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08화 (208/288)

208

배반자의 말로(3)

[말하거라. 왜 그랬지?]

[······.]

침묵하는 지저룡의 주둥이 앞. 적창은 계속 채근하는 대신 창을 뽑아 들었다.

검붉은 흑염으로 빚어진 창이 섬뜩한 울림을 흘렸다. 심연의 용암을 견디는 비늘마저도, 저 창끝의 열기는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용신과 백검은 널 구하러 올 리 없다. 나를 한 번 배신한 너는 그들에게도 버림패일 뿐이라는 걸 잘 알겠지.]

[끄윽······.]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고통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침묵하거라. 조만간 네 비범한 재생력을 저주할지도 모르겠구나.]

검붉은 창끝이 여덟 개의 눈 중 하나를 부드럽게 쓸었다. 갈라진 눈꺼풀 사이로 하얗고 붉은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금세 부글거리며 재생되기 시작하는 눈알. 갈등이 서리던 나머지 눈동자에, 끝내 체념이 내려앉았다.

[···용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너도 잊지 않았겠지.]

지저룡이 주둥이를 열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심상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다. 천룡(千龍)의 대변자이자 신비 위의 군림자. 불멸하는 반신인 우리에게 신이란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끝없이 번성하는 필멸자들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지.]

[······.]

[우리가 느낀 그 위기감이, 우리에게도 신이 필요하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적창은 대답 없이 지저룡을 응시했다. 두 용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댈런은 몇 걸음 뒤에서 삐딱하게 선 채로 그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베베 꼬아 말하는 건 적창이나 지저룡이나 비슷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알아먹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진룡은 태어날 때부터 신비 그 자체인 종족이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본능적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알게 되고, 완전히 성장하는 것만으로도 5위계에 안착하는 존재들.

적창이나 버번 역시 6위계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종족 전체가 반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마저 인류의 번성에 위협을 느꼈다는 건가.

‘이해 못할 생각은 아니다.’

지구와 이곳 대륙, 두 세계에 살아본 댈런이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모두 시대상이나 사회의 양상은 다를지언정, 대부분의 땅과 바다가 인류의 통치하에 놓이지 않았던가.

열등한 필멸자라고 치부하던 종족이, 수 세기 만에 전 대륙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그 무의식이 용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군.’

복잡한 퍼즐이 머릿속에서 맞춰진다. 일전에 적창이 말했던 악신들의 근원과, 지저룡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져갔다.

악신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다가오는 끝은 어째서 그렇게도 막기가 어려운가.

“······.”

댈런 자신은 왜 이 땅에 떨어졌나.

소용돌이치는 상념들 사이, 지저룡의 목소리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용신은 우리 모두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런 그가 다섯 번째 대지옥을 만들기로 선택한 거다. 열세 대룡들 중 찬성이 아홉. 중립은 셋. 반대는 너 하나뿐이었지.]

[불멸성을 억지로 뒤집어썼을 뿐, 흙 속의 미물만도 못한 존재가 악마들이다. 그런 놈들과 동일선상에 놓일 생각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 역시 없느니라.]

[크흐흐···어쨌든 그건 모두의 의지였다. 따지자면 네가 우리 종족 전체를 배신한 거 아니었나?]

갈라진 주둥이가 웃었다. 용암처럼 걸쭉한 피와 침미 주르르 흘러내렸다.

[네가 맞은 건 그 배신에 합당한 결과였지. 가장 아름다운 용이라 불리던 네 육신은 용신이 흡수했고, 영혼의 자투리에 남은 자의식 찌꺼기는 에낙사구스에게 팔아넘겼다. 나 역시···심연의 용암을 다룰 힘을 얻었고.]

[그 결과로 지금의 뒤틀린 몸을 얻었느냐.]

[뭐 어떤가···그럼으로써 너는 이 세계에서 영영 모습을 감췄으니!]

훅 뒤틀리는 공기. 일대의 마력이 재조립되며 수백 가지의 술식으로 빚어진다.

