 또렷한 초점을 잡고 있지 못했다.

분노와 증오, 두려움, 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집.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채 번들거리며, 눈앞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그 모든 걸 쏟아붓고자 할 뿐.

그 인내심의 한계는 댈런의 생각보다도 빨리 찾아왔다.

[당장 보여라! 네 힘의 근원이 어디인가!]

우웅─

마력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용굴의 모든 주문이 순간적으로 단 하나의 존재에게 결집되는 현상.

진룡의 거체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황금빛 갑주를 입은 남자의 형상이 지워지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내려앉은 건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형체.

쿠구구궁······.

이미 지반이 반쯤 무너진 호수 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그 너머에서 꼬리를 뒤흔드는 건 흔히 생각하는 용의 범주를 많이 벗어난 생명체였다.

기차만큼 긴 몸뚱이와 수십 개의 다리, 네 갈래로 쪼개지는 주둥이는 사실상 지네를 닮은 모습.

일전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던 특징이라고는, 머리 위 네 쌍의 눈과 등 뒤에 돋아난 네 쌍의 날개 정도일까.

[적창―!]

쇠를 갉는 듯한 포효와 함께 숨결이 토해진다. 마치 끈적한 용암과도 같은 호박색 숨결.

초월자의 육신이라도 정면으로 맞으면 단번에 지워버릴 열기였으나, 댈런은 숨결 앞에서 피하지 않았다.

그 숨결이 코앞까지 닥치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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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그어진 검붉은 열선이, 용암 같은 숨결을 정면에서 으스러뜨렸다.

쩌저저적──!

관통한다.

하나의 열기를 다른 열기가 찍어누르고, 그 종심을 관통해 근원마저 헤집는다.

[끄아아아악!]

날개 하나가 뜯겨 나간 용이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지네처럼 긴 몸뚱이가 난리를 피우니, 공동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그 발광을 보며 댈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비릿함. 입가에 흐르는 한 줄기 선혈.

전투에서 입은 부상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이 준비한 수를 억지로 펼쳐내는 데서 비롯된 반동이었다.

[고생했느니라. 영역을 다루는 재주가 늘었다고는 하나, 아직 내 진체를 소환하기에는 아슬아슬했을 터인데.]

자박.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전성은, 그 수가 성공적이었다는 증거였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검붉은 머리칼을 본 댈런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원대로 만나게 해줬으니, 이제 남은 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가 말했고.

[그러지.]

적창이 웃었다.

「영역 개방 : 잊힌 고룡이 몸을 뉜 절벽」

어느새 등 뒤에 펼쳐진 설산의 익숙한 눈밭.

오두막과 설산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하나만을 뚝 떼어온 듯한 정경 위에서, 댈런은 아무 바위나 잡고 걸터앉았다.

뜨거운 땅속에서 한참을 싸워서 그런지, 차디찬 설산의 바위도 나름 앉아있을 만했다.

그리고 그즈음 떨어져 나간 날개를 수복한 지저룡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저, 적창! 어떻게, 아니 어째서! 지고한 용신의 무구가 필멸자의 영역 따위에 네 존재를 복속시킬 수···!]

[피차 혓바닥은 그만 놀리자꾸나.]

가볍게 지면을 밀어내자마자 순식간에 진체로 변모한다.

기괴한 형태의 지저룡과는 달리, 용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검붉은 자태.

설산의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용이, 몇 번이고 뒤엎어진 호수 밑바닥에 네 발을 디뎠다.

[용신을 찾아가기 전에, 선물로 배반자의 목 정도는 들고 가야 면이 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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