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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자의 말로(2)
쿵···.
고요한 지하공동에 둔탁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쿠르르···.
산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산사태의 전조라고 할 법한 소음.
애당초 산사태라는 단어는 햇빛 한 점 없는 이 지저세계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쿠구구구구···!
공동을 빼곡하게 뒤덮은 이끼숲이 내려앉으며, 조각나 무너지는 지반 사이로 길쭉한 무언가가 솟구쳐올랐다.
[크아아아아!!]
공동 바닥을 뚫고 올라온 건 거대한 지네의 형상이었다.
수백 미터 길이의 길쭉한 동체. 마디마다 줄줄이 달린 수십 개의 다리들.
네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황급하게 공동 천장으로 날아오르는 거대한 몸뚱이에는, 찢기고 익어버린 상처가 수없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
천장 바로 아래까지 상승한 지저룡이 긴 전성을 토했다.
용언을 내뱉은 순간 거대한 공동의 마력이 크게 출렁이고, 이내 살기 품은 주문으로 뒤바뀌어 방금 뛰쳐나온 지면 아래를 노린다.
허공을 달구는 수백 발의 마력포. 거인이 던져낸 듯 떨어지는 거대한 바윗덩이들.
이끼숲의 양치식물들이 숨겨진 이빨을 드러내고, 숲속에 거주하는 지저의 생명체들이 눈이 뒤집힌 채 원시적인 주술을 쏟아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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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너져내리는 지반 아래에서 뻗어 나온 열선은, 그 모든 투사를 일거에 지워버렸다.
투과과과과과···!
검붉은 화염이 숲을 불태운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길쭉한 공동을 순식간에 한가득 덥혔다.
공동 벽면과 천장에 맺힌 습기가 싹 날아가고, 단단한 바위마저 물렁하게 녹아내릴 지경.
쏟아지는 흙더미와 바위들 사이로 검붉은 용이 치솟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지저룡의 동체를 물어뜯었다.
[―――――!!]
길쭉한 용이 비명을 지른다. 필사의 의지가 곧 주문이 되어 휘몰아친다.
사방에서 마력의 결정들이 폭발하고, 공동의 형태 자체가 뒤틀리며 튕겨난 기반암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아수라장.
사실상 땅 아래의 지옥이나 다름없는 환경변화였다. 일반적인 생명이라면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마저 불가능한 격변.
“이런 시발.”
약간 멀미가 날 것 같은 느낌에 욕을 뱉으며, 댈런은 그 한가운데에서 허공을 밟고 뛰어올랐다.
투웅―
허공에서 갈지자를 연달아 그리는 신형. 위협적인 마력의 소용돌이와 날아드는 바윗덩이를 피해내며, 두 용이 얽혀 있는 곳으로 빠르게 접근한다.
[크아아아아악!]
그 순간에도 지저룡의 비명이 공동을 쩌렁쩌렁 울린다. 댈런은 눈을 부릅뜨고 그 신형을 쫓았다.
[용골검의 주인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쏟아지는 낙석과 흙더미 폭포 사이, 선명하게 떠오른 알림창이 엿보인다.
그 아래쪽 놈의 몸뚱이에는 몇 분 사이에 새로운 상처가 수없이 뒤덮여 있었다.
반면 적창의 비늘에는 약간의 흠집만 나 있을 뿐, 처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태.
[적창···어떻게 된 일이냐! 분명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는데!]
[헛소리도 풍년이구나. 백검과 용신의 협공 앞에 무너졌을 뿐, 네 알량한 주먹은 운 좋게 마지막에 닿았을 뿐이다.]
우드득!
비웃음과 함께 날개 하나가 짓씹혀 떨어져 나간다.
이미 몇 번이나 으스러진 뒤라 그런지, 날개의 재생속도는 한층 더뎌졌다.
그건 똑같이 한 손에 꼽는 용신의 최측근이라도, 전투력 하나만큼은 그 안에서 명확하게 격이 나뉜다는 증거였다.
문제가 있다면 이 일방적인 공세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적창은 살아생전의 힘을 되찾은 게 아니다.’
진룡은 신비 그 자체인 영육에 기반을 둔 생명.
허나 눈앞의 검붉은 용은, 어디까지나 댈런의 영역을 바탕으로 현현한 존재였다.
전격술사 댈타리온과 싸울 때도 그랬었다.
순간적인 출력의 최대치에는 제한이 없을지언정, 그 힘을 오래 지속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
아직 6위계에 다다르지 못한 영역이 바탕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싸움에서는 그녀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없었다.
콱!
마력의 파도를 거슬러 적창의 목 뒤쪽에 올라탄다. 비늘을 붙잡은 댈런은 재빠르게 의념을 전달했다.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길어야 몇 분.]