대공동 곳곳에 오랫동안 축적된 주문이 단번에 여력을 그러모으고, 저릿한 살기를 뿜어내며 두 사람을 노린 순간.

[날 때부터 가장 고귀한 진룡으로 태어났다던가! 어떻게 되살아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너는 진짜 적창이 아니다! 너는 이미 사라진 존재의 망령···!]

[잘 들었느니라.]

피싯─

촛불 꺼지는 듯한 가벼운 소음과 함께, 지저룡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으아, 아아아아아···!!]

[혹여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나 했지만···그런 게 아니었군.]

화르르르르!

타오른다.

용의 비늘이 녹진하게 눌어붙고, 불붙은 근육과 내장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반으로 갈라진 머리 안쪽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대공동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댈런과 적창을 노리던 주문들 역시, 이미 흑염의 창끝에 부서진 지 오래였다.

그 일격이 한계였는지, 개방된 영역의 힘이 다하며 적창의 신형 역시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적창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말했다.

[고맙다. 덕분에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구나.]

***

타다닥. 타닥······.

신비를 연료 삼아 피어오른 불길은 꽤 오랫동안 타오르다가 사라졌다.

지저룡의 비명 역시 어느 순간 잦아들더니, 머지않아 꿈틀거림마저 완전히 멎었다.

댈런은 반으로 잘린 채 새까맣게 타버린 머리통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때 심상 너머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룡의 사체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다. 머리 부분을 남기지 못해 미안하구나.]

“······.”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성기사가 요리를 꽤 했었지. 걱정 말거라. 인간과 달리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으니 말이다.]

웃음기 머금은 전성.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걱정되는 건 그쪽이군. 괜찮은 거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무에 있느냐. 어차피 예상하던 결과. 확신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니라.]

“그렇군.”

[나무의 아공간이 충분히 넓어졌을 테니, 그 안에 넣어서 회수해가도록 하지.]

본인이 괜찮다면야 할 말은 없지. 수천 살의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닐 테니, 복잡한 감정 정도야 알아서 잘 추스릴 테였다.

댈런은 무너진 대공동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널브러진 지저룡의 시체를 회수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적창이 쏘아낸 마지막 열선에, 놈의 길쭉한 동체가 수십 조각으로 잘려 사방으로 내던져진 탓.

지저세계가 무너지며 떨어진 셀 수 없는 잔해들 때문에, 개중 몇몇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아예 찾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아공간에 틀어박힌 악마가 사슬로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나머지 조각들 역시 회수하는 데 한 세월이 걸렸을 테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헤엑, 헥······.]

“엄살 부리지 말고.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껏 황금을 주워 담아도 좋다.”

[화, 황금? 주인님···!]

감동에 절여진 목소리가 아공간에 울려 퍼진다. 이미 아공간에는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있었음에도, 악마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물론 그렇게 열심히 쌓아놓은 황금은 결국 댈런의 소유였지만, 황금에 미친 악마는 아직까지 그 사실에 생각이 닿지 않은 듯했다.

굳이 저 감동의 불꽃을 꺼뜨릴 필요는 없겠지. 댈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불타버린 지저룡의 머리 곁에는 아까부터 잿빛 시체 하나가 알림창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골검의 주인의 시체]

- 용신에게 도전한 용살자의 시체다. 전란 속에서도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닦는 데 집중해 끝내 용의 부산물을 가공할 수준의 기술을 손에 넣고, 스스로 제작한 무구로 인류 최후의 보루인 팔시온을 지원했다. 두 자릿수의 진룡을 하늘에서 떨어뜨리고 잠에서 막 깨어난 용신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결국 패배해 도망치던 중 용신의 권갑에게 사망했다.

‘이로써 세 개째인가.’

모니터 너머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해온, 수백 회차에 달하는 시간선과 결말들.

그중에도 초월자의 위계에 닿았던 시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처음은 세계의 이빨 산맥에서 회수했던 무투가의 시체.

두 번째는 쑴의 대군세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얻어낸 전격술사의 시체.

