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2화 (212/288)

212

대장장이(4)

쉬이―!

사각을 찌르는 세검. 우아한 궤적으로 파고드는 화살.

나뭇가지 사이를 짓쳐드는 단도와 우직하게 직선으로 내리꽂는 삼지창.

「회명(回冥)」

「이연답산(二聯踏散)」

「홍염주(紅炎柱)」

그림자로 인영을 만들어 화살대의 중간을 끊어버리고, 화염 기둥으로 삼지창과 단도를 집어삼킨다.

한 번 흘려낸 세검이 방향을 전환하는 걸 도끼를 던져 떨어뜨릴 즈음, 화염 기둥을 가르고 날아드는 두툼한 곡검.

까앙!

댈런은 부러진 검을 들어 묵직한 일격을 쳐냈다.

몇 주 전에 의뢰 보수로 받은 쇄설검은, 이미 검신의 삼분의 일도 남아있지 않았다.

함께 수령한 검집 역시도 언제부턴가 힘을 잃고 그저 단단한 유물 검집 정도로 변해있는 상황.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유물 무기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

애당초 잠시간의 휴식조차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금과 같은 싸움에서, 오래도록 버틸 수 있게 설계된 무구가 흔할 리 있을까.

‘며칠이나···흘렀지?’

무의식적으로 지나간 시간을 셈해보려 한다. 확실한 건 시간 단위를 넘어선 지는 오래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루, 이틀, 닷새, 일주일.

열흘을 넘어서는 순간 셈을 포기했다. 반신이나 다름없는 육신과 두뇌라도 유물 무기와 마찬가지로 한계는 존재했다.

까앙!

반사적으로 뻗어지는 도끼. 눈앞에서 격렬하게 튀어 오르는 불꽃.

극심한 피로에 탈색되어가는 머릿속이지만, 뼛속까지 새겨진 투쟁의 기억은 그 와중에도 눈앞에 닥쳐드는 공격에 잘만 반응했다.

“장인에게 검은 자녀일세. 허나 검객에게 무구는 배필이네. 비검의 창시자인 레레도나라는 그렇게 비유했지.”

백지처럼 새하얘진 의식을 울리는 목소리. 대장장이의 것이었다.

“둘은 완전히 달라. 자녀와는 세대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성장의 단계가 다르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벽이 생길 수밖에.”

그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다음 공세를 읽는다. 등을 노리는 쌍날검. 살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공격.

맞으면서 배운다는 대장장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열흘이 넘도록 이어져온 이 혈투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검로 하나하나에 담긴 의도가 존재했고, 격검의 순간마다 머릿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었던 것.

처음에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파편들의 조합이었지만, 누적되어갈수록 선명한 깨달음으로 구축되어간다.

‘···레레도나라의 비검.’

일전에는 편하게 스킬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였던 무리.

수년간의 피 흘리는 노력 없이도 손쉽게 익혀온 방대한 기술과 그 너머의 심상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받아들이던 기존의 방식을 뒤집는다. 결과가 존재함에도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나가는 역행의 길.

그렇게 돌고 돌아 순리대로 처음부터 밟아나가는 길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함이었고.

“······!”

동시에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고양감이었다.

잠들어있던 신경 다발이 올올이 깨어나는 듯한 감각.

팔다리는 무거워지고 머릿속은 덧칠되어감에도, 알 수 없는 고양감은 의식을 점점 높은 곳으로 띄워 올린다.

“허나 배필에게는 벽이 없다네. 원래라면 있어야 할 벽을 바닥까지 낮추기 위해 연을 맺는 것이기도 하지. ”

그렇게 부유한 의식 속을 대장장이가 흘리듯이 건네는 단어 하나하나가 파고들고.

“배필의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나?”

평소라면 그저 주문쟁이처럼 말한다 느꼈을 선문답에서, 한 발 앞서 결론과 정답을 도출해낸다.

‘결코 떼어낼 수 없다는 거지.’

“결코 떼어낼 수 없다는 것.”

「회검(回劍)」

정답을 안 순간, 결과물은 이미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

찬물을 끼얹은 듯 선명하게 되돌아오는 시야.

