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1화 (21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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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3)

용살자 댈루카힘은 장인으로서 초월성을 거머쥔 존재다.

수백 회차에 달하는 플레이 중에도, 그 자리에 오른 캐릭터는 열이 채 되지 않는 바.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키운 캐릭터이기에, 플레이 중에 만든 장비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처음 봤던 그 고즈넉한 대장간과는 달리, 이곳의 장비들은 절반 이상이 본 적 없는 물건들이다.’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

이전의 두 캐릭터와는 달리, 눈앞의 대장장이는 사후에도 끊임없이 스스로의 기술을 갈고닦았던 것일까.

댈런의 의문에 댈루카힘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역천의 우물 안에서 시간의 흐름은 의미를 상실한다. 영겁인 동시에 찰나라는 이질감은 초월자들에게도 생소한 감각이지. 초월의 벽을 넘지 않고서는 미치지 않고 견디는 것 자체도 불가능할 정도니까.”

“주문쟁이처럼 이야기하는군.”

“···할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수행에 도가 튼 술사나 무예가라면 몰라도, 나는 한평생 손을 가만히 놀린 적이 없는 몸.”

캉!

망치가 불꽃을 튀겼다.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두들겨지는 성검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온전한 형상을 되찾은 상태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검신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지고, 손잡이 부분이 보강된 정도.

가볍게 서너 번, 이어서 강하게 한 번 두드리는 망치질은 건성건성 하는 듯 보이면서도 순식간에 검신의 예기와 균형을 잡아갔다.

“그래서 역천의 우물 안, 나만의 공간에 대장간을 차리고 무구를 만들었지. 이제는 쓸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 손은 습관을 따라 잘도 움직이더군.”

그래서 이토록 많은 무구들이 대장간 전체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건가.

어쩌면 다른 두 캐릭터와 달리 그가 오두막 뒷마당에 나타나지 않은 것 역시, 사후에까지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그르르르!

상념을 흘려넘기는 사이 작업은 완벽하게 막바지로 향해 간다.

섬세하게 두들기고 남은 열기를 식히며, 날을 갈아주는 마무리 과정.

풀무처럼 생긴 장치에서 순백의 냉기가 훅 뿜어져 나오고, 벌겋게 달아오른 성검이 그 속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대장장이의 눈이 순간 이채를 띠었다.

“···검이 서릿발 왕좌의 힘을 담고 있군.”

잘게 떨리는 검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 두툼한 눈썹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묻는다.

“평범하게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닐 텐데···. 설마 차리나와 친분이 있었나?”

“···글쎄.”

그걸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일까.

같은 전장에서 악신에 맞서 싸운 전우였으나, 친구라 말하기에는 함께한 세월이 짧은 감이 있었다.

기껏해야 일주일 남짓한 시간. 얼굴을 본 건 고작 몇 번뿐.

그마저도 대부분은 작전 회의 때였고, 생전에 단둘이서 독대한 건 단 두 번뿐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그리고 끝나갈 무렵.’

까마득히 높게 솟은 에클라힘 궁전의 첨탑. 그 위에서 주고받았던 길지 않은 대화는 어마어마하게 큰 분기점으로 돌아왔다.

대제국의 통치자이자 6위계의 초월자가, 그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던진 결단이라는 분기점으로.

“······.”

하늘과 하늘이 격돌하는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은 여전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대체 뭘 믿고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일까. 그러고서도 어떻게 그토록 평안한 표정으로 사후에 그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같은 세상의 흐름을 수백 번 돌려본 그의 눈으로도, 그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결정이었다.

“···유감이군. 괜한 걸 물었네.”

가라앉은 눈에서 무언가 읽기라도 한 것일까. 성검을 쥔 대장장이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어. 설마 그 차가운 여제가 왕가의 힘을 선뜻 내어주다니. 거기다 자네 얼굴을 보니 자신의 안위까지도···.”

“지나간 일이오. 외눈의 명공은 많이 슬퍼했지.”

“비요른? 그 유리눈깔이 살아있는가?”

캉!

망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장장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져 있었다.

***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

르베론과 더불어 미궁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인 그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회차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었다.