고룡의 목소리가 심중을 파고들었다.
[허나 걱정 말거라. 그 전에 놈을 떨어뜨릴 것이니.]
말이 끝나자마자 주둥이를 크게 벌려 지저룡을 물어뜯는다.
다리 하나가 덜렁거리다 떨어져 나가고, 단단한 비늘이 죄다 으스러지며 피가 쏟아진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창의 목덜미를 밟고 도약했다.
지저룡의 몸뚱이 위에 착지한 뒤, 길쭉한 동체를 짓밟으며 머리로 내달리는 발걸음.
[떨어져라! 버러지 같은···.]
[닥치거라!]
투과과과과과―!!
댈런의 의도를 눈치채고, 전성을 이어갈 틈도 없이 파고드는 적창의 발톱.
비명과 고함이 오갈 때마다 천 단위의 주문이 소용돌이치며 두 용의 비늘을 두들기고, 날것의 마력이 합쳐졌다 떨어지면서 장대한 폭발을 자아낸다.
[그아아아악! 주인님!]
6위계 진룡들의 마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장. 그 폭풍 속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아르보르의 사슬로 몸을 고정한 채 전진한다.
적창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건 지저룡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영역을 통해 현현한 이상, 아무리 압도적인 힘이라도 무한정 쏟아내는 건 불가능한 법.
그렇기에 놈은 적창이 등장한 시점부터, 계속 도망 다니며 치명상만 이리저리 피해내고 있던 게 아닌가.
‘적창의 힘이 한계를 보인 순간, 바로 돌변해 역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겠지.’
댈런 역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적창이라는 위계를 넘어서는 존재를 소환한 이상, 영역을 다시 개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까지 모아온 것들을 이용해, 빈틈이 훤히 드러난 진룡의 목줄기를 반쯤 물어뜯는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르보르. 준비한 것들 꺼내라.’
댈런은 재빠르게 아공간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들었다.
얇고 매끈한 검신의 세검 한 자루와, 새까만 빛깔의 물약이 담긴 작은 병 하나.
전자는 얼마 전 쑴의 휘하 대악마인 용인에게서 회수한 시체, ‘시산혈해에 파묻힌 성기사’를 통해 계승한 아이템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오래 전 칼카스의 지옥에서 회수한 ‘낙성의 비약’이었고.
‘암검 튀르딩궐에는 숨겨진 일회성 이능이 있지. 영약이나 약물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뒤, 찌른 상대에게 그걸 증폭해 전달하는 것.’
촤아악!
거침없이 병마개를 따 그 내용물을 검신에 쏟아붓는다.
암검이 격하게 반응하며 매캐한 연기를 줄줄 흘리고, 얇은 검신이 비약과 같은 묵빛의 색채로 물들어간다.
「발화(發火) : 기천뢰(起天雷)」
손끝에서 일어난 신성한 불꽃이, 지저룡의 비늘 안쪽으로 파고들어 폭발하며 순간적으로 비늘 몇 장을 덜렁거리게 만든다.
콰득!
지체없이 찔러넣은 검신이 살덩이 저 안에서 산산조각나고, 그 즉시 비약의 능력을 증폭해서 전달.
[크아아악! 무슨 짓을 한 거냐!]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상처 안쪽과, 당황한 용의 전성은 효능이 제대로 먹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완벽하게 통했군.’
낙성의 비약.
별에 닿지 못한 자를 그 바로 밑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준다는 전설적인 아이템.
평범한 병사가 섭취한다고 가정했을 때도, 위계로 치면 4위계의 끄트머리까지 단숨에 능력치를 증폭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 시간이 짧고 부작용이 만만치 않으나, 전쟁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이보다 적절한 소모품도 없을 정도.
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은, 초월자에게 사용했을 때 그 효과가 반대로 먹힌다는 점이었다.
이미 5위계나 6위계에 닿은 존재라면, 비약을 섭취한 순간 일시적으로 4위계까지 능력이 하락하는 것.
‘곡검전사 캐릭터로 지옥에 갈 때 비약을 가져갔던 것도, 비약을 이용해 칼카스를 어떻게든 공략해보려는 시도였지.’
비록 당시에는 상급 악마의 입을 억지로 벌려 마시게 하는 게 여의치 않아 실패했지만.
어쨌든 성기사의 시체에서 보검을 회수하면서, 일종의 일회용 조합이 완성된 셈이었다.
이후 회차들에서도 악마 사냥에 종종 써먹었던 물건인만큼, 효능 자체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온몸이 신비 그 자체인 진룡의 저항력이라면, 그래도 완벽한 효능을 기대하긴 어려웠으나.
‘아무렴 어때.’
지금 그가 맡은 역할은 적당한 틈을 만들어주는 것뿐.
