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제국의 습격(1)
후덥지근한 열기가 피부에 들러붙는다. 습하고 탁한 공기. 댈런은 눈을 떴다.
“일어났구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갈색 수염의 노인이었다.
“이거 보게. 조금만 기다리면 일어난다 하지 않았나.”
“흐익···이, 이게 말이나 되는······.”
그리고 그 뒤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상단주 볼크마와 펠버의 제자 토미.
볼크마의 얼굴은 유독 하얗게 질려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댈런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 있소?”
“댈런···자네 정말 댈런 맞나? 자네 나흘 만에 일어났네. 방금까지 정말 죽은 것처럼 누워있었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럼 누가 뒈졌다가 살아나기라도 했다는 건가. 댈런은 짐짓 표정을 굳히며 보란 듯이 허리춤을 더듬었다.
“나 아니면 누구라는 거요. 혹시 도끼라도 던져주면 믿을 수 있겠소?”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걸세! 말이!”
“헛소리는 그쯤하고 가서 스튜나 끓이게, 갈리오스 상단주. 자네가 오늘 식사 당번 아닌가? 토미, 이 양반이 이상한 양념 넣지 않게 옆에서 잘 도와주도록.”
“예, 스승님.”
허리춤을 더듬는 손길에 펄쩍 뛰며 기겁하는 볼크마와, 그를 타박하며 저쪽에 피워둔 모닥불로 몰아가는 발렌티노 사제.
댈런은 피식 웃으며 세 사람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며칠 만에 깨어난 것인지, 여기저기 결리는 관절부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물론 어깨를 몇 번 돌리고, 일어나서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그런 뻐근함은 전부 해소됐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났을 즈음, 볼크마와 토미를 모닥불 곁에 보내버린 펠버가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조금 걱정했다네. 이번만큼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곁을 지켜주려고 이 밑바닥까지 내려온 거요?”
“살고 싶으면 그래야 하지 않겠나? 자네를 두고 나갔다가 성기사의 칼침과 마녀의 주문을 동시에 얻어맞을지도 모르는데.”
끌끌거리며 짓궂은 웃음을 흘리는 노인. 댈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펠버는 지팡이를 곁에 내려두고는, 널찍한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땠나?”
“어땠냐니?”
“자네의 힘이 성장하는 궤도는 상당히 기이하지. 관찰하려고 한 건 아니었네만···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게 있더군.”
수염을 슬슬 쓰다듬는 노인의 손. 펠버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특별한 장소에 도착하거나, 혹은 특정한 적을 쓰러뜨리거나. 자네의 힘은 그럴 때마다 계단을 딛고 올라가듯 강해져 왔네.”
“······.”
“비밀을 파고들 생각은 아닐세.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허이. 단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인생을 건 영웅에 대해 궁금했을 뿐이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귀신 같으시군.”
댈런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외적인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은 듯 보이나, 펠버 발렌티노는 근본적으로 용혈의 힘에 예속된 종복이다.
더군다나 예속되기 이전에도 댈런을 위해 목숨을 불사른 전적이 있는 만큼, 그가 계승자 DLC의 비밀에 근접했다는 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저 노년의 마법사라면 눈치챈 지는 꽤 오래되었을 게 분명한 일.
오히려 이제 와서야 그에게 넌지시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봐야겠지.
‘···계승자 DLC는 내가 가진 힘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모니터 너머에서 결말을 맞은 캐릭터의 시체를 회수해, 그 회차의 힘을 계승하는 권능.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알게 된 건, 그 권능이 역천의 우물이라는 존재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역천의 우물은 각 시간선의 결말을 흡수하고, 그걸 보관한 뒤 댈런에게 넘겨주는 주체.
결국 상태창이니 계승자 DLC니 하는 것들 역시, 이 세계의 법칙과 완전하게 괴리된 무언가는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어느 수준의 위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이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시스템이 아닌 이상, 다른 존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간섭당할 수 있다는 소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펠버가 이제서야 말을 꺼낸 건, 일종의 부드러운 경고였다.
자신이 눈치챈 만큼, 다른 이들 역시 알아챌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
그리고 그건 가벼이 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위계라는 개념 자체를 뛰어넘은 듯 보이는 그 권능 자체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을지언정.