가장 먼저 보인 건 청백색으로 번쩍이는 검신이었다.

전격술사 댈타리온과의 일전에서 한 번 부러진 뒤, 대장장이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성검 토르타니스.

수리를 끝마치고 대장간 안에 있어야 할 검이, 공간과 제약을 모두 뛰어넘어 그의 손안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그게 첫 단계일세.”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대장장이가 흐뭇하게 웃는다.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양손으로 성검을 들어 올렸다.

그저 쥔 것만으로도 새로운 힘이 지친 육신을 덥히기 시작한다.

기초가 되는 심상부터 다시 한번 쌓아 올려진 레레도나라의 비검. 그 묘리가 검을 잡은 순간 기력을 북돋아 주고 있는 것.

‘···언제부턴가 비검의 숙련도가 멈췄던 게 이런 이유였나.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검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신비로 분류되는 B등급 이상의 스킬.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위력과 다방면의 응용도를 지닌 선대의 비기들을, 자신만의 힘으로 다듬어볼 노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비단 6위계에 올라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도, 비검이나 용혈을 고유 스킬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왔던 바.

회명과 발화, 두 가지 고유 스킬을 비검의 힘으로 조합한 것 역시 그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아니었나.

‘너무 기능적인 측면에만 몰두해 있었어. 애당초 신비의 근원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을 대지 않은 채 의지만으로 무구를 제어하고, 거기에 술식의 힘을 불어넣는 기예.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는 비검의 능력이지만, 사실 그 본질은 단순한 기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레레도나라의 비검이 품은 근원심상은, 다름아닌 무구와의 합일(合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있는 두 개체임에도, 하나인 것처럼 심성과 의지를 공명시키는 것.

그건 레레도나라가 자신의 세 번째 성검, 레레도나텔과 평생을 함께했던 이유와도 맞닿는 대목이었다.

쉬이익―!

날아드는 장검. 이번에는 쳐내지 않는다.

두 발은 단단하게 지면을 디디고, 양손은 성검을 굳게 잡은 채 앞으로 뻗고 있었을 뿐.

그 순간 부동의 육체 이면에서 피어오른 의지가 검로를 완곡하게 뒤틀었다.

촤악!

스치듯이 지나간 장검에 옷깃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뿐.

스으으······.

스쳐 지나간 장검이 땅에 박히기 직전 멈춰서더니, 서서히 떠올라 댈런의 어깨 곁에 자리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쐐애애액!

거침없이 날아들던 창과 칼이 실을 묶어 당긴 듯, 허공에서 뭔가에 덜컥 걸린다.

달려들던 빈 갑주들이 멈칫하며 고꾸라지고, 부위별로 분리되며 우르르 무너진다.

이내 무너진 갑주가 다시 조립되어 일어서고, 멈췄던 무기들이 끄트머리를 반대로 돌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넘어오는 제어권. 순식간에 쉰이 넘는 무구들이 수만의 병기를 향해 첨단을 겨눈 순간.

“여기까지.”

낮고 굵은 목소리가 공터를 울리며, 남은 무구들이 순식간에 대장간의 굴뚝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짝. 짝. 짝.

느릿하게 박수를 치며 걸어오는 대장장이. 댈런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썩을.”

숨결마다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온몸의 근육과 내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방식의 싸움 자체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상대방을 꺾기 위한 목적을 배제하고서, 그저 끝없이 쏟아지는 공세를 받아내며 그 너머에 숨겨진 무리를 학습하는 방식이라니.

대장장이는 몇 가지 물건을 들고 와 곁에 내려놓고 앉았다. 그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단한 잠재력이군. 아무리 예언의 주인공이라 해도 말이야. 솔직히 이보다는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네.”

“···얼마나 지났소?”

“몇 주 정도. 아마 현실에서는 사나흘쯤 흘렀겠군.”

“후우. 내가 만든 캐릭터만 아니었어도 부모님 안부부터 물어봤을 거요. 빌어먹을.”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그대로 눈밭에 드러누워 버린다.

대장장이는 알아듣지 못할 욕설에 수염을 긁적이더니, 이내 곁에 놓아두었던 두 가지 물건을 건네줬다.