그것만으로도 적창의 이빨은 손쉽게 지저룡의 목줄기를 물어뜯고, 놈의 거체를 무너진 땅 아래쪽으로 처박을 수 있었다.
꽈과과과과···!!
붕괴한다.
두 거체가 찍어누르는 중량.
거기에 그들을 둘러싼 마력의 회오리가 빚어내는 열량.
어마어마한 물리적 총량이 지반을 부수고 내려앉히며, 공동을 연달아 뚫고 끝없는 지저세계로 가라앉는다.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부수는 기행. 그건 어지간한 초월자나 악마라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파괴였다.
적창의 무력이 용신의 이름을 딴 열세 진룡들 중에도 최상위권이라는 걸 생각하면, 전심을 담아 몰아붙일 때의 역량이 어디까지 닿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광경.
쿠과과과과───!
연달아 으스러진 천장과 지면 사이로, 어느새 용굴의 가장 깊은 대공동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창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저룡의 심처 자체를 부숴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목줄기를 물어뜯은 그대로 입안에서 거대한 열기를 쏘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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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이 대공동 한가운데 꽃을 피워낸다.
네 갈래로 갈라지며 벽과 바닥을 분쇄하고, 수천 년간 쌓여온 모든 주문과 마력을 일거에 어그러뜨리며 피어오른 열꽃.
주문의 반발과 수백 가지 술식의 이지러짐이 만들어낸 폭풍은, 멀리서 봤을 때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의 향연처럼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캬하아아아······!]
이내 코앞에서 모여든 네 갈래 열선에 직격한 지저룡의 동체가, 마디마디 길쭉하게 끊어진 채 사방으로 비산하고.
쿠궁! 쿠구구궁···!!
지금껏 무너뜨려온 공동들의 잔해와 함께 추락하며, 대공동의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후우···!]
적창은 어느새 인간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무너진 지저세계의 잔해들이 끝없이 추락하는 가운데, 힘겨운 듯 한숨을 내쉬는 검붉은 머리의 여인.
「풍영결계(風影結界)」
댈런은 그 곁에서 허공을 디디며 내려와, 떨어지는 잔해에 맞지 않도록 머리 위로 결계를 덧씌워줬다.
[섬세한 남자로고. 이러니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헛소리할 정신은 남아있나보군.”
[외부에서는 볼 수 없는 결계 안, 혈기왕성한 남녀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이라···나쁘지 않은 분위기로다.]
“수천 살 처먹은 주제에 혈기왕성은 개뿔. 지랄 말고 힘이나 빨리 회복하시오.”
일회성 능력을 소모하고 부서진 검을 놓아버리고, 댈런은 말을 이었다.
“저놈 아직 안 죽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는 직접 할 생각 아니었소?”
[맞지.]
집채만 한 바윗덩이의 비가 잦아든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결계를 해제한 댈런은 적창과 함께 대공동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 근처 곳곳에 잘린 지저룡의 동체가 보였다.
조각조각 잘린 뒤 수천 톤의 무게에 으스러지고서도, 마치 끊어진 벌레의 사지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모습.
그걸 본 적창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지저룡이 용신의 측근이 될 수 있었던 건, 불사에 가까운 놈의 재생력 때문이다.]
“그래 보이는군.”
[열셋 뿐이었던 대룡 중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었지. 같은 신비의 존재인 진룡이 입힌 상처마저도 재생할 정도였으니.]
신비 그 자체인 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똑같이 신비의 범주에 들어간 힘뿐.
그중에도 진룡의 힘은 다른 진룡에게 가장 치명적인 힘 중 하나였다.
댈런 역시 아직 초월자의 자리에 닿기도 전, 영락한 청린의 목을 적창의 흑염을 빌려 떨어뜨리지 않았었나.
그 적창이 진체로 현현해 입힌 상처들마저 끊임없이 재생하던 걸 보면, 지저룡이 불사에 가깝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흐윽, 흐으···!]
물론 결과적으로 놈은 빈사상태에서 숨만 붙어있을 뿐.
헐떡거리며 박살난 대공동의 중앙에 널브러진 지저룡은, 머리통에 달린 십여 미터의 마디와 다리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기에 썩 괜찮은 꼴이구나. 그렇지?]
[저, 창···!]
[이대로 널 버려두고 가면 어떻게 될까. 네가 그렇게도 따르는 용신이, 혹은 그 오른팔인 백검이 와서 널 구해줄까?]
[흐으윽······.]
적창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지저룡의 얼굴 정면에 섰다.
[살고 싶으면 말해보거라. 나의 충실한 수하이자 벗이, 그날 왜 내 등을 찔렀는지.]
[······.]
[이름을 빼앗긴 내 육신과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