그리고 이번에 회수할 세 번째 시체는, 초월자의 결말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부류의 캐릭터였다.

[···지저룡의 사체는 다 회수했느냐?]

“대충은 끝냈소. 나머지는 너무 깊이 파묻혀서 가져가기 힘들 것 같군. 써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도 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첫 포효라면 심장과 골수로 네 뼈대를 새로이 빚어줄 수 있을 것이니라. 용린과 용골은···무구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적창이 약간 노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댈런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기며, 허리춤의 무장을 점검한 뒤 손을 뻗었다.

[단지 이 시대에 용골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장인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단순히 깎아내는 거야 어렵지 않으나, 신비를 온존한 채 무구로 가공할 수 있는 건 내 시대에서도 거의 실전된 기술이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오.”

잿빛 시체에 닿은 손끝. 용의 입안에서 짓씹힌 초월자의 결말이 천천히 부스러진다.

“지금부터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초청할 생각이니까.”

[···뭐라?]

손끝으로 흘러들어오는 희뿌연 빛의 가루들. 시체가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용골검의 주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텅 빈 허공에 새 알림창이 떠오른 순간, 빠르게 나열되던 문자들이 일순 주춤하며 멈추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아득해지며, 현실과는 다른 세상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

설산의 낡은 오두막.

그 뒷마당에 선 댈런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없군.”

사냥꾼의 도구들이 가득한 뒷마당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마당을 뒤덮은 눈 표면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듯 매끄러웠고, 들리는 거라고는 차디찬 눈보라를 실어 나르는 바람 소리뿐.

마치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댈런은 머리를 긁적이며 오두막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여전히 초월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사람은커녕 그 흔적조차도 찾기 힘든 상황.

발끝으로 앞마당의 눈밭을 헤집던 댈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능선 너머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쪽에는 연기가 날 만한 요소가 없을 텐데?’

댈런은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이곳은 하늘에서 검붉은 먹구름이 불과 벼락을 쏟아내고, 온갖 이질적인 비경이 도처에 깔린 환상세계의 영역.

다만 이 세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댈런이 아는 바로, 한 줄 연기가 피어오르는 땅은 아직까지 빈터에 가까웠다.

적창이 머무는 절벽이나 이색의 비룡이 맴도는 골짜기 역시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애꿎은 불기둥이 숲을 직격하지 않은 이상 연기가 한 줄만 피어오르기는 쉽지 않은 일.

댈런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람 사이를 파고드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캉···. 캉···.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익숙한 격철음. 대륙의 어느 도시에 가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

능선을 넘어가자 설산의 숲 한복판에,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대는 대장간이 보였다.

대장간에 도착한 댈런은 굳게 닫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

반응은 없었다. 그저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만이 끊이지 않았을 뿐.

깡! 깡!

망치질이 한창이라면 문 두드리는 소리야 못 듣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법. 댈런은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정확히는 그러기 위해서 문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깡―쿠직!

우렁찬 망치질 소리와 함께, 날붙이 하나가 문을 뚫고 쑥 튀어나온다.

날카로운 단도는 반응할 틈도 없이 댈런의 손바닥을 꿰뚫고 박혀버렸다.

콰아앙!

이내 강력한 돌개바람이 터져 나오며 문짝을 그대로 날려버리고, 수백의 번쩍임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고얀 놈이로고. 그 잠시를 못 기다려서 흐름을 깨먹으려 드느냐?”

스르르릉···!!

그건 무구들이었다.

침입자를 겨눈 채 허공에서 느릿하게 유영하는 수백 정의 무구들.

평범한 검이나 창부터 채찍과 말뚝, 활과 화살, 가시 박힌 건틀릿이나 각반까지.

언제든지 쏘아질 수 있다는 듯 번뜩이는 수많은 날붙이의 뒤쪽에서, 구불거리는 수염과 머리칼을 쓸어 넘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종결된 세계선의 희망들을 뒤섞어 만든 혼종아. 내 시간선의 하잘것없는 가능성마저 탐하러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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