부드러운 천에 싸인 채 건네진 물건은 지팡이와 갑옷.

모니터 너머에서는 본 적 없는 종류인데다, 품고 있는 기운만 봐도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지저룡의 등뼈로 만든 지팡이. 그리고 비늘을 이어붙인 갑옷이라네. 자네에게 맞는 물건은 아니고···좋은 동료들을 많이 뒀을 것 같아 준비해봤어.”

“저 수많은 무기들을 다루면서 망치질까지 한 거요?”

“뭐 어려울 게 있나. 망치질이야 평생 한 거니 신경쓸 거리도 없다네.”

“······.”

장인으로 초월자의 위치에 도달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까.

댈런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지팡이와 갑옷을 받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어쨌든 고맙소만···이것들 가져갈 수는 있는 거요? 생전에 만든 게 아니지 않소.”

“자네가 가져온 지저룡의 부산물로 만들었으니 괜찮을 걸세. 지금 자네가 들고 있는 성검 토르타니스처럼 말이야.”

대장장이가 끌끌 웃었다. 덥수룩한 수염이 덩달아 움찔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덥수룩한 수염은 곳곳이 불에 그을렸는지, 구멍 숭숭 뚫린 치즈처럼 여기저기 공백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지난 몇 주간 그 역시 수련을 돕는 일과 작업을 동시에 병행해온 탓이겠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만 단위의 무구를 통제하면서, 동시에 용의 부산물을 무구로 만들어내는 일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중간중간 지켜본 결과 알겠더군.”

“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말이네.”

장인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댔다.

“마음이 급해 보이더군. 그럴 만하다 생각했어. 자네 같은 변수가 존재한다면 악신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지. 고된 길을 걸어왔음이 틀림없어 보였네.”

“틀린 말은 아니군.”

“그래서 자네는 내 기술을 전수받을 수 없다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눈살을 찌푸리는 댈런에게 대장장이는 손을 내저으며 되물었다.

“대장장이의 가장 큰 덕목이 뭔지 아나?”

“모르지.”

“바로 무거운 엉덩이일세. 몰입하는 시간. 아니, 정확히는 시간의 흐름마저 망각한 몰입이지.”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 뒤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사후에야 비검의 묘리를 진정으로 깨달은 것 역시 그런 이유라네. 뛰어난 전사는 대장장이가 될 수 없고, 뛰어난 대장장이는 전사가 될 수 없지. 더 높이 올라갈 자격을 거머쥐는 대가는, 더 깊이 파고 내려갈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야.”

그가 꺼내든 건 망치였다.

모루 앞에서 항상 손에 쥐고 있던 망치. 수십 년의 세월이 벗겨지고 우그러진 흔적으로 고스란히 녹아든 물건.

“이걸 르베론에게 전해주게나.”

망치를 평평한 돌 위에 살포시 올려두며 대장장이가 말했다.

“미스릴의 제련자라면 그 망치에 담긴 흔적을 읽어낼 수 있을 걸세. 맥이 끊긴 용골 장인의 기술을 부활시킬 수 있을 거야.”

“···나야 고맙지만, 이걸 왜 그 양반에게 주는 거요?”

“자네라면 알지 않나. 나는 생전에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퀘스트 몇 번 하면서 호감도작을 좀 했고, 기술 몇 개 배운 게 다인데.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평면의 세상과, 한 개인이 살아온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지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느껴지곤 했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망치를 주워들었다. 그는 아공간에 망치를 넣고 대장장이를 돌아봤다.

“아무튼 고맙소. 덕분에 많이 배워가······.”

대장장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다시 불어오기 시작한 눈보라가, 그가 있던 자리에 새하얀 눈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

“······.”

온기는 사라졌지만 다른 것들은 여전히 공터에 남아있었다.

쉰 자루쯤 되는 창칼과 사방에 난자한 검흔,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굴뚝 모양의 커다란 대장간까지도.

유산을 남긴 이는 사라지기 마련.

그리고 유산을 받은 이는 그 대가로 다시 일어나는 게 순서겠지.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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