대부분의 영웅급 NPC들을 꿰뚫고 있는 댈런이, 유독 비요른에 대해 깊게 알지 못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댈루카힘으로 플레이했던 회차에서도 안타깝게 사망했었지.’

완전한 동료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회차.

잘 풀리면 언젠가는 협업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으나, 제국 출신 자객들이 비요른을 암살하면서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용골 무기를 만들기 위해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 중이던 댈루카힘은, 거의 1년이 지나 도시로 돌아오고서야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럴 수가···비요른 그 친구가 살아있다니······.”

모니터 너머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장인 대 장인으로 품고 있던 호감이 상당했던 걸까.

대장장이 특유의 굵고 거친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울먹이기 직전이었다.

“혹시 르베론, 그 친구는···.”

“···그러고 보니 그 회차 장인 NPC들이 운이 좀 없긴 했군.”

“무슨 이야긴가?”

“아니오. 멀쩡히 잘 살아있소. 지금쯤 갈리오스 상단 밑에서 대량으로 발주를 받고 있겠군.”

댈런은 간단하게 두 장인과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수도 의뢰에서 우연히 르베론의 조카딸과 함께했던 것. 그리고 이후 그녀에게 대장간을 소개받으며 빚을 탕감해주고 갈리오스 상단에 연결해줬던 과정.

더불어 시에나의 실종으로 르베론이 도움을 청해왔던 일과, 북부 대륙을 여행하는 내내 함께하게 되었던 여정까지.

“···그랬군. 그랬던 거야.”

잘게 떨리던 대장장이의 어깨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차츰 진정되었다.

끝나갈 무렵 안정된 호흡을 되찾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과연 예언은 사실인가.”

벌떡 일어난 대장장이가 성검을 모루 위에 올려뒀다. 그는 댈런을 이끌고 대장간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나가세. 한 가지 더 줄 게 있어.”

***

댈루카힘의 영역,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외부에서 거대한 유선형의 굴뚝처럼 보이는 이 공방은, 처음의 고즈넉한 대장간에 비해 겉으로 보이는 규모만 수십 배에 달하는 시설이었다.

대장간과 숲 사이의 널찍한 공터 역시, 발 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키이이이이···.

바퀴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연마기가 검신과 만나 불똥을 흩뿌린다.

치이이이···!

거푸집 안에 붉은 쇳물이 부어지며 김이 끓어오르고, 그 곁에서는 정교한 기계가 반쯤 달궈진 철사를 꼬아댄다.

자동화된 장비들이 저 혼자 무구를 만들거나 다듬는 모습.

어떤 간섭도 없이 순식간에 수십 자루의 검을 뱉어내는 모습은, 지구의 자동화된 공장들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충분히 발전한 과학은 마법처럼 보인댔나.’

분명 그 반대도 성립할 것 같단 말이지.

이 땅에 떨어지고서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주워섬기며, 댈런은 대장장이를 따라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나는 한평생 망치를 두드리고, 재료를 구하러 다녔다네. 일에 파묻혀 살았지. 잠도 거의 자지 않았고, 벗이며 동료들과 함께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어.”

앞서 걸어가며 기계들을 향해 내젓는 가벼운 손짓.

그러자 수십 가지 장비들이 단번에 작동을 멈추고는 우르르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망치로 두드릴 수 있는 끝을 보았네. 도시로 돌아간 뒤에는 필사의 각오로 옛 벗들이 모여든 인류의 보루를 지켜냈지. 그건 그동안 소홀했던 시간에 대한 사죄의 의미였어.”

“······.”

“허나 그제야 알았다네.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과 믿음을 저버린 관계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종말을 앞에 두고 이전의 일상은 되찾을 수 없는 허상이었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한 걸 깨닫게 되는 거지.”

대장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하지. 예언의 주인공이라기에, 저 혼자 잘난 맛에 사는 오만방자한 놈팽이를 생각했네. 예전의 나처럼 말이야.”

어느새 대장간 안쪽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수많은 장비들. 널찍하게 만들어진 공터 한가운데에서 댈루카힘이 멈춰 섰다.

“하지만 자네는 다르군. 한없이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주변은 물론 발아래까지 살필 줄 아는 사람이야.”

“말했다시피 뭐가 소중한지 깨달았을 뿐이오.”