댈런이 이전 회차들을 계승해 성장하는 걸 저지하는 방법마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실정이니까.
‘시체가 있던 장소를 공간째로 소멸시키거나, 그 시체를 집어삼킨 존재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 역시 사실.
6위계만 되어도 시공간에 간섭이 가능해지는데, 신위(神位)라 불리는 7위계의 악신들이 그보다 못할 리는 만무했다.
‘악신들 중에도 가장 교활한 에낙사구스라면···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군.’
댈런이 마지막으로 플레이했던 회차.
가진 모든 지식과 노력을 쏟아부어, 클리어에 한없이 근접했던 회차를 저지한 것 역시 놈이 아니던가.
어찌됐건 그렇다고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그래서 한발 앞서 종말의 행보를 저지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시체를 회수하는 것.
‘남은 시간을 고려했을 때···앞으로 회수할 가능성이 보이는 초월자의 시체는 둘.’
별을 쏘아 떨어뜨린 궁사는 동쪽의 망망대해 건너편에 잠들어있었고, 태고의 거인과 마수들을 부리던 소환사는 서쪽 대사막 너머의 유적지 깊은 곳에 파묻힌 상태였다.
종말이 시시각각으로 대륙을 집어삼키려 다가오는 지금, 그걸 찾자고 배를 타고 떠나거나 사막을 횡단할 수도 없는 노릇.
마지막 회차의 시체는 아예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남은 가능성은 이제 둘뿐이었다.
‘흑마법사와 성자.’
후자는 사실상 손에 넣은 거나 진배없으나, 전자를 얻기 위해서는 저 남쪽 뱀파이어의 땅에 들어가야만 했다.
제국이 숨겨왔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놈들 역시 조만간 날뛰기 시작하겠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미궁도시로 돌아가, 까마귀 둥지를 통해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는 게 순서였다.
“아, 그리고 이거 받으시오.”
“응? 뭔가?”
댈런은 아공간에서 지팡이를 꺼내 펠버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아드는 마법사를 향해 그는 덧붙였다.
“친구의 선물이오. 용 뼈를 갈아서 만들었다나 뭐라나.”
“용 뼈···? 설마 지저룡의 용골로 만든 지팡이라는 이야긴가?”
“그런 것 같소만. 잘 모르겠군.”
“잠깐. 자네, 이런 보물을 어찌 나한테···.”
“노인장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거 내가 쓰면 며칠 못 가서 두 동강 날 거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수염 사이로 입을 멍하니 벌린 마법사를 뒤로 하고,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부터 모닥불 쪽에서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스튜가 거의 다 된 모양이었다.
***
‘상태창.’
어둑한 통로 한복판. 불쑥 튀어나온 글자들이 허공을 수놓는다.
―――――――
이름 : 댈런
레벨 : 42
[근력 : 60] [기량 : 57] [체력 : 52]
[감각 : 51] [지능 : 56] [마력 : 54]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카스마의 붉은 바람(B),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B), 용골 가공(B)
*고유 스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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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전선에서 쑴의 군대와 전쟁이 끝난 이후, 거의 몇 주 만에 확인해본 상태창이었다.
지저룡과 놈의 권속들을 두들기며 레벨이 두 개 올랐고, 댈루카힘의 능력을 계승하며 얻어낸 능력치는 도합 두 자릿수에 달할 정도.
[용골검의 주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근력 +3, 기량 +6, 체력 +5, 감각 +1, 지능 +2, 레레도나라의 비검(B),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B), 용골 가공(B)]
[레레도나라의 비검(B)을 이미 보유중입니다. 스킬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더불어 80퍼센트 언저리에서 정체되었던 비검의 숙련도 역시 단숨에 100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무구를 제어하는 언령술과 용골을 가공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한 건 덤이었다.
‘기술을 익혀도 써먹을 수는 없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되는군.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댈루카힘이 어째서 대장장이가 될 수 없다고 했는지, 그 능력을 계승하고 나서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신비 그 자체인 용골까지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한들,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어야 하는 건 변함없는 현실.
한 자루의 검을 만들기 위해 들이는 시간은 짧게 잡아도 며칠, 길게는 몇 주에서 몇 달까지 소모되는 바.