“크하하하!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마치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이야기하는군. 인생을 두 번쯤 살아보기라도 한 건가?”

대장장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댈런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6위계에 오르지 못했다고 했지.”

웃음을 멈춘 대장장이가 물었다.

“그렇소만.”

“과거를 딛고 현재를 개변하며, 나아가 미래를 선택해 움켜쥐는 것. 선배들이 남긴 단서는 참 애매모호해. 그렇지 않나?”

가볍게 꿈틀거리는 수염.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6위계임을 증명하는 경계선은 두 가지가 있지. 신비를 비틀 수 있는 위상, 그리고 영역을 완전하게 개방하는 능력.”

“······.”

“후자는 시간이 걸릴 거야. 자네는 단순한 위계의 숫자놀음으로 단정하기에는 이미 터무니없이 넓은 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역천의 우물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흡수한 탓이겠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쿠르릉······.

어디선가 들려온 싶은 울림. 먹구름 너머의 뇌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가까운 소리였다.

대장장이는 어느새 하늘로 손을 뻗고 있었다. 은빛 마력광이 눈동자에 번뜩이고, 펼친 손끝 사이에 아득한 의념이 일렁거렸다.

“사후에야 검의 의지에 닿을 수 있었네. 생전에 익힌 비검 덕분이었지. 재밌게도 자네도 같은 걸 익힌 모양이더군.”

은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서서히 감기고, 대장장이의 거친 손이 허공을 움켜쥔 순간.

“그 덕분에 자네에게 이 마지막 깨달음을 건넬 수 있을 듯해.”

쿠르르릉···!!

은빛의 샘물이 터져 나온다.

널찍한 대장간의 굴뚝 위로 쏟아지는 수천 수만의 병장기.

장창, 태도, 깃발, 흉갑, 철퇴, 장궁과 화살, 각반과 대방패.

검과 창이 물결처럼 하늘을 날아들며 먹구름 아래 은하수를 수놓고.

창공에서 조립된 마갑과 갑주들이 일제히 늘어서며 인기척 없는 기사단으로 모여든다.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만병지주(萬兵之主)」

장인의 심상 너머 대장간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진 무구는, 수천의 군대라도 넉넉하게 무장시킬 수 있을 법한 숫자.

머리 위에 군대가 늘어선 듯한 압도적인 광경은, 댈런마저 무심코 입을 살짝 벌릴 정도.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적창 역시 흔치 않은 감상을 내보였다.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구나. 스스로의 의념으로 모든 병기를 묶었어. 하나하나가 직접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테니···가히 초인의 군세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구나.”

“용족 중에서도 가장 고강하다 알려진 적창께 그런 말을 들으니 영광이오. 다만 예언의 주역이 사명을 짊어지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이니, 잠시만 물러나 주시길 부탁드리오.”

“말 하나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건 누구와 비슷하구나. 알았다. 이번에는 끼어들지 않으마.”

손을 휘휘 내저으며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적창. 댈런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능력은 시체를 회수하면 자연스럽게 계승되곤 했다.

초월자의 경우 역시 상대방의 동의를 얻거나 의지를 복속시켜야 할 뿐, 그 결과 자체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대장장이의 말에 따르면, 저 능력은 그가 사후에 익히게 되었다는 점.

기본적으로 죽은 순간의 시체를 통해,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는 시스템에 사후의 일도 포함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무슨 원리로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네. 하지만 아마 안 될 것 같군.”

대장장이 역시 같은 이유로 회의적인 듯했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그럼?”

“어쩔 수 있나. 조금 고전적인 방식을 취해야겠지.”

수염 사이로 씩 내비치는 미소. 댈런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까아아앙!

황급하게 휘두른 도끼에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지고, 다음 순간 발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시뻘건 창대의 장창 한 자루.

“원래 무의 근본은 맞으면서 배우는 거라지 않나. 죽일 생각으로 하지는 않을 테니 잘 배워보게나.”

“······.”

“다행히 이곳은 의념의 공간이네. 우리에게 시간은 꽤나 많다는 소리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먹구름 아래를 빼곡하게 채웠던 무구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만 단위로 번쩍이는 은빛 파도를 보며, 댈런은 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이런 시발. 무사히 넘어가는 법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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