댈런과 같은 초월자가 제대로 사용할 만한 품질의 무구는, 결코 허공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수백 년 이상의 세월을 거뜬히 버텨온 유물 무기들마저, 조금만 격한 싸움에 들어가면 금세 날이 나가고 결국 부러지지 않던가.
‘그래도 가장 큰 수확은 따로 있으니까.’
대장장이가 남긴 영역,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생전에 품은 심상을 뛰어넘어, 사후에도 끊임없이 갈고닦아 불려놓은 땀방울의 결정체.
설령 장인으로서 이를 활용하기가 여의치 않더라도, 수만 정의 무구를 품은 대장간은 병기고로서의 가치 역시 충분했다.
대장간에 보관된 무구들은 하나하나가 전설적인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탄생한 걸작들.
원재료를 주고 가공한 성검이나 지팡이와 달리 완전히 현물화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영역을 개방한 시간 동안만큼은 수만 정의 무구가 품은 능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게 가능했다.
[크히히히! 보물이다, 보물!]
문득 상념을 뚫고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댈런은 벽에서 등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난 문 안쪽에서 호박만 한 크기의 떡덩이은 물체가 차박차박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잔뜩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흘리는 웃음.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였다.
“끝났나?”
[예, 주인님! 돌틈 사이에 끼어있는 금화 한 닢까지 싹 긁어모았습니다. 흐흐흐!]
“잘했다. 이제 돌아가자.”
[옙! 크히히히!]
지저룡의 용굴 밑바닥에서 눈을 뜬 이후 꼬박 사흘이 흘렀다. 댈런과 일행은 용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남아있는 보물을 깡그리 긁어모았다.
일반적인 탐사단이라면 몇 달은 족히 걸릴 업무였으나, 금화에 눈이 돌아간 악마는 그 기간을 수십 분의 일로 줄여내는 데 성공했고.
댈런은 자연스럽게 갈리오스 상단주와의 계약을 새로 갱신했다.
‘전투와 노동 모두 이쪽에서 부담한 걸 생각하면 구 대 일도 많군. 십 대 영으로 하지.’
‘무, 무슨 소린가! 댈런,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대신 갈리오스 상단을 통해서 일체 처분하면 되잖소. 용굴을 통째로 털어먹은 유물을 유통하는 거면,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명성만 해도 금전적으로 상당한 가치일 텐데?’
‘······.’
도끼를 만지작거리는 추임새까지 넣어주자 재계약은 금방 성립되었다.
그렇게 사흘간 주인 잃은 용굴을 들쑤신 결과, 도시의 일 년치 예산에 맞먹는 재물로 아공간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황금 구역의 경매장이라도 통째로 사버리는 게 가능하겠군.’
댈런은 머릿속으로 구매 목록을 나열하며 일행과 함께 용굴 입구를 나섰다.
일주일 만에 보는 햇살은 나직한 노을빛이었다.
빼곡하게 솟아오른 나무들 너머로 흘러드는 주홍은 다채로웠고, 머리 위 어둑한 남색의 장막이 그 모든 걸 덮어가는 정경.
시원한 바깥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고된 여정 끝에 감수성에 잠기기 알맞은 고즈넉함이었다.
까악―! 까악―!
난데없이 큼직한 까마귀가 날아들어 코앞에서 날개를 퍼덕이기 전까지만 해도.
“깍― 댈런! 대체 왜 이제야 나온 거야!”
“···일이 좀 있었소.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거요?”
댈런은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일주일 만에 무슨 일이 터지는 게 가능한가?
시에나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제국군이 예상외로 주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 알 수 없는 잡음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면서.
그렇기에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고, 까마귀가 용굴 안의 마력을 버틸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해서 바깥에 두고 온 거였는데.
“까악! 사건이 터졌지! 이런 까마귀로···음? 직접? 알겠어. 잠시만···!”
뭔가 투닥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갑자기 눈이 휙 돌아가는 까마귀.
이내 다시 돌아온 눈동자는 본래의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이었다.
“댈런! 큰일났습니다!”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루시아의 목소리. 까마귀는 댈런의 어깨 위로 올라와, 날개를 거듭 퍼덕이면서 소리쳤다.
“제국이 성기사단만을 노린 게 아니었습니다! 제국군이 청동 성벽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어요!”
이런